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드막 왕국과 빠장 왕국, 그리고 마타람 술탄국까지 본문
빠장 국왕 아디위자야 (Adiwijaya)가 되는 자카 띵키르(Joko Tingkir)
쟈카 띵키르는 1549~1582년 기간 중 술탄 아디위자야(Sultan Adiwijaya)라는 이름으로 빠장 왕국을 건립한 첫 번째 왕이었다.
배경
자카 띵키르의 원래 이름은 마스 까레벳(Mas Karèbèt)이며 달(Dal)의 해(자바력에서 8년마다 돌아오는 해)의 주마딜라키르(6월) 18일에 새벽녘에 태어났다.
그에게 마스 끄레벳이란 이름이 주어진 이유는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 뼁깅의 끼 끄보 끄낭아(Ki Kebo Kenanga)인 끼 아긍 뼹깅(Pengging Ki Ageng Pengging)이 와양 베베르 그림자극 공연을 열던 중이었고 그림자극을 공연하는 달랑(dalang)의 이름이 끼 아긍 띵키르(Ki Ageng Tingkir) 였기 때문이다. 와양 베베르(wayang bebe)는 힌두의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에서 가져온 이야기들을 근간을 이루는 와양공연으로 달랑은 그림자인형을 다루며 해설을 하는 변사 역할도 하는 사람이다. 달랑이 ‘끄머브렛(kemebret)이라고 낸 와양의 대사가 바람이 새면서 잘못 들려 아기에게 ‘마스 까레벳’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끼 아긍 뼹깅과 끼 아긍 띵키르는 둘 다 쉨 시티 즈나르(Syekh Siti Jenar)의 제자였다. 10년 후 끼 아긍 뼁깅은 드막 왕국에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를 받아 수난 꾸두스가 직접 그를 처형했다. 남편이 죽자 아내인 냐이 아긍 뼁깅(Nyai Ageng Pengging)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자 끼 아긍 띵키르의 미망인인 냐이 이긍 띵키르(Nyai Ageng Tingkir) 마스 까레벳을 데려다 키웠다. 이때부터 그는 자카 띵키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무술과 도술을 익혔고 강인하고 잘생긴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는 끼 아긍 셀라(Ki Ageng Sela)를 스승으로 모셨고 그의 세 아들인 끼 주루 마르타니(Ki Juru Martani), 끼 아긍 뻐마나한(Ki Ageng Pemanahan), 끼 빤자위(Ki Panjawi)와 형제처럼 지냈다. 한편 자카 띵키르는 잘생기고 싸움도 잘했지만 여색을 밝히는 성향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는 이후 아버지이 큰 형이기도 한 끼 아긍 반유비루(Ki Ageng Banyubiru)라고 불리던 끼 끄보 까니고로(Ki Kebo Kanigoro)에게도 사사받았다. 그때 함께 수학한 동문으로는 마스 만짜(Mas Manca), 마스 윌라(Mas Wila), 끼 우라길(Ki Wuragil) 등이 있었다.
이 시기에 그와 인연을 맺은 이들은 훗날 모두 빠장 왕국의 요직을 맡는 인물로 성장한다.
족보
.자카 띵키르는 끄보 끄낭가의 아들이며 아디빠티 안다야닝랏(Adipati Andayaningrat)의 손자다. 아디빠티 안다야닝랏은 샤리프 무하마드 끄붕수안(Syarief Muhammad Kebungsuan)이라고도 불렸다.
드막 왕국에 복종
자바땅의 역사서에 따르면 자카 띵키르는 처음부터 드막 왕국의 수도에 가서 일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가 드막의 수도로 가는 과정, 그리고 거기서 일하면서 벌어진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다.
고대의 시 뿌장가(pujangga)는 왕가의 불미스러운 일들을 은유로 매끄럽게 고쳐서 기록하는 관례가 지배적이었다. 자카 띵키르의 여정에 대해서도 그러한 은유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당시에는 드막 왕국에 가기 위해 뗏목을 주요 교통수단으로 사용했다. 동문들인 마스 만짜, 마스 윌라, 끼 우라길이 그와 이 여정을 함께 했다. 뿌장가 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자카 띵키르는 뗏목으로 여행하던 중 스렝엥게 강의 깊은 곳에서 악어 때의 공격을 받는다. 하지만 악어떼를 굴복시킨 자카 띵키르는 뗏목의 앞뒤좌우로 40마리 악어들의 호위를 받으며 드막 왕국에 입성했다. 이 사건은 노래로 구전되었는데 지금도 ‘시그라 밀리르(Sigra Milir)’라는 제목으로 남아있다.
드막에 도착한 자카 띵키르는 니 아긍 띵키르의 형제이자 자신의 삼촌인 끼아이 간다무스타카(Kyai Gandamustaka)의 집에 묵었다. 그는 루라 간주르(lurah ganjur)라는 관직을 받아 드막의 이슬람사원을 유지보수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자카 띵키르가 드막 술탄 뜨렝가나의 관심을 끌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드막의 왕궁에는 꽤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자카 띵키르가 연못가에 앉아 있을 때 삼촌이 빨리 비키라고 소리쳤다. 뜨렝가나 술탄이 막 지나갈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못 반대편으로 건너뛰지 않는 한 연못가의 공간이 좁아 사람이 지나가도록 길을 비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무술훈련을 충분히 받았던 마스 까레벳은 간단히 연못 반대편으로 건너 뛰어 술탄이 지나가도록 길을 내주었다. 뜨렝가나 술탄은 그 장면을 가지고 자카 띵키르에게 호감을 갖게 되어 루라 위라탐타마(lurah wiratamtama)라는 관직을 내려 드막의 군대를 통솔하게 했다.
이제 루라 위라땀타마가 된 자카 띵키르는 신병들을 선발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때 벌어진 사건은 뿌장가 시에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거기 오만하고 자기자랑만 늘어놓는 다둥아욱(Dadungawuk)이란 지원자가 있었다. 그런데 무술을 테스트하던 자카 띵키르의 사닥끼낭(Sadak Kinang)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사닥끼낭은 날이 곧은 단검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본말은 이와 사뭇 달랐다고 한다.
술탄 뜨렝가나에겐 쯤빠까(Cempaka)란 이름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하지만 천하의 바람둥이이는 자카 띵키르가 그런 여인은 가만 둘 리 없었다. 그는 은밀히 쯤빠까 공주를 유혹해 관계를 맺었는데 이 부적절한 관계가 들통나면서 드막 왕국에서 추방당하고 만다.
그러다가 술탄 뜨렝가나가 가족들과 함께 빠라워토 산(Gunung Prawoto)에 나들이를 나왔을 때 자카 띵키르가 일을 꾸몄다. 그곳에 끄보 다누(Kebo Danu)라고 이름 붙인 사나운 물소를 한 마리 풀어놓았다. 자카 띵키르가 물소의 귀를 진흙으로 채워 넣어 만사가 불편한 물소가 날뛰기 시작했다. 술탄의 병사들이 휴양소로 뛰어든 물소를 저지하지 못하자 술탄은 자카 띵키르를 불러들여 물소를 잡도록 하라 명했다. 그러자 자카 띵키르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물소를 간단히 도륙했다. 술탄 뜨렝가나는 이 일을 치하해 자카 띵키르를 루라 위라땀타마 직위로 복권시켰다.
빠장왕국의 왕이 되기까지
자바땅의 역사서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자카 띵키르는 대단한 공을 세워 아디빠티 아디위자야(Adipati Adiwijaya)라는 작위를 받고 빠장(Pajang)의 군주로 임명되었다.
1546년 술탄 뜨렝가나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인 수난 쁘라워토(Sunan Prawoto)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했지만 사촌이며 지빵(Jipang)의 군주인 아리야 뻐낭상(Arya Penangsang)에 의해 1549년 살해당했다. 수난 쁘라워토가 아리야 뻐낭상의 아버지인 빵에란 스카르 스다 르뻰(Pangeran Sekar Seda Lepen)이 벙아완 소레(Bengawan Sore)의 강변에서 아샤르 숄랏 기도를 마칠 때 살해한 것에 대해 아리야 뻐낭상이 복수를 한 것이다. 빵에란 스카르는 술탄 뜨렝가나의 친형제였고 수난 꾸두스의 첫 번째 제자이기도 했다.
이 두 건의 살육에 모두 끄리스 끼아야 세딴 꼬바르(Keris Kiai Setan Kober)라는 단검이 사용되었다. 아리야 뻐낭상은 라뚜 깔리냐맛(Ratu Kalinyamat)의 남편이자 즈빠라의 군수였던 빵에란 하디리(Pangeran Hadiri)도 살해했다. 아리야 뻐낭상은 아디위자야, 즉 자카 띵키르마저 죽이려고 빠장에 자객들을 보냈으나 실패했다. 오히려 아디위자야가 자객들을 회유하고 후한 선물까지 줬으므로 아리아 뻐낭상은 이에 굴욕감을 느꼈다.
수난 쁘라워토의 동생이자 즈빠라의 군주가 죽자 그 부인인 라뚜 깔리냐맛은 아디위자야에게 아리야 뻐낭상을 죽여 달라고 요청했다. 오직 아디위자야만이 아리야 뻐낭상의 무술과 도력에 맞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디위자야는 아리야 뻐낭상이 드막 왕가의 일원이며 수난 꾸두스에게서 사사받은 동문이었으므로 직접 손을 쓰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그는 누구든 아리야 빠낭상을 죽이면 빠띠(Pati)와 먼따옥/미티림의 영지를 상으로 주겠다는 연통을 돌려 용사들간에 경쟁을 시켰다. 이 경쟁에 참여한 사람은 끼 아긍 셀라의 손자인 끼 아긍 뻐마나한(Ki Ageng Pemanahan)과 끼 빤자위였다.
전투가 벌어지자 명마 가각 리망(Gagak Rimang )을 타고 벙아완 소레 강을 건너 쇄도하던 아리야 뻐낭상을 끼 아긍 뻐마나한의 매형인 끼 주루 마르타니(Ki Juru Martani)가 세운 전략에 따라 끼 아긍 뻐마나한의 아들인 수타위자야(Sutawijaya-훗날 마타람 왕국의 시조인 스노빠티 대왕이 되는 인물)가 똠박 끼야이 쁠레레드(Tombak Kyai Plered)라는 장창을 휘둘러 죽였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 1549년 왕국의 수도를 빠장으로 옮기고 아디위자야가 빠장 왕국의 첫 왕이 되었다. 아디위자야는 동료들을 각료로 등용했는데 마스 만짜는 빠디 만짜느라가라(Patih Mancanegara)란 칭호를 받고 재상이 되었고 마스 윌라와 끼 우라길은 응아베히(ngabehi)라는 작위를 받고 장관직에 올랐다.
끼 아긍 마타람의 충성의 맹세
아디위자야는 당초 세운 약속대로 끼 빤자위에게 빠티를 봉토로 내리고 끼 아긍 빠티라는 작위를 주었다.
그러나 끼 아긍 뻐마나한은 아디위자야가 마타람을 봉토로 주는 것을 늦추고 있어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1556년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 자리에 수난 깔리자가(Sunan Kalijaga)가 배석했는데 이는 자신의 제자인 두 사람 사이의 중재를 위해서였다.
아디위자야가 마타람 봉토 수여를 늦췄던 것은 마타람에서 빠장 왕국에 필적할 하나의 왕국이 태어날 것이란 수날 쁘라뻰(Sunan Prapen)의 예언에 번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야 뻐낭상이 죽고 그가 왕위에 오를 때 이 예언을 들었던 것이다.
수난 깔리자가는 왕이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므로 약속을 지키라고 아디위자야에게 조언했고, 한편 끼 아긍 빠머나한에게는 빠장왕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끼 아긍 뻐마나한은 아디위자야의 의형이기도 했다. 끼 아긍이 동의하자 아디위자야는 마침내 마타람을 봉토로 내려주었다.
마타람 지역에는 고대왕국 마타람 왕국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알라스 먼타옥(Alas Mentaok)이라는 울창한 숲이 되어 있었다. 끼 아긍 뻐마나한은 끼 주루 마르타니를 비롯한 가족들을 이끌고 숲을 개간해 마타람을 사람사는 곳으로 만들었다.
비록 초라한 마을이었지만 이곳은 자치구가 되었다. 끼 아긍 뻐마나한은 이후 끼 아긍 마타람이란 작위를 받았고 세금과 공물을 보내지 않는 대신 정기적으로 수도에 상경해 빠장왕국에 대한 충성맹세를 해야만 했다.
동부자바 정복
술탄 뜨렝가나가 사망하면서 드막 왕국에 복속되어 있던 지역들이 많이 독립해 떨어져 나갔으므로 아디위자야가 빠장의 왕위에 올랐을 당시 그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중부자바가 고작이었다. 동부자바의 국가들은 수라바야의 군수 빤지 위리야끄라마(Panji Wiryakrama)가 이끄는 아디빠띠 방 웨딴 연합(Persekutuan Adipati Bang Wetan – 웨딴 군주 연합국)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하지만 이 아디빠티 연합은 빠장 왕국뿐 아니라 마두라 왕국, 쁠람방안(Blambangan) 왕국 등 사방으로부터 침공위협을 받고 있었다.
1568년 기라 끄다톤(Giri Kedaton)을 다스리던 수난 쁘라뻰(Sunan Prapen)이 빠장 국왕 아디위자야와 그들이 다스리던 지역의 군주들 사이에 중재자가 되어 회합을 주선했다. 그 결과 그들 간 정치 동맹의 증표로서 빤지 위리야끄라마는 아디위자야의 딸과 결혼해 부마가 되었다. 아디위자야는 마두라도 복속시키고 그 섬의 지배자 라덴 쁘라따누(Raden Pratanu)를 부마로 삼고 빠넘바한 르마 두우르 아로스바야(Panembahan Lemah Duwur Arosbaya)라는 작위를 내려 주었다.
같은 해에 수난 쁘라뻰(Sunan Prepen)은 끼 아긍 뻐마나한을 처음으로 만났고 두 번째 만났을 때 그의 후손에게 빠장 왕국이 굴복할 것이란 예언을 남겼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아디위자야는 어느 정도 체념하면서 더 이상 번민하지 않고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수타위자야의 반란
수타위자야는 끼 아긍 뻐마나한과 의형제를 맺으면서 그의 아들 아디위자야도 수양아들로 삼았다. 1575년 수타위지야는 아버지가 죽자 마타람의 새로운 군주가 되었고 아디위자야는 일년 간 왕을 알현하러 상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다.
하지만 일년이 지난 후에도 수타위자야가 수도에 얼굴을 보이지 않고 약속된 충성맹세도 하지 않자 응아베히 윌라마르타(Ngabehi Wilamarta)와 응아베이 우라길(Ngabehi Wuragil) 두 관료를 보내 마타람의 충성을 확인하려 했다. 그들은 수타위자야의 무례한 행동에서 반란의 기미를 읽었지만 노회한 두 고위관료들은 완곡한 표현으로 보고서의 수위를 조절해 왕의 노여움을 피했다.
그러나 해가 지날수록 마타람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아디위자야는 다시 수타위자야에게 사절을 보내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는데 이번엔 태자인 빵에란 브나와(Pangeran Benawa)와 뚜반(Tuban)의 군주이자 아디위자야의 군주인 아리야 빠말라드(Arya Pamalad), 재상 빠티 만짜느가라(Patih Mancanegara)가 사절을 이끌었다.
수타위자야는 연화를 열어 그들을 환영했다. 하지만 연회가 한창 진행되던 혼잡한 상황에서 수타위자야의 장남 라덴 랑가(Raden Rangga)가 아리야 빠말라드의 사주를 받은 한 뚜반 수행병사를 살해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빠장으로 돌아온 아리야 빠말라드는 수타위자야를 나쁘게 묘사한 보고를 늘어놓았는데 빵에란 브나와는 오히려 그 사건이 그저 사고일 뿐이라며 수타위자야를 변호했다. 아디위자야는 두 가지 보고를 모두 수용하면서 분을 참았다.
스노빠티의 조카인 라덴 빠벨란(Raden Pabelan)이란 사람이 빠장에 살고 있었는데 1582년 아디위자야의 장녀인 라뚜 스까르 끄다톤(Ratu Sekar Kedaton)을 만나려고 왕녀궁에 침입했다가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았고 빠벨란의 아버지인 뚜먼궁 마양(Tumenggung Mayang)은 아들과 공모한 혐의를 받아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라덴 빠벨란의 어머니는 수타위자야의 동생이었는데 당연히 마타람에 도움을 요청했고 수타위자야는 일단의 군사를 보내 스마랑으로 유배길에 올랐던 뚜먼궁 마양을 탈취해 왔다.
아디위자야의 사망
수타위자야의 그런 행동은 결과적으로 아디위자야의 마타람 침공을 불러와 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쁘람바난에 주둔한 빠장군의 병력은 마타람군보다 훨씬 많았음에도 참패를 면치 못했다. 거기에 머라피 화산이 갑자가 분화를 시작해 용암이 산자락의 빠장군 주둔지를 덮쳤다는 소식에 아디위자야는 더욱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아디위자야는 군사를 거둬 철수했는데 빠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난 뜨바얏(Sunan Tembayat)의 무덤을 들르러 했으나 묘지의 문을 열 수 없었다. 그는 이를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전조로 받아들였다. 그의 우려대로 아직 빠장에 닿지도 못한 상태에서 타고가던 코끼리 등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은 그는 들 것 신세를 져야 했다. 빠장에 도착한 후에는 수타위자야의 부한 끼 주루 따만(Ki Juru Taman)의 혼령이 나타가 아디위자야의 가슴을 때렸는데 그 후 그의 용태가 더욱 나빠졌다.
아디위자야는 빠장과 마타람의 전쟁이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던 것이니 수타위자야를 증오하지 말라는 유언을 자녀들에게 남겼다. 수타위자야를 수양아들로 삼았던 아디위자야로서는 수타위자야를 정말 장남처럼 여겼던 측면도 컸다고 평가되며 민간에서는 수타위자야가 사실은 아디위자야의 친자식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자카 띵키르라고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디위자야는 1582년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의 고향인 부뚜 마을(desa Butuh)에 묻혔다.
후계자
아디위자야에겐 많은 자식들이 있었는데 딸들은 수라바야의 빤지 위리야끄라마, 마두라의 라덴 쁘라따누, 뚜반의 아리야 빠말라드와 혼인했고 장녀는 드막 군수 아리야 빵이리(Arya Pangiri)에게 시집보냈다. 아리야 빵이리는 수난 쁘라워토의 아들이었으므로 사실 드막 술탄국의 왕위를 이을 적통이었다.
그는 수난 꾸두스의 후계자인 빠넘바한 꾸두스(Panembahan Kudus)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올랐고 아디위자야 시절 태자였던 빵에란 브나와는 지빵 군수로 봉해져 권좌에서 멀어졌다. 아리야 빵이리는 응아완티뿌라(Ngawantipura)라는 왕좌의 이름으로 빠장의 새로운 국왕이 되었다.
https://id.wikipedia.org/wiki/Adiwijaya_dari_Pajang
'인니 민속과 주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임드 웨폰스 (Named Weapons) (0) | 2022.01.31 |
---|---|
[무속과 괴담 사이(29)] 따밍사리의 끄리스(Kris Taming Sari) (0) | 2022.01.23 |
드막 왕국의 아리야 뻐낭상 (0) | 2022.01.09 |
[무속과 괴담 사이 (28)] 상꾸리앙과 라라 종그랑 (0) | 2022.01.09 |
상꾸리앙 - 존속살해와 근친상간이 판치는 인니 전래동화 (0) | 2022.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