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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제를 물리친 꾸따이 꺼르타느가라

beautician 2022. 5. 19. 11:23

[동부 깔리만탄 민화] 지네의 호수 (Danau Lipan)

 

뿌뜨리 아지 버르다라 뿌띠(Puteri Aji Berdarah Putih), 그런데 피부색은 고증 착오인 듯.

 

‘지네들의 호수’라는 의미의 리빤 호수(Danau Lipan)는 동부 깔리만탄에 있습니다. 정확히는 무아라 까만 지구(Kecamatan Muara Kaman)에 있는데 인도네시아 신수도가 들어서는 꾸따이 꺼르타느가라 군의 훌루 떵가롱(hulu Tenggarong)으로부터 120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지명 앞에 다나우(danau) 즉 호수를 뜻하는 단어가 있지만 사실 이곳엔 물이 없습니다. 덤불만이 무성할 뿐이죠.

 

하지만 한때 무아라 까만까지 바다물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곳 해변 가까이에 번잡한 도시가 형성되고 왕국도 건설되었죠. 그곳엔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는데 뿌뜨리 아지 버르다라 뿌띠(Puteri Aji Berdarah Putih) 즉 ‘하얀 피가 흐르는 아지 공주’라는 살벌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일단 ‘아지 공주’라고 줄여 부르기로 합니다.

 

하지만 사실 아지 공주가 그런 이름으로 불린 것은 피부가 너무 희고 투명해서 시리(sirih-빈랑) 열매를 먹고 그 빨간 색 즙을 삼킬 때 목을 넘기는 빨간 즙의 색깔이 투명한 피부를 통해 보일 듯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입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왕국의 경계를 넘어 먼 곳까지 알려졌습니다.

 

심지어 바다 건너 중국까지도 그녀의 미모에 대한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러자 중국 황제가 아지 공주에게 청혼을 한다며 배에 대규모 군대와 선물들을 싣고 찾아왔습니다. 물론 중국 역사상 황제가 동남아 해상 원정을 나왔다는 기사는 본 적이 없으므로 이건 중국 또는 화교에 대한 반감이 넘쳐나기 시작하던 17세기 이후에 수정되고 각색되었거나 중국 남부 어딘가의 토호국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원문에 ‘중국 왕’이라고 되어 있으니 중국황제로 표기하기로 합니다.

 

중국 황제는 큰 환영을 받았고 공주도 성대한 연회에 참석했고 춤과 노래가 흘러 넘쳤습니다. 중국 황제가 거기까지 온 것이 자신과 혼인하려는 것임을 아지 공주도 잘 알고 있었으나 황제가 식사를 하는 방식을 보니 욕지기가 치밀었습니다. 마치 한달 굶은 개가 음식을 먹는 것처럼 게걸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가 청혼을 했다는 사실이 마치 공개적으로 따귀를 맞은 것처럼 굴욕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왕국을 위해 공주는 자신의 취향이나 굴욕을 스스로 갈무리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공주는 정중히 청혼을 물리려 했으나 중국황제는 격분하여 연회를 뒤집어 엎어버리고 곧바로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왕국엔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황제가 대군을 보내 아지 공주의 왕국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수한 범선들을 타고 온 중국 병사들은 해안에 상륙하여 왕국을 향해 거센 파상공세를 펼쳤습니다.

 

아지 공주는 고군분투하며 비범한 용맹을 보였지만 왕국의 운명은 이제 풍전등화와도 같았습니다. 이제 그녀에겐 평생 절대 쓰고 싶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던 힘을 끌어내야 하는 시간이 오고 말았습니다. 공방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성벽 위로 걸어 올라가던 그녀의 모습을 본 병사들은 공주가 무엇을 하려는지 의아해했습니다. 개중에는 그녀가 성벽에서 항복을 선언하려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지 공주는 성벽 위로 올라가면서 무언가를 입에 넣으면서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리(sirih) 잎사귀였습니다. 왕실의 일원이라면 어느 정도 고도의 일무삭티, 즉 도술를 익히고 있었는데 아지 공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흉포한 대형 지네떼를 불러내는 것은 왕실 비전의 주술을 발동시키기 위한 주문을 외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성벽 위에 모습을 나타낸 그녀는 한동안 눈을 감은 채 주문을 외우며 입을 오물거리다가 갑자기 입 속의 시리 잎사귀 찌꺼기들을 사방으로 뱉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뱉어진 찌꺼기들이 공중에서 수백만 마리의 지네로 변해 중국 군대를 덮쳤습니다.

 

 

지네들은 아지 공주의 병사들과 적군들이 뒤엉켜 있던 성벽과 전선을 뒤덮으며 중국 황제의 군대를 밀어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부대는 점차 궤멸되기 시작했습니다. 혼비백산하여 해안까지 밀려난 중국 군대는 타고 온 범선에 급히 올라탔지만 지네들은 그들을 도망치도록 놔두지 않았습니다. 지네들은 바다를 헤엄쳐 중국 군대의 배에 올라 차례차례 가라앉혔습니다. 중국 부대는 완전히 궤멸되고 말았습니다.

 

중국 함대가 궤멸된 그 곳이 지금 광활한 들판이 되어 있고 그곳을 지금까지도 리빤 호수, 즉 지네들의 호수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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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민화는 마치 막장 드라마 마지막 장면 자르듯 여기서 끝나기 때문에 그 후 아지 공주와 그녀의 왕국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네 군단을 입에서 뱉어내는 무시무시한 능력이 세상에 다 알려지고 만 아지 공주는 아마 안타깝게도 더 이상 누구에게도 청혼이 받지 못했을 것만 같습니다.

 

아무튼 중국 전설들이 무림영웅들의 장풍과 내공 빼면 시체인 것처럼 인도네시아에선 삭티(Sakti) 또는 끄삭티안(Kesaktian)으로 언급되는 ‘도술’을 빼면 민화나 전설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지 TV의 고대 배경 사극을 보면 주인공들이 붕붕 날아다니며 장풍을 쏘는 게 그래서 좀 이해가 갑니다. (끝)

 

 

지네들의 호수 고사 아트 모음

 

출처:

https://histori.id/legenda-asal-usul-danau-li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