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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임드 웨폰스 (Named Weapons)

beautician 2022. 1. 31. 10:29

[무속과 괴담 사이(30)] 네임드 웨폰스 (Named Weapons)

본 초안은 이 글을 다듬으며 기존에 역사적 전후관계가 정리된 문단들을, 글의 속도감과 가독성을 살리기 위해  삭제하기 전 참고용으로 보관함.

 

지난 회에 소개했던 무기 따밍사리(Taming Sari)와 뿌룽사리(Purung Sari)의 끄리스처럼 특별히 이름이 붙은 무기들이 꽤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더왕의 검 엑스카리버나 관운장의 청룡언월도가 그런 류의 무기들이고 2차 세계대전 배경으로 멤피스벨(Memphis Belle)이라 이름붙어 24차례나 출격한 B-17 기종 연합군 전폭기도 말하자면 이런 네임드 웨폰(Named Weapon)에 속합니다.

 

영화 <멤피스벨> 포스터  

 

한국에도 명검들의 전설이 있습니다. 김유신이 도술을 닦다가 별의 정기를 담은 검을 얻어 바위를 잘랐다는 사인검(사인참사검), 도검불침 용의 후손 우왕을 벨 때 이성계가 사용했다는 전어도, 이순신의 쌍룡검,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까마귀털로 만든 오우관을 쓰고서 하늘에서 내려올 때 차고 있었다는 용광검 같은 것들이죠. 실존했던 것들도 있지만 전설로 치부되는 것들 도 있습니다.

 

명검들이나 이름난 무기들은 주로 영웅들의 손에 들려 있는데 역시 영웅들은 춘추전국시대 같은 전란의 시대에 많이 태어납니다. 인도네시아에는 근대까지도 통일왕국이라 할 만한 국가가 없었으니 그런 시대가 각지에서 여러 번 있었을 텐데 그중 자바섬의 14~16세기가 그런 시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200년간 크게 번성했던 마자빠힛 왕국이 14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슬람 세력에 밀려 발리로 쫓겨나고 오늘날 족자 술탄국, 수라카르타(솔로) 수난국의 모체인 마타람 왕국이 16세기 말에 세워지기 직전 중부자바에서 피고 지며 힘을 겨루던 드막(Demak) 왕국, 빠장(Pajang) 왕국의 시대에도 많은 영웅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손에 들렸던 신령한 무기들을 잠시 들여다봅니다.

 

조코 띵키르(Joko Tingkir)

 

 

조코 띵키르는 빠장 왕국을 세우고 1549~1582년 기간 중 재위한 술탄 하디위자야(Sultan Hadiwijaya)의 청년 시절 이름입니다. 그는 달(Dal)의 해(자바력에서 8년마다 돌아오는 해)의 주마딜라키르(Jumadilakhir-6월) 18일에 새벽녘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끼 끄보 끄낭아(Ki Kebo Kenanga)는 끼 아긍 뼹깅(Pengging Ki Ageng Pengging)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뺑깅’이란 이름은 보꼬(Boko)왕국을 멸망시키고 그곳 라라 종그랑 공주를 위해 하룻밤새 천 개의 사원을 세우려 했던, 그래서 오늘날 족자 지역에 쁘람바난 사원(Candi Prambanan)과 세우 사원(Candi Sewu)을 남긴 반둥 본도워소 왕자의 출신 왕국명이었음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뺑깅은 오늘날 중부자바 보요랄리(Boyolali) 지역의 옛 지명입니다. 그러니 끼 아긍 뺑깅이란 이름은 ‘뺑깅의 영주’란 의미일 것이고 반둥 왕자의 후손임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가 와양 베베르 그림자극 공연을 열면 끼 아긍 띵키르(Ki Ageng Tingkir)가 달랑(dalang)을 맡곤 했습니다. 끼 아긍 뼹깅과 끼 아긍 띵키르는 둘 다 쉨 시티 즈나르(Syekh Siti Jenar)의 제자로 서로 절친한 사이였죠. 띵끼르(Tingkir)는 지금의 살라띠가(Salatiga) 지역이니 끼 아긍 띵키르도 ‘띵키르의 영주’라는 칭호인 셈입니다. 와양 베베르(wayang beber)는 힌두의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에서 가져온 이야기들을 근간을 이루는 그림자극 공연이고 달랑은 그림자인형을 다루며 서사를 읊는 변사입니다. ‘마스 까레벳’(Mas Karèbèt)이란 이름은 그 와양극에 나오는 ‘끄머브렛(kemebret)이란 대사에서 따온 것이라는데 정말 그렇다면 아버지가 그 명성에 비해 너무 유쾌하거나 좀 생각 없는 사람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마스 까레벳이 10살이 되던 해 수난 꾸두스가 아버지 끼 아긍 뼁깅을 드막 왕국에 대한 반역 혐의로 처형하자 어머니 냐이 아긍 뼁깅(Nyai Ageng Pengging)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끼 아긍 띵키르도 이미 세상을 떠 그의 미망인 냐이 이긍 띵키르(Nyai Ageng Tingkir)가 고아가 된 마스 까레벳을 데려다 친아들처럼 키웠습니다. 마스 까레벳이 조코 띵키르라 불리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죠. 그들은 드막 왕국에 허리를 굽히고 있었지만 마음 속 깊은 복수심이 불타고 있었음은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조코 띵키르는 거기서 무술과 도술을 익히며 성장했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두각을 보였는데 여색을 심하게 밝히는 기질이어서 요즘 같으면 패가망신할 각이었지만 당시엔 큰 흉이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동서양 불문하고 영웅호색이란 말을 아직 공공연히 자랑스러워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의 스승 끼 아긍 셀라(Ki Ageng Sela)에겐 끼 주루 마르타니(Ki Juru Martani), 끼 아긍 뻐마나한(Ki Ageng Pemanahan), 끼 빤자위(Ki Panjawi)라는 세 형제가 있어 조코 띵키르는 그들과 친형제처럼 지냈습니다.

 

그는 이후 아버지의 큰 형 끼 아긍 반유비루(Ki Ageng Banyubiru)에게도 사사받았는데 당시의 수학동문 마스 만짜(Mas Manca), 마스 윌라(Mas Wila), 끼 우라길(Ki Wuragil) 등도 훗날 모두 빠장 왕국의 요직을 맡는 인물로 성장하게 됩니다.

  

드막 왕국에 복종

조코 띵키르는 동문들인 마스 만짜, 마스 윌라, 끼 우라길과 함께 뗏목을 타고 드막 왕국의 도성으로 향하는 긴 여정에 올랐습니다. 스렝엥게 강 깊은 곳에서는 악어떼의 공격을 받지만 조코 띵키르는 악어떼를 굴복시키고 악어들 40마리로 뗏목의 앞뒤좌우를 호위하게 하며 도성에 입성합니다. 이 장면은 ‘시그라 밀리르(Sigra Milir)’라는 제목의 노래로 지금까지 구전되고 있습니다.

 

드막에 도착한 조코 띵키르는 냐이 아긍 띵키르의 형제이자 자신의 삼촌인 끼아이 간다무스타카(Kyai Gandamustaka)의 집에 묵었습니다. 그는 루라 간주르(lurah ganjur)라는 관직을 받아 왕궁 안의 이슬람사원을 유지, 보수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엔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조코 띵키르가 넋 놓고 연못가에 앉아 있을 때 술탄 뜨렝가나(Sultan Trenggana)가 그곳을 지나려 해 간다무스타카 삼촌이 조코 띵키르에게 급히 비키라고 외쳤습니다. 술탄의 길을 막는다는 것은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운 불경죄입니다. 게다가 조코 띵키르가 있던 곳은 폭이 왕의 행렬이 지나가기에도 좁아 사람이 비켜설 공간이 없었고 연못 반대편으로 건너뛰기엔 거리가 너무 넓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일무삭티(Ilmu Sakti)를 익혀 두술에 가까운 경지에 올라 있던 조코 띵키르는 간단히 연못 반대편으로 날 듯 건너 뛰어 술탄 행렬에게 길을 내주었습니다. 그 장면을 본 술탄 뜨렝가나는 조코 띵키르에게 호감을 느끼고 이후 루라 위라탐타마(lurah wiratamtama)라는 관직을 내려 드막 군대의 높은 자리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술탄 뜨렝가나에겐 쯤빠까(Cempaka)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얘기한 것처럼 조코 띵키르는 아름다운 여인을 가만이 둘 리 없는 천하의 바람둥이였죠. 예상했던 대로 그는 은밀히 쯤빠까 공주를 유혹해 관계를 맺었다가 그 사실이 들통나면서 왕의 노여움을 사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조코 띵키르는 집념과 끈기의 사나이였습니다. 어느 날 술탄 뜨렝가나가 가족들과 함께 쁘라워토 산(Gunung Prawoto)에 나들이를 나왔을 때 조코 띵키르는 끄보 다누(Kebo Danu)라는 이름의 크고 사나운 물소의 귀에 진흙을 잔뜩 채워 넣고서 왕이 쉬고 있는 곳에 풀어놓았습니다. 만사가 불편한 물소가 미친 듯 날뛰면서 왕의 호위병들을 들이받기 시작했죠. 술탄 일행이 곤경에 빠진 순간 조코 띵키르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물소를 간단히 도륙했습니다. 술탄 뜨렝가나는 이게 다 조코 띵키르가 꾸민 일이란 것을 꿈에도 모른 채 그를 치하하며 다시 왕궁으로 불러들여 루라 위라땀타마 직위로 복권시켯고 쯤빠까 공주와 결혼시켜 부마로 삼기까지 했습니다.

 

아리야 뻐낭상 (Arya Penangsang)

 

 

조코 띵키르는 이후 많은 공을 세워 아디빠티 하디위자야(Adipati Adiwijaya)라는 작위를 받고 빠장(Pajang)의 영주가 되었습니다. 아디빠티(Adipati)란 뚜먼궁(Tumenggung)과 마찬가지로 영지를 가진 고위귀족을 뜻하는 칭호입니다.

 

1546년 술탄 뜨렝가나가 세상을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수난 쁘라워토(Sunan Prawoto)가 사촌이자 지빵(Jipang)의 영주 아리야 뻐낭상(Arya Penangsang)에게 1549년 살해당합니다. 수난 쁘라워토가 벙아완 소레(Bengawan Sore) 강변에서 아샤르(Ashar) 숄랏 기도를 마치던 아리야 뻐낭상의 아버지인 빵에란 스카르 스다 르뻰(Pangeran Sekar Seda Lepen)를 살해한 것에 대해 아리야 뻐낭상이 복수를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드막 왕국의 족보를 잠깐 들여다봐야 합니다.

 

아리야 뻐낭상(Arya Penangsang)은 16세기 중반 지빵(Jipang)지역의 고위 귀족(Adipati)으로 아리야 지빵(Arya Jipang) 또는 지빵깡(Ji Pang Kang )이라고도 불린 인물입니다. 1505년 라셈(Lasem)에서 수로위요토 왕자(Pangeran Surowiyoto)의 장남으로 태어났죠. 수로위요토 왕자에겐 라덴 끼낀(Raden Kikin), 또는 스카르 스다 르뻰 왕자(Pangeran Sekar Seda Lepen)라는 이름도 있었습니다.

 

아라야 뻐낭상은 자바땅의 역사서(Babad Tanah Jawi)에서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잔인한 인물로 묘사되지만 수난 꾸두스(Sunan Kudus)의 총애를 받은 제자였고 진실 수호의 화신과도 같은 인물이었다고도 전해집니다. 하지만 수난 꾸두스가 끼 아긍 뼁깅을 처형했으니 그 아들 조코 띵끼르와는 처음부터 악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아리아 뻐낭상의 어머니 뿌뜨리 아유 렛노 빵궁(Putri Ayu Retno Panggung)은 지빵(Jipang)의 영주 라뚜 아유 렛노 꾸몰로(Ratu Ayu Retno Kumolo)의 딸이자 마자빠힛 왕국의 군주 브라위자야 5세의 손녀였습니다. 그런 대단한 족보를 가진 아리야 뻐낭상은 할머니의 뒤를 이어 아디빠티의 작위를 받고 지빵의 영주가 됩니다.

 

드막 왕국 족보  

 

라덴 빠따의 장남 빠띠 우누스는 1521년 말라카에서 포르투갈인들을 공격하다가 전사해 왕권 경쟁은 수로위요토 왕자와 뜨렝가나 사이의 각축전으로 좁혀집니다. 뜨렝가나의 아들 라덴 묵민(Raden Mukmin)은 나중에 예의 수난 쁘라워토라고 불리게 되는 인물인데 자신의 아버지가 왕좌를 차지할 수 있도록 금요일 낯 기도를 마치고 처소로 돌아가던 수로위요토 왕자를 라셈의 한 강변에서 끼아이 세딴 꼬베르(Kyai Setan Kober)란 이름의 끄리스 단검으로 살해합니다. 말하자면 아버지 이성계를 위해 정적들을 척살한 이방원 역할을 한 것이죠. 그렇게 살해된 수로위요토 왕자는 ‘강물 속에 스러진 꽃잎’이란 의미인 ‘스까르 스다 잉 르뻰 왕자’(Pangeran Sekar Seda ing Lepen)라는 위 족보 상의 이름으로 후세에 알려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술탄 뜨렝가나가 1521년 드막 왕국의 왕위에 올랐으나 형인 빠띠 우누스의 유지를 받들어 포르투갈을 공격하다가 1546년 시뚜본도(Situbondo)의 빠나루깐(Panarukan)에서 세상을 떠나자 라덴 묵민이 드막 왕국의 네 번째 왕이 됩니다. 그가 수난 쁘라워토라고 불리게 된 것은 수도를 쁘라워토로 옮겼기 때문인데 1546~1549년 드막 왕국도 드막 쁘라워토(Demak Prawoto)라고도 불립니다.

 

끄리스 세딴 꼬베르 단검과 똠박 끼아이 쁠레레드 창

하지만 수난 쁘라워토의 치세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1549년 아리야 뻐낭상이 랑꿋(Rangkud)이란 자객에게 그 한맺힌 끼아이 세딴 꼬베르 끄리스 단검을 들려 보내 수난 쁘라워토를 죽이고 자신이 드막 왕국의 다섯 번째 술탄으로 등극한 것입니다. 그는 왕국의 수도를 자신의 원래 영지인 지빵으로 옮겼으므로 1549-1554년 시기의 드막 왕국은 드막 지빵이라 불렸습니다.

 

딱 보기에도 찔리면 죽을 것 같은 끄리스 세딴 꼬베르 단검  

 

결국 아리야 뻐낭상의 아버지 수로위요토 왕자와 그를 죽인 수난 쁘라워토, 두 사람 모두 끄리스 끼아야 세딴 꼬베르(Keris Kiai Setan Kober)라는 단검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단검의 이름인 끼아이 세딴 꼬베르는 울라마나 샤먼의 경칭인 끼아이(Kiai), 악령을 뜻하는 세딴(Setan), 무덤을 뜻하는 꼬베르(Kober)의 조합입니다. 즉 저 단검에 ‘무덤 속 악령 도사’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이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리야 뻐낭상이 살해한 사람들 중엔 즈빠라의 영주 빵에란 하디리(Pangeran Hadiri)도 있었는데 그는 족보에서 보는 것처럼 수난 쁘라워토의 누이 라뚜 깔리냐맛(Ratu Kalinyamat)의 남편이었습니다. 아리야 뻐낭상은 조코 띵키르마저 죽이려고 빠장에 자객들을 보냈으나 조코 띵키르가 자객들을 회유, 전향시켜 후한 선물까지 내리면서 오히려 아리야 뻐낭상에게 굴욕감을 선사했습니다.

 

하지만 조코 띵키르는 아리야 뻐낭상에게 직접 손을 쓰는 것을 꺼렸습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아리야 뻐낭상이 드막 왕가의 일원이라는 이유를 들었지만 실제로는 그가 수난 꾸두스의 직전 제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난 꾸두스는 지금도 인도네시아 이슬람 전파에 크게 기여한 아홉 명의 포교자 왈리 송오(Wali Songo)의 한 명으로 추앙받는 성인과도 같은 인물이었으므로 아리야 뻐낭상을 직접 건드린다면 알라의 저주를 받을 거라 믿었던 것이죠.

 

어느 날 조코 띵키르(Jaka Tingkir)가 라뚜 깔리냐맛이 혼자 살고 있던 하들리린(Hadlirin) 지역의 다나라자 산(Gunung Danaraja)을 들르자 라뚜 깔리냐맛은 남편의 원수인 아리야 뻐낭상을 죽이면 드막과 즈빠라를 모두 조코 띵키르에게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조코 띵키르만이 무술과 도력에서 아리야 뻐낭상을 상대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라뚜 깔리냐맛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던 조코 띵키르는 아리야 빠낭상을 죽이면 빠띠(Pati)와 먼따옥(Mentaok)/마타람(Mataram)의 영지를 상으로 주겠다는 연통을 돌렸습니다. 다른 사람의 손으로 아리야 뻐낭상을 치려 한 것이죠. 이에 응한 사람들 중에는 끼 아긍 셀라의 손자인 끼 아긍 뻐마나한(Ki Ageng Pemanahan)과 끼 빤자위가 있었습니다.

 

빠장 군대가 지빵의 꼬타라자(Kotaraja – 도성)에 쳐들어 간 것은 아리아 뻐낭상이 40일간의 금식을 막 마치던 때였습니다. 그는 조코 띵키르가 도전장을 보내온 방식에 더욱 격분했습니다. 빠마나한과 뻔자위가 아리야 뻐낭상의 마구간지기를 납치해 귀를 자른 후 그의 손에 도전장을 들려 보냈던 것입니다. 동생 아리야 마타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분을 참지 못한 아리야 뻐낭상은 가각 리망(Gagak Rimang)이라는 명마를 타고 전장 한복판으로 내달렸습니다. 그는 빠장 군대를 휘몰아 격파하고 도주하는 적을 쫓아 벙아완 소레(Bengawan Sore) 강을 건너 쇄도하다가 빠장 군대의 장수 수타위자야와 격돌합니다. 수타위자야는 끼 아긍 뻐마나한의 아들로 훗날 마타람 술탄국의 시조가 되는 스노빠티입니다. 당시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한 그는 아버지의 창 똠박 끼아이 쁠레레드(Tombak Kiai Plered)를 휘두르며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상상하지도 못한 장면이 벌어집니다. 그가 휘두른 창에 아리야 뻐낭상의 배가 찢겨 나간 것입니다.

 

가히 치명적인 부상이었지만 삭티 도술을 익힌 아리야 뻐낭상은 흘러내린 창자를 쓸어 모아 자신의 허리에 찬 끄리스 단검의 손잡이에 칭칭 감고서 더욱 무섭게 상대를 공격해 마침내 수타위자야를 궁지에 몰아붙였습니다. 이제 그는 예의 끼아이 세딴 꼬베르 끄리스 단검으로 수타위자야의 목을 찌르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단검 손잡이에 자기 창자를 칭칭 감아 놓았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깜빡 잊고 말았습니다. 그가 수타위자야의 숨을 끊으려고 끄리스 단검을 세차게 뽑아드는 순간 거기 감긴 창자가 끊어지면서 아리야 뻐낭상은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습니다.

 

 

아리야 뻐낭상의 배를 찢는 수타위자야(왼쪽), 끄리스를 뽑다가 절명하는 아리야 뻐낭상(오른쪽)  

 

이 전투에서 지빵의 재상 끼 마타훈(Ki Matahun)도 전사했고 오직 아리아 뻐낭상의 동생 아리야 마타람과 그의 아내만이 멀리 빨렘방으로 도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리야 뻐낭상을 무찌른 조코 띵키르는 1549년 왕국의 수도를 빠장으로 옮기고 왕위에 올랐고 이 시점부터 드망 왕국은 빠장 왕국이라 불리게 됩니다. 조코 띵키르는 자신의 왕명을 하디위자야(Hadiwijaya)라고 짓고 빠장 왕국의 첫 번째 왕이 되죠.

 

아리야 뻐낭상과의 결투에서 수타위자야가 휘두른 장창의 정식 이름은 똠박 깐젱 끼아이 쁠레레드(Tombak Kanjeng Kiai Plered)는 마타람 왕국의 유물로 남아 족자 술탄국에서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쁠레레드(Plered)는 중부자바 찔라짭(Cilacap) 가까이에 위치한 지역 이름이었지만 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이 창의 이름을 따, 마타람의 후신인 까르타수라 수난국(Kesunan Kartasura)가 몇 차례 옮겼던 끄라똔(Kraton) 중에도 끄라똔 쁠레레드라 이름붙은 곳도 있었습니다.

 

사실 16세기에 사용되었던 이러한 무기들은 말라카 왕국 항뚜아 제독의 따밍사리와 꾸룽사리의 끄리스가 그런 것처럼 역사의 어느 시점에 유실되어 사라져버린 것이 대부분이지만 지금도 끼아이 세딴 꼬베르나 똠박 끼아이 쁠레레드라고 주장하는 끄리스 단검을 온-오프라인에서 두꾼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구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 담긴 도력은 아리야 뻐낭상이나 수타위자야가 휘둘렀던 원래의 물건들과는 비교할 바 되지 못할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