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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꾸리앙 - 존속살해와 근친상간이 판치는 인니 전래동화

beautician 2022. 1. 6. 11:28

인도네시아 전설: 상꾸리앙(Sangkuriang)

 

 

상꾸리앙(Sangkuriang)은 서부자바의 전설로 그 이야기 속에서 반둥호수, 땅꾸반 빠라후 산(Gunung Tangkuban Parahu), 부랑랑산(Gunung Burangrang), 부낏뚱굴 산(Gunung Bukit Tunggul) 등의 생성기원을 들려준다.

 

상꾸리앙의 전설은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15-16세기경 야자잎에 쓰여진 첫 필사본인 부장가 마닉(Bukangga Manik) 판본이 발견되었다. 이 판본에는 자야 빠꾸안 왕자(Pangeran Jaya Pakuan)가 부장가 마닉 왕자(Pangeran Bukangga Manik) 또는 아멩 라야란(Ameng Layaran)라는 이름으로 15세기경 자바와 발리의 힌두 성지들을 방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장가 마닉 왕자가 긴 여행을 마치고 정착한 곳이 지금의 반둥이다. 그는 전설적 장소의 지명을 아래와 같이 기록한 작가이기도 했다.

 

Leumpang aing ka baratkeun (나는 서쪽으로 이동해 가다가)

Datang ka Bukit Patenggeng (따뜽겡 산(Gunung Patenggeng)에 다다랗지)

Sakakala Sang Kuriang (상꾸리앙의 전설이 깃든 곳)

Masa dek nyitu Ci tarum (찌따룸(Citarum) 강을 머금은 곳)

Burung tembey kasiangan (시간을 대지 못해 실패해 버린 곳)

 

 

상꾸리앙 전설의 개요는 이렇다.

 

신들의 세계에서 한 쌍의 신과 여신이 죄를 지어 최고신 상향뚱갈(Sang Hyang Tunggal)의 저주를 받아 짐승의 모습이 되어 인간세상에 떨어졌다. 여신은 쩰렝 와융향(Celeng Wayung Hyang-또는 와융양)이라는 이름의 멧돼지가 되었고 신은 뚜망(Tumang)이란 이름의 개가 되었다. 그들은 그런 모습으로 이 세상에 살면서 벌을 받으며 용서를 빌어야만 언젠가 신과 여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때는 바야흐로 숭깅 뻐르방카라 왕(Raja Sungging Perbangkara)이 사냥을 하던 중이었다. 왕은 소변을 보러 숲 속에 들어갔는데 소변이 정글토란 잎에 고였다. 또 다른 버전에서는 속이 빈 야자열매 안에 소변을 보았다고도 한다. 목마른 멧돼지 와융향이 그 오줌을 먹었는데 불가사의하게도 임신을 학 예쁜 인간 여아를 낳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와융향에게 아직도 남아 있던 예전 신성의 일부가 작동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아기를 숲속에서 발견한 왕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 궁전으로 데려가 다양숨비(Dayang Sumbi)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공주로 삼았다. 라라사티(Rarasati)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름다운 여인으로 피어난 다양숨비에게 많은 왕과 왕자들이 청혼을 해왔지만 그 어느 것도 수락하지 않았다. 그녀를 차지하려는 왕들로 인해 왕국들 사이에 전쟁까지 벌어졌다. 다양숨비는 자신이 이 모든 재난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해 궁전을 떠나 산속에 잠적하는데 개 한 마리가 그녀에게 다가와 이후 늘 곁을 지켰다. 벌을 받고 있는 신, 뚜망이었다.

 

산속에 만든 작은 집에 베틀을 만들어 천을 짜다가 또락(torak-북)을 발 밑으로 떨어뜨렸는데 비탈을 타고 산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북 없이는 천을 짤 수 없었으므로 다양숨비는 크게 낙담하면서 누구라도 북을 찾아 준다면, 그가 남자라면 그의 아내가 되고 여자라면 자매가 되겠다고 맹세했다. 그런데 그 북을 찾아 다양숨비에게 가져다준 것은 개 뚜망이었다. 뚜망은 수컷이었다. 다양숨비는 신들에게 뱉은 맹세를 깨는 것이 두려워 뚜망과 혼인하고 남편으로 삼았다.

 

북(torak)  

 

이를 알게 된 궁전에서는 이를 부끄러운 일이라 여겨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다양숨비를 숲 속에 유배했고 오직 뚜망만이 충직하게 그녀의 곁을 지켰다. 보름달이 뜬 어느 날 뚜망은 원래의 잘 생긴 신의 모습으로 변해 다양숨비 앞에 나타났다. 다양숨비는 이를 꿈이라 여겼지만 그렇게 하룻밤을 보낸 후 임신한 다양숨비는 아들을 낳고 이름을 상꾸리앙(Sangkuriang)이라 지었다. 상꾸리앙은 잘 생긴 소년으로 커갔고 보통사람의 몇 배나 되는 힘을 발휘했다.

 

다양숨비는 어느날 사슴의 간이 먹고 싶어져 상꾸리앙에게 뚜망과 함께 숲에 들어가 사냥을 해오라고 시켰다. 하지만 숲에서는 짐승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살찐 멧돼지 한 마리가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그 멧돼지는 상꾸리앙의 할머니인 와융향이었다. 와융향을 알고 있던 뚜망은 멧돼지를 사냥하라는 상꾸리앙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상꾸리앙은 뚜망에게 화를 내며 마치 활로 쏘기라도 할 것처럼 뚜망을 겨냥하며 혼을 내다가 본의 아니게 실수로 시위를 떠난 활이 뚜망을 꿰뚫었고 뚜망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상꾸리앙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원하는 사슴 간을 얻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결국 그는 뚜망의 배를 갈라 간을 꺼내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그것이 뚜망의 간인 줄 꿈에도 모르던 다양숨비는 상꾸리앙 요리해 온 그 간을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남편인 뚜망의 간이란 것을 알게 된 다양숨비는 격노해 이성을 잃어 야자열매로 만든 국자를 휘둘러 상꾸리앙의 머리에 큰 상처를 냈다. 신의 딸인 다양숨비 역시 보통 사람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던 것이 폭발한 것이다.

 

고통과 두려움에 질린 상꾸리앙은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하지만 잠시 후 이성을 되찾은 다양숨비가 아들에게 상처를 입힌 것을 크게 후회하며 숲 속으로 상꾸리앙을 찾아 나섰다. 숲을 헤매며 아들에게 돌아오라고 외쳤으나 상꾸리앙은 이미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리 가버린 후였다. 좌절한 다양숨비는 최고신 상향뚱갈에게 아들과의 재회를 빌었고 그 기원을 담보하기 위해 다양숨비는 풀과 날 채소만을 먹으며 고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상꾸리앙은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상꾸리앙은 세상에서 많은 선생들을 만나 도술을 배웠고 몇 년 지나지 않아 강하고 술법에도 능하며 카리즈마 넘치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끝없이 동쪽으로 향하던 상꾸리앙은 어느날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양숨비가 살고 있는 땅에 도착했다. 상꾸리앙은 다양숨비를 알아보지 못했다. 많은 해가 지났지만 풀과 날 채소만 먹으며 고행해 오던 다양숨비는 전혀 늙지 않고 오히려 왕국들 간에 전쟁까지 일으키게 했던 처녀 시절 절세미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양숨비 역시 건장한 청년이 자기 아들이란 걸 알아보지 못하고 서로 사랑에 빠졌다.

 

어느 날 자기에게 등을 기댄 상꾸리앙의 머리를 빗겨주던 다양숨비는 상꾸리앙의 머리에서 오래 전 자신이 국자를 휘둘러 냈던 상처를 발견하고 그가 자신의 아들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상꾸리앙은 그것을 알고 난 후에도 청혼을 강행했고 다양숨비는 이를 거절했으나 상꾸리앙은 끝내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다양숨비는 상꾸리앙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청혼의 조건으로 걸었다. 하룻밤 사이 찌타룸 강을 막아 호수를 만들고 그 위에 띄울 배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상꾸리앙은 흔쾌히 그 조건에 응했다. 그는 동쪽에서 거대한 나무를 잘라와 배를 만들었다. 그 나무를 자른 그루터기가 오늘날 부낏 뚱굴(Bukit Tunggul)이라는 산이 되었다고 하며 거기서 자라난 가지가 서쪽으로 뻗어가 부랑랑산(Gunung Burangrang)이 되었다. 밤새 귀신과 마물들이 그를 도와 다양숨비가 요구한 것들 대부분을 마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본 다양숨비는 상꾸리앙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상향뚱갈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그녀는 자신이 짠 한 폭의 새하얀 천을 동쪽 산꼭대기에 휘날리게 해 마치 새벽이 밝아오려고 햇살이 비쳐 나오는 것처럼 보이게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열심히 절구에 공이질을 해 마치 아침밥을 하려고 쌓을 찧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상꾸리앙을 돕던 모든 구리앙(guriang)들은 날이 밝아오는 것으로 착각해 급히 땅 속으로 스며들었고 그 바람에 물막이 댐을 짓는 일을 끝마치지 못했다.

 

 

다양숨비의 조건을 채우지 못한 상꾸리앙은 좌절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이미 다 만들어 놓은 배를 발로 걷어찼는데 북쪽으로 날아가 엎어져버린 그 배가 오늘날 땅꾸반빠라후 산(Gunung Tangkuban Perahu)이 되었다. 그는 거의 다 만들어진 댐의 서쪽을 무너뜨렸는데 그렇게 생긴 동굴과 계곡으로 쏟아진 물이 오늘날 상향 띠꼬로(Sanghyang Tikoro)가 되었고 찌타룸 강을 막았던 물막을 동쪽으로 집어던진 것이 오늘날 망라양 산(Gunung Manglayang)이 되었다. 결국 그 지역에 가득 찼던 물이 모두 빠져나갔는데 오늘날 반둥 시가 그 자리에 들어서 있다.

 

상꾸리앙은 이성을 되찾지 못한 채 다양숨비를 뒤쫒았고 다양숨비는 계속 도망쳐야 했다. 그러다가 뿌뜨리 산 인근에서 거의 상꾸리앙에게 잡히게 된 다양숨비가 다시 상향뚱갈에게 기원하자 다양숨비가 한 송이 작시 꽃(bunga jaksi)으로 변해버렸다. 깊은 좌절에 빠진 상꾸리앙은 우중 버룽(Ujung Berung)이라는 곳에 이르러 영들의 세계 응아히양(ngahiyang)에 들어서며 이 세상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다.

 

작시 꽃(bunga jaksi)  

 

상꾸리앙이 댐과 배를 짓는데 부린 귀신들은 구리앙이라 불렀는데 결국 상꾸리앙은 사람 이름이라기보다는 3인칭 존칭 상(sang)에 귀신이란 뜻의 구리앙(guriang)을 연결한 것으로 ‘귀신들을 부리는 자’ 또는 무당, 두꾼의 의미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구리앙  

 

상꾸리앙을 돕던 구리앙들이 다양숨비의 꾀에 속아 일을 마치지 못하고 땅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모습은 반둥본도워소 왕자가 보꼬왕국의 공주의 마음을 얻으려고 밤새 귀신들의 도움으로 천 개의 탑을 쌓다가 공주의 꾀에 속은 귀신들이 새벽이 온 줄 알고 도망쳐 마지막 천 개 째 탑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라라 종그랑의 전설을 떠올리게 한다.

 

아름다운 여인과 그녀를 차지하려는 영웅, 불가능한 미션. 그걸 가능케 하는 도술과 동원된 귀신들, 그 귀신들을 속이는 여인의 속임수,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상꾸리앙의 전설과 라라 종그랑의 전설은 이런 패턴을 일정 부분 공유한다.

 

상꾸리앙의 전설은 사실 아이들에게 들려줄 전래 동화로서는 존속살해와 근친상간 등 19금 콘텐츠를 너무 많이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린이’란 개념이 없던 옛날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주 일반적이었던 것 같다. (끝)

 

상향 띠꼬로(Sanghyang Tikoro): 띠꼬로는 '목구멍'이란 뜻

 

부낏 뚱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