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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역사-문화 및 영화산업 개요 (1/3)

beautician 2022. 7. 18. 10:25

인도네시아 역사-문화 및 영화산업 개요

2022. 7. 1.(금)

 

 

1.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인

 

1) 고대

 

10-11세기 경의 스리위자야 왕국 판도

 

인도네시아의 역사시대는 7세기 힌두-불교 왕국인 스리위자야 왕국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스리위자야 왕국이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에서 발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힌두-불교는 인도양이나 말레이 반도를 통해 유입되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스리위자야 왕국은 말레이반도와 서부자바까지 영향력을 미치며 15세기까지 존속했는데 일각에서는 왕오천축국전을 쓴 8세기 통일신라의 혜초가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네시아 가면서 스리위자야 왕국을 지나갔을 거라는 주장을 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스리위자야 왕국 이전에도 인도네시아 지역에 왕국들이 존속했겠지만 특별한 문헌이나 유적을 거의 남기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강력한 국가형태를 이루지 못했거나 높은 문화수준에 이르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자바에서도 힌두불교 왕국들이 들어서는데 7-8세기에 중부자바 마글랑 지역에 보로부두르 사원을 건축한 사일렌드라 왕국이 대표적입니다. 이 시기에 족자를 중심으로 한 중부자바 지역에 쁘람바난 사원, 라뚜보코 사원 등 거대한 힌두사원들이 세워지는데 다시 자바 한복판에서 힌두불교문화가 절정에 다다랐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쁘람바난/라뚜보코 사원에는 우리 천불사원과 유사한 라라종그랑과 반둥 본도워소 왕자의 전설이 있습니다. 하루 밤 사이 천 개의 불탑을 짓는 것을 혼인의 조건으로 내세웠던 라라종그랑과 자신을 속인 벌로 라라 종그랑으로 석상으로 만들어 버린 반둥 본도워소 왕자의 복수 이야기 속에서 당시의 시대상과 거인들이 등장하는 전쟁, 악마를 부리는 도술, 그 악마조차 속이는 인간의 지혜와 배신 등 당시 세계관도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쁘람바난 사원

 

아이를랑가의 까후리빤 왕국, 거기서 파생된 젱갈라 왕국과 까디리 왕국, 켄 아록의 싱가사리 왕국이 번성했던 9-12세기의 자바는 여전히 힌두 전통이 강하고 이러한 분위기는 께옹마스 전설, 안데안데루뭇 전설 등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둘 모두 왕실에서 쫓겨나거나 달아난 아름다운 공주와, 그 공주를 찾아 나선 왕자의 고군분투를 그립니다. 왕실의 알력, 전쟁으로 인한 왕족들의 피신, 재결합의 노력, 그리고 역시 빠지지 않는 마법과 도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히 현재 발리 문화 중 레약 귀신과 마녀 랑다 전설의 원형인 랑다 기라가 인근 지역에 독을 퍼트려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자 이에 맞선 아이를랑가의 군대가 랑다 기라가 동원한 온갖 마물들의 군대와 싸웠던 이야기는 까후리빤 왕국 시대의 중부자바 전설입니다. 자바의 전설이 발리에 남은 이유는 서쪽으로부터 이슬람 술탄국들의 압박을 받아 멸망한 중부자바 힌두-불교 왕국의 왕실과 유민들이 바다 건너 발리로 피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랑다 기라와의 전투 이야기 역시 발리에서 공연되는 바롱댄스 속에 녹아 있습니다.

 

바롱댄스에서 아이를랑가/바롱의 군대가 랑다의 마법에 빠져 자해하는 장면

 

한편 스리위자야, 사일렌드라 왕국 시기에 서부자바에서는 빠자자란 왕국으로 더 잘 알려진 순다 왕국이 7세기에 불교-힌두 왕국으로 시작해 16세기 중반까지 거의 천 년 간 존속합니다. 순다 왕국은 당연히 수많은 전설들을 품고 있지만 자바 남쪽바다 마물들의 여왕 니로로키둘 이야기의 원형인 카디타 공주의 전설이 유명합니다.

 

바수키 압둘라가 그린 니로로키둘

 

이슬람 신도가 전체 인구의 87%를 차지하는 인도네시아에서 아직도 힌두-불교 왕국 시대의 니로로키둘을 추앙하는 것은 일견 매우 이상해 보입니다. 유일신 종교인 이슬람 술탄국들이 강력한 토착 무속신들을 함께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 이유와 실마리를 15-16세기 사이에 활동한 왈리송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왈리 송오란 초창기 이슬람 전파에 크게 기여한 아홉 명의 포교사를 뜻합니다. 실제 9명 이상이라고 알려진 그들은 수난 꾸두스, 수난 깔리자가 등 정사와 야사에 많은 에피소드를 남긴 정치인이자 종교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름 앞에 극존칭인 ‘수난’이 붙을 정도로 존경받는데 그들의 전설과 행적을 따라가 보면 이슬람 포교사라기보다는 끄자웬 도사라는 표현이 더욱 적당할 듯합니다. 그들은 깜짝 놀랄 만한 도술/백마술을 부리며 미래를 전망하고 예언서를 남겼습니다.

 

이슬람 포교사 왈리 송오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중부자바에 이슬람 왕국인 드막 술탄국이 등장하던 15세기 중반부터입니다. 중부자바는 까후리빤 왕국이 갈라진 후 혼란을 겪던 중 13세기에 들어 쿠빌라이칸의 몽고군 침공을 받습니다. 당시 싱가사리 왕국의 꺼르타느가라 대왕의 아들 라덴 위자야 왕자는 몽고군에 대항할 자바 연합군 중 끄디리 왕국의 자야깟왕이 부왕을 살해하고 중부자바의 실권을 쥐자 마치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이 당나라군을 끌고 들어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처럼 오히려 몽고군의 앞잡이가 되어 자바연합군을 격파합니다. 라덴 위자야가 연남생과 다른 점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승전연회를 빌미로 몽고군 장수들을 초청해 모두 척살하고 몽고군을 몰아냈다는 것입니다. 그후 그는 마자빠힛 왕국의 시조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추앙되고 있습니다.

 

15세기의 마자빠힛 왕국 전성기

 

마자빠힛 왕국은 전성기에 현재의 인도네시아 영토 대부분을 지배하거나 복속시켜 영향력을 끼쳤고 동시대 다른 왕국들의 전설과 민화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스리위자야 왕국의 뒤를 이어 16세기 수마트라와 말레이반도를 지배한 말라카 왕국 국왕이 마자빠힛의 공주에게 청혼했다가 이에 반발한 그곳 용사 따밍사리와 말라카의 항뚜아 제독이 치열한 결투를 벌였던 이야기가 나옵니다. 따밍사리라는 마자빠힛 용사의 끄리스 단검엔 강력한 보호주술이 걸려 있어 도검불침 상태인 그를 죽이기 힘들었지만 결국 그 끄리스를 빼았아 찔러 죽였고 이후 그 끄리스는 항뚜아의 소유가 됩니다. 

 

항뚜아는 역사상 실존인물로 지금도 말라카 해협에 출몰하며 콘테이너 선들을 위협하는 등 악명을 떨치는 해적들을 물리치고 심지어 포르투갈 함대와 해전을 벌였습니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장군과 장수들은 실랏(silat)이라 하는 유술 비슷한 전통무술은 물론 삭티(sakti)라 하는 도술을 겸비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항뚜아는 마자빠힛 국왕에게 하사받은 그 따밍사리의 끄리스로 많은 전공을 세우다가 말년에 말라카 해협 바다 속에 떨어뜨려 망실했는데 지금도 현지 주술시장에선 따밍사리의 끄리스라고 주장하는 모조품들이 많이 나와 마케팅이 한창입니다.

 

다양한 끄리스 (단)검

 

마자빠힛 왕국은 고도의 문명을 구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지금 인도네시아 행정수도 이전이 진행되고 있는 동깔리만탄에 있었던 꾸타이 꺼르타느가라 왕국은 마자바힛의 왕실 목수 두 명을 지원받아 왕궁의 인테리어를 했다는 민화도 있습니다.

 

이 마자빠힛 왕국이 15세기에 들어 이슬람 술탄국인 드막 왕국에 멸망하며 유민들이 발리로 넘어가게 됩니다. 발리에서 힌두교 인구가 압도적인 것은 그들이 마자빠힛 왕국 유민들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왼쪽부터&nbsp;<순델볼롱>(1981), <순델볼롱>(2007), <수잔자는 무덤 속에서 숨쉬고 있다>(2017)

 

순델볼롱의 전설은 드막왕국에서 유래합니다. 아름다운 후궁이 회임하자 이를 질투한 왕비가 흑마술사를 시켜 산뗏저주술을 시전하죠. 산뗏을 맞은 후궁은 지옥 같은 고통 끝에 죽고 아기는 무덤 속에서 후궁의 등을 뚫고 세상에 나오지만 결코 살아남지 못합니다. 이후 후궁의 원혼이 왕궁에 출몰하기 시작했는데 등에 큰 구멍이 난 모습의 이 여귀를 사람들은 순델볼롱(구멍이 난 창녀)라는 치욕적인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영험한 울라마(술탄국이기 때문에 두꾼 대신 이슬람 지도자가 등장하기 시작)가 이 귀신의 정수리 어딘가에 ‘빠꾸 꾼띨아낙’이란 큰 대못을 박아 다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후 후궁의 귀환을 기뻐하는 술탄, 기절할 듯 진저리를 치며 두꾼을 몰아세우는 왕비, 후궁을 다시 죽여 자신의 영험함을 증명해야 하는 두꾼,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두꾼이 빠꾸 꾼띨아낙을 제거하는 데에 성공해 왕궁의 수많은 관료들 앞에서 다시 무시무시한 순델볼롱의 모습으로 돌아간 후궁이 왕실과 왕국에 숨막힐 듯한 저주를 남김없이 퍼붓는 것으로 이 전설은 마무리됩니다.

 

빠꾸 꾼띨아낙&nbsp;(원혼의 대못)

 

실제로 드막 왕국의 치세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당시 통치방식은 아직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갖춰지지 않아 각 지방의 토후들을 통한 봉건통치가 일반적이었죠. 그래서 힘을 키운 토후들의 명령불복과 반란이 잦았고 왕족 간의 다툼과 독살도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빠장 왕국을 세운 조코 띵키르, 주술이 담긴 끄리스를 쓰면서 전투 중 배가 찢어져 창자가 쏟아졌는데도 그걸 단검 손잡이에 묶고 싸움을 계속해 상대방을 밀어붙인 드막 왕실의 간웅 아리야 뻐낭상, 드막-빠장왕국의 뒤를 이어 마타람 왕국을 세워 결국 중부자바를 석권한 수타위자야(스노빠티) 등 뛰어난 무술과 도술을 겸비한 영웅들이 등장하죠.

 

수타위자야가 빠장 왕국과 반목하던 시기에 족자 남쪽 빠랑뜨리티스 해변에서 예의 남쪽바다 마물들의 여왕 니로로키둘을 만나 혼인하고 니로로키둘은 스노삐티를 비롯한 모든 마타람 후계자들의 영적 부인이자 왕국의 수호자가 되는 사건은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회자되는 일화입니다.

 

마타람 왕국은 그로부터 160년쯤 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간섭을 받아 1755년 기얀티 조약을 통해 두 개의 왕국과 두 개의 공국으로 갈라지게 되지만 아직도 하멩구부워노 왕조 술탄이 지배하는 족자 술탄국, 빠꾸부워노 왕조의 수라카르타(솔로) 수난국은 여전히 니로로키둘을 공식적인 왕실의 수호자로 여깁니다. 두 왕실 모두 마타람 왕국의 후예입니다.

 

기얀티 조약 결과 분열된 마타람 왕국(수라카르타 수난국,&nbsp;족자 술탄국,&nbsp;망꾸느가란 공국,&nbsp;빠꾸알라만 공국)

 

섬뜩할 정도로 아름답고 자존심 강하며 강력한 힘을 가진 니로로키둘은 그래서 아직까지 인도네시아인들 마음 속에 '마타람 왕국 적통 후계자의 수호신'이란 위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역대 자바의 제왕들과 현대사 속의 대통령, 술탄들이 니로로키둘과의 관계를 공공연히 주장하거나 과시했습니다. 니로로키둘의 가호를 받는 사람이 마타람의 적통이라는 인식이 자바인들 사이에 강해 과거 자바전쟁을 통해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물론 본국마저 파산 직전까지 밀어붙인 족자 술탄국의 디포네고로 왕자, 20세기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공화국 부통령을 역임한 하멩꾸부워노 9세를 비롯한 여러 술탄들, 특히 수카르노와 수하르토를 비롯한 현대사의 대통령들이 니로로키둘을 만났다, 혼인했다, 가호를 받는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회자되었던 것입니다. 니로로키둘의 가호는 자바 백성들에겐 국가 지도자의 필요충분조건이었던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