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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과 괴담 사이(29)] 따밍사리의 끄리스(Kris Taming Sari)

beautician 2022. 1. 23. 12:05

따밍사리의 끄리스(Kris Taming Sari)

 

 

인도네시아 끄리스와 로마제국 보병의 검  

 

끄리스(Kris/Keris)는 인도네시아 9세기 문헌부터 등장하는데 최소 그보다 이전인 7-8세기에 개발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양쪽에 날이 있는 검, 대체로 팔뚝보다 조금 긴 정도의 길이로 로마제국 보병들이 사용한 검과 비견할 만합니다. 하지만 연약해 보이는 손잡이와 상대적으로 얇고 구불구불한 검신(劍身)은 찌르기엔 적합하지만 휘두르거나 막기엔 별로 힘을 제대로 받지 않을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정말 전투용으로 사용되는 무기인지 좀 의심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역사상 왕과 황제들이 전장에 나서는 장군들에게 이기고 돌아오라며 명검을 하사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잘 생각해 보면 사실 왕궁이 특별히 명검들을 양산하는 곳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지극히 상징적 의미에서 전투용보다는 사실상 관상용에 가까운 보석이 마구 박힌 아름다운 검을 하사해 군신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행사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마치 우리 대통령이 장군 진급자들에게 장검을 하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말 전쟁에 이길 비장의 무기를 하사하는 것이었다면 하다못해 K-16 기관총이나 대전차 로켓포 같은 걸 줬겠죠.

 

대통령이 준장 진급자에게 ‘삼정검(三精劍)’을 하사하는 모습

 

하지만 끄리스는 실제로 사용되던 무기이고 역사에도 수없이 등장하며 최근엔 어떤지 모르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가방 속이나 차량 의자 밑에 끄리스를 가지고 다니는 운전기사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걸 유사시에 꺼내 들어 호신용으로 휘두르기보다는 끄리스에 깃든 주술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란 믿음이 큰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시대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劍)이나 켈트족 아더왕의 엑스칼리버처럼 끄리스도 주술을 담는 용도로 쓰이니까요.

 

자바인들의 끄리스 소지법  

 

끄리스 단검에 깃드는 주술은 주로 일무삭티(Ilmu Sakti)라 부르는 도술에 가까운 무술, 대체로 그 하위개념으로 분류되는, 신체를 도검불침의 금강불괴로 만들어주는 일무끄발(Ilmu Kebal) 같은 것입니다. 물론 그냥 원귀들이 들러붙은 끄리스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끄리스와 관련한 전설이나 야사는 꽤 많이 발견되는데 훗날 마타람 술탄국의 시조가 되는 스노빠티, 즉 수타위자야(Sutawijaya)가 빠장 왕국(Kesultanan Pajang)의 조코 띵키르(Joko Tingkir), 즉 술탄 하디위자야(Hadiwijaya) 편에 서서 나선 첫 전투에서 주술이 담긴 끄리스를 차고 있던 드막 왕국(Kesultanan Demak)의 반란영웅 아리야 뻐낭상(Arya Penangsang)이 창에 배가 찢겨 쏟아져 나온 창자를 그 끄리스 손잡이에 칭칭 감아 놓고 싸웠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오늘은 인도네시아 역사에 등장하는 15세기 말라카 멀라유 술탄국(Kesultanan Melayu Melaka) 시대의 수군제독 항뚜아(Hang Tuah)가 손에 넣게 되는 두 개의 끄리스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항뚜아는 우리 이순신 장군보다 대략 100년쯤 앞선 시대의 인물입니다.

 

항뚜아의 부모 항마흐무드(Hang Mah­mud)와 당머르두(Dang Merdu)는 오늘날 리아우 제도의 유명 휴양지인 빈딴섬(Pulau Bintan)에 자리를 잡고 살았습니다. 물론 당시의 빈딴섬은 오늘날 같이 아름다운 휴양지가 아니라 척박한 오지일 뿐이었어요.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항뚜아는 10살쯤 되었을 때 또래 친구들인 항저밧(Hang Jebat), 항르끼우(Hang Lekiu), 항까스뚜리(Hang Kasturi), 항르끼르(Hang Lekir) 등 네 명의 친구들과 함께 남중국해 항해에 나섰습니다. 항뚜아와 친구들은 자주 출몰하는 해적들을 용맹스럽게 물리쳤는데 그 소식이 빈딴의 재상 빠두카(Bendahara Pa­duka) 귀에도 들아갔습니다. 재상은 그들의 용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죠.

 

어느 날 항뚜아와 네 친구가 공교롭게도 폭도들로부터 그 재상을 구해내는 사건이 있었는데 재상은 더욱 그들의 기량과 용맹에 감탄하며 모두 수양아들로 삼고 샤 알람 국왕(Baginda Raja Syah Alam)에게도 소개했습니다. 국왕 역시 그들의 영웅적 행동에 감명받아 마찬가지로 모두 수양아들로 삼았죠. 항뚜아 일행은 그렇게 일약 왕국의 중심부에 진입하게 됩니다.

 

따밍사리의 끄리스

몇 년 후 국왕은 새로운 수도 터를 찾고자 항뚜아와 그 친구들을 포함한 왕국의 장군들을 거느리고 말라카 해협과 싱가포르 해협 일대를 뒤지다가 르당 섬(Pu­lau Ledang)에서 한 마리의 흰 사슴을 발견했습니다. 숲에서 흰 사슴을 만나면 그곳에 나라를 세우라는 선인들의 말씀을 기억한 국왕은 그곳에 말라카 술탄국을 세우고 스스로 술탄 무자파르 샤(Sultan Muzafar Shah)라는 칭호를 붙였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술탄은 인드라뿌라 왕국(Kerajaan Indrapura)의 스리 버누아(Seri Benua) 재상의 아름다운 외동딸 뚠 테자(Tun Teja)에게 청혼을 넣었다가 거절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패기 넘치는 술판은 그 한번의 실패에 뻘쭘해하지 않고 이번엔 눈을 더 높여 자바 땅 대부분을 다스리고 있던 마자빠힛 왕국 스리 버따라(Seri Betara) 국왕의 외동딸 라덴 갈루 마스 아유(Raden Galuh Mas Ayu)에게 청혼을 넣었습니다.

 

이 청혼을 위해 항뚜아와 네 친구들 그리고 다른 장군들로 구성된 사절단이 먼저 마자빠힛에 가 진기한 공물들을 전달하며 술탄의 환영을 받았고 청혼도 수락받았습니다. 말라카 국왕도 싱글벙글 웃으며 뒤따라 도착해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마자빠힛 왕궁이 계속된 연회로 흥청망청하고 있을 때 따밍사리라는 용사가 목소리를 높이며 결혼에 이의를 제기했흡니다. 청혼의 의도가 불순하지 않냐며 따져 물은 것입니다. 따밍사리(Taming Sari)는 ‘꽃으로 만든 방패’, ‘아름다운 방패’, ‘주 방어벽’이란 의미의 말레이어인 만큼 그 용사의 본명이 아니라 국왕이 하사한 작위였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 호칭에 어울릴 만큼 멋있고 강한 남성이었겠죠.

 

그의 도발로 분위기가 험악해졌지만 마자빠힛 왕궁 쪽에서는 따밍사리의 눈치를 보며 감히 그를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마타람 국왕의 명예와 다음날 있을 결혼식을 지키기 위해 항뚜아가 나서 따밍사리와 결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결투는 일견 호각을 이루는 듯했지만 항뚜아가 조금 더 기량이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결투 중 항뚜아가 몇 차례나 따밍사리의 몸을 끄리스 단검으로 찔렀으나 전혀 상처를 내지 못했습니다. 따밍사리에게 금강불괴의 주술이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항뚜아는 그 방검주술이 따밍사리가 휘두르고 있는 끄리스 단검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장시간 치열하게 싸우던 중 자신을 찌르려던 따밍사리의 단검을 살짝 피하자 끄리스는 벽에 박혀 버렸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항뚜아가 따밍사리를 쳐내며 끄리스를 빼앗았습니다.

 

항뚜아는 이제 비무장이 된 따밍사리에게 자신의 끄리스를 따밍사리에게 던져 주고 다시 결투를 재개했습니다. 몇 차례 합이 오간 후 마침내 항뚜아가 주술이 담긴 끄리스로 따밍사리의 심장을 찌르자 그는 더 이상 회복하지 못하고 곧바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힘겨운 승리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졸이며 결투를 지켜본 마자빠힛의 국왕은 이제 주인을 잃은 그 끄리스를 승리한 항뚜아에게 전리품으로 하사했고 말라카의 국왕과 마자빠힛의 라덴 갈루 마스 아유 공주의 결혼식은 다음날 성대하게 거행되었습니다.

 

따밍사리의 끄리스라고 이름 붙인 유물들이 동부 자바를 중심으로 인도네시아 전국에 넘쳐납니다.  

 

절친 항저밧과의 생사결

국왕은 왕후가 된 새 왕비와 함께 사절단의 호위를 받으며 말라카 왕국으로 돌아갔고 왕국은 이후 몇 년간 안전하고 평화로웠습니다. 항뚜아는 수군제독으로서 왕국에 충성을 다했지만 신료들과 대중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가 치솟자 왕궁 안에는 그를 시기하는 세력들의 모함이 시작되었습니다. 평소 항뚜아를 대적하던 꺼르마 위자야 대신(Patih Kerma Wijaya) 측이 항뚜아가 국왕의 후궁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입니다. 그들은 술탄의 질투심이 불 같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영웅들의 이야기엔 반드시 귀가 얇고 비열한 국왕이 등장하곤 하죠. 항뚜아가 평생 충성을 다했던 술탄 무자파르 샤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격노한 국왕은 빠두카 재상에게 항뚜아를 유배시키라 명했는데 항뚜아의 무고함을 잘 알고 있던 재상이 왕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 먼저 인드라뿌라 왕국으로 도망가라고 항뚜아에게 권했습니다.

 

그렇게 도망친 인드라뿌라에서 항뚜아는 일전에 말라카 국왕이 청혼했던 뚠 테자의 유모 당 랏나(Dang Ratna)라는 여인과 인연이 닿아 그녀의 수양아들이 되었고 당 랏나를 통해 항뚜아를 소개받은 뚠 테자는 그에게 호감을 갖고 이후 가까운 관계로 발전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말라카에서 배 한 척이 인드라뿌라에 도착했습니다. 그 배를 타고 온 뚠 랏나 디라자(Tun Ratna Diraja)와 뚠 비자 수라(Tun Bija Sura)는 항뚜아에게 말라카로 돌아올 것을 종용했습니다. 국왕이 항뚜아를 추방하라 했던 결정을 후회하며 다시 불러들이라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항뚜아는 귀국길에 올랐는데 뚠 테자와 당 랏나도 그 여정을 함께 했습니다. 말라카에서 여생을 함께 하려던 것이었죠. 하지만 인간의 미래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라카에 도착해 국왕을 알현한 항뚜아는 왕국에 대한 충성을 새삼 다시 다짐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오해가 풀리고 모두 행복한 삶을 살며 막을 내렸어야 마땅한 이 이야기는 항뚜아를 따라온 뚠 테자가 운명의 변덕에 휘말려 결국 국왕의 두 번째 왕비가 되면서 또 다른 변곡점을 맞게 됩니다. 그 복잡한 사랑과 치정의 이야기를 이 지면에 다 기록할 수 없지만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국왕의 손을 잡은 뚠 테자의 아픈 마음을 뒤로 한 채 항뚜아는 다시 한번 왕국과 국왕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것을 마음을 다잡으며 말라카의 수군제독 임무에 충실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기뢰가 촘촘히 깔린 좁은 수로를 거대한 배로 진행해 가는 것과 다름 아니었습니다. 기뢰가 터지는 건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죠.

 

그에 대한 모함이 또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항뚜아와 왕비 뚠 테자와 밀회를 즐긴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시기심에 눈이 뒤집힌 국왕은 이번엔 아예 항뚜아를 처형하라고 명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를 보호하려 한 재상은 항뚜아의 처형명령을 거두고 이를 경감해 말라카 북부로 유배하는 것으로 해줄 것을 간청했으나 국왕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재상은 기지를 발휘해 항뚜아를 북부 오지로 빼돌리고는 그를 처형한 것처럼 꾸몄습니다. 그렇게 또 다시 말라카에서 쫓겨난 그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죠.

 

말라카를 탈출하기 전, 항뚜아는 예전 마자빠힛 왕국의 국왕으로부터 받은 금강불괴의 주술이 담긴 따밍사리의 끄리스 단검을 재상에게 맡기며 국왕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국왕을 위시한 말라카의 관료들은 그것을 유품이라 보고 항뚜아 처형의 증거라 생각했습니다. 국왕은 항뚜아의 절친 항저밧을 말라카 수군제독으로 임명하고 따밍사리의 끄리스를 그에게 하사했습니다.

 

그런데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항저밧은 오만에 빠져 권력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대신들과 후궁들에게 오만방자하게 행동했고 충고와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항저밧의 불손함은 결국 왕국에 대한 반역으로 이어졌습니다. 격분한 국왕이 그를 치려 했지만 항저밧을 당하지 못했습니다. 항저밧은 따밍사리를 굴복시킨 항뚜아에 못지 않은 기량과 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제 따밍사리의 끄리스까지 가진 그는 가히 무적이었고 그를 이길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항저밧의 반역으로 왕국의 기틀이 뿌리부터 흔들리자 국왕은 그제서야 항뚜아를 처형한 자신의 경솔함을 크게 후회했습니다. 그러자 재상이 사실 항뚜아를 살려 북부지역으로 유배 보냈다고 왕에게 진실을 속삭였죠. 반색한 왕은 즉시 사람을 보내 항뚜아를 불렀고 항뚜아는 지체하지 않고 말라카로 돌아왔습니다.

 

국왕은 항저밧과 맞서 싸우러 나가는 항두아에게 뿌룽사리(Purung Sari)라는 이름의 끄리스를 하사했습니다. 뿌룽사리 역시 대단한 도력과 주술을 담은 끄리스였지만 따밍사리에 비할 바 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도네시아에서는 뿌룽사리 또는 빠룽사리(Parungsari)라는 이름을 단 끄리스들이, 소장가의 선거 승리를 보장한다거나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이야기와 함께 골동품 상에서 온-오프라인으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지자체장 당선에 효험 있다는 뿌룽사리, 또는 빠룽사리 끄리스 단검

 

아무튼 그리하여 오랜 절친이던 항뚜아와 항저밧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항뚜아는 따밍사리에게 그리했듯 항저밧의 손에서 따밍사리의 끄리스를 빼앗아 그 단검으로 절친의 가슴을 찔렀고 항저밧은 항뚜아에게 안겨 숨을 거뒀습니다.

 

그런데 항뚜아의 전기나 항저밧의 죽음에 대해서도 다양한 버전들이 구전되고 있고 그 중엔 이런 전개도 있습니다.

 

항저밧은 사실 가장 친한 친구를 경솔한 국왕이 부당하게 처형했다고 생각하며 복수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는데 수군제독으로 임명된 것은 복수를 할 절호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는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항뚜아가 돌아오기 전까지 항저밧은 파죽지세로 국왕의 군대를 궤멸시켰습니다. 그러다가 사면을 받은 돌아온 항뚜아를 만나 그간의 사정을 알게 되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국왕이 경솔한 사람이란 사실은 여전히 변함없었고 자신은 이미 반역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둘은 서로 존경하며 아끼는 절친이었지만 이제 생사를 건 싸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7일간 밤낮으로 격돌하고서도 결판을 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항뚜아가 당시 항저밧이 가지고 있던 따밍사리의 끄리스를 빠앗아 그를 찔렀지만 따밍사리보다 더 높은 도력을 가지고 있던 항저밧을 바로 죽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상처를 붕대로 감은 힝저밧은 사흘간 도성에서 날뛰며 수천 명의 왕국 군사들을 죽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런 후 마침내 항뚜아와의 마지막 결전에서 다시 한번 따밍사리의 끄리스에 꿰뚫리며 결국 항뚜아의 팔에 안겨 눈을 감습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후자의 버전에 힘을 싣는 것 같습니다. 전자의 내용대로라면 항저밧은 초심을 잃은 반역자에 불과하지만 후자의 경우엔 우정을 위해, 절친의 복수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국왕에게 반기를 든 정의로운 인물이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2021년 6월부터 인도네시아 일반국민대상 코로나-19 백신접종 드라이브가 시작되던 당시 많은 우리 교민들이 사전 예약하고 접종하러 갔다가 외국인이란 이유로 거절당해 돌아서야 했던 남부 자카르타의 한 보건소도 ‘BBKB Hang Jebat’이란 이름을 달고 있었습니다. 그 인근인 빠꾸부워노 거리(Jl. Pakubuwono) 가까이엔 항뚜아 거리와 항저밧 거리가 맞닿아 있고요. 항저밧을 역사의 반역자라고 판단했다면 정부산하기관이나 도로명에 그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항뚜아는 다시 말라카의 수군제독으로 복귀했고 왕국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항뚜아의 팔에서 눈을 감는 항저밧  

 

포르투갈 해군과 맞붙은 말라카 해전

항뚜아 제독은 항저밧이 죽은 후에도 주다(Judah)와 룸(Rum) 등으로 해외원정을 자주 나가 말라카 왕국의 영향력을 넓혔습니다. 항뚜아가 이끄는 사절 선단이 인도의 비자야 나가람 왕국(Kerajaan Bijaya Naga­ram)까지 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항뚜아의 선단은 중국까지 항해했는데 중국의 한 항구에서 포르투갈 선박들과 충돌이 생겼습니다. 오만한 포르푸갈인들이 항뚜아 사절단의 선박을 포르투갈 선박 옆에 정박하도록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장에서의 충돌은 일단락되었지만 포르투갈 측은 앙심을 품었습니다. 항뚜아가 중국의 황제를 만난 후 말라카로 돌아오던 길에 매복해 있다가 공격해온 것입니다. 하지만 항뚜아는 선단을 기민하게 지휘해 포르투갈 함선들을 격퇴했고 오히려 큰 피해를 입게 된 포르투갈 배 중엔 총독부가 있는 필리핀 마닐라로 도주한 선박도 있었습니다.

 

항뚜아가 귀국한 후, 어느날 말라카 국왕은 항뚜아 제독, 빠두카 라자 재상과 함께 선단을 이끌고 가족들과 함께 근해를 돌며 경관을 즐기다가 싱가포르 해협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탄 배 가까이에 금빛 비늘에 다이아몬드 같은 눈을 가진 물고기가 접근하는 것을 정신없이 내려다보다가 급기야 왕관을 바닷물 속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이를 본 항뚜아가 따밍사리의 끄리스를 쥔 채 지체없이 물 속에 뛰어들어 바다 밑으로 가라앉던 왕관을 건져내 수면 위로 올라 국왕의 배로 헤엄쳐 갔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나타난 흰 악어의 공격을 받아 싸우는 과정에서 왕관과 따밍사리의 끄리스는 모두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악어를 해치운 후 그 일대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왕관과 끄리스는 결국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국왕과 항뚜아는 모두 눈에 띄게 활력을 잃었고 자주 병을 앓았습니다. 바다 속에 가라앉은 따밍사리의 끄리스와 국왕의 왕관이 그들의 생명을 이루는 무언가를 바다 밑바닥으로 함께 가져가버린 것입니다.

 

한편 항뚜아에게 해전에서 패하고 도망쳐온 장교들의 보고에 격분한 마닐라의 포르투갈 총독은 수 개월 후 전투 함대를 말라카 해협으로 출동시켰습니다. 그렇게 침공해온 포르투갈군을 맞아 수많은 말라카 군인들의 목숨이 스러지는 동안 공교롭게도 항뚜아는 중병에 걸려 요양하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국왕의 부름을 받은 항뚜아는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무얼 더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까? 저들을 당장 쫓아내겠습니다.” 항뚜아는 아직 건강이 돌아오지 않았으나 이렇게 말하며 곧바로 전선으로 나갔습니다.

 

항뚜아는 전장에서 모든 기량과 결단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포격전과 백병전으로 포르투갈 군대에 맞서다가 포르투갈 군의 총탄에 맞아 7미터를 날아가 바닷물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곧 구조되었지만 더 이상 전투지휘를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한편 말라카 해전에서 서로 큰 타격을 주고받은 말라카 수군과 포르투갈 해군은 모두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고 승패를 정하지 못한 채 각각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항뚜아도 중상을 입은 몸으로 말라카로 돌아왔습니다.

 

말년과 죽음

항뚜아는 부상에서 회복했지만 수군제독으로 복귀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나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라카의 주가라 언덕(Bikit Jugara)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국왕도 더 이상 왕위를 지키지 못하고 딸 뿌뜨리 구눙 레당(Putri Gunung Ledang)에게 왕좌를 물려주었습니다. 그들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습니다.

 

항뚜아의 말년에 대해서도 여러 버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말년에 술탄 뿌뜨리 구눙 레당과 결혼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받습니다. 하지만 처녀의 눈물 일곱 항아리, 모기 일곱 항아리를 채우라는 조건이 따라붙었습니다. 그건 결코 완수할 수 없는 조건이었죠. 국왕은 평생 항뚜아를 몇 번씩이나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붙였는데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불가능한 조건임을 깨달은 그는 자신이 왕을 실망시켰다며 일전에 항저밧과 싸우러 갈 당시 왕이 하사했던 뿌룽사리 끄리스를 꺼내 강에 던졌습니다. 강바닥으로 들어간 끄리스가 다시 떠오르면 왕궁으로 돌아가겠면서요. 하지만 그럴 리 없는 일이었죠. 그는 그런 식으로 결혼명령을 거절했습니다. 그의 평생 처음으로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의 최후에 대해 일각에서는 그가 홀연히 공기 속으로 사라져버렸다고도 하며 다른 일각에서는 그가 말라카의 딴중끌링(Tanjung Kling)에 묻혔다고도 합니다. 또 다른 버전에서는 결국 국왕과 또 다시 갈등을 겪고 완전히 돌아선 그가 말라카를 떠나 빨렘방에 가서 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왼쪽은 말레이시아 멀라카(Melaka)에 있는 항뚜아 묘소, 오른쪽은 항뚜아의 것으로알려진 빨렘방의 묘소  

 

항뚜아가 세상을 떠난 후 오랜 세월이 지나 근대와 현대로 들어선 후에도 그가 활약했던 말라카 해협은 아직도 이따금 해적들이 출몰하는 위험한 해역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깔리만탄 북동부 해상에서도 필리핀 반군들이 운용하는 해적들이 준동한다는 뉴스가 눈에 띄곤 합니다.

 

말라카 해협 어딘가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따밍사리의 끄리스와 주가라 언덕을 흐르는 강 속에 빠뜨린 뿌룽사리 끄리스가 과연 아직도 그곳에서 누군가 자신을 찾아줄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 날이 오면 항뚜아 같은 영웅이 다시 이 지역에 태어나 해적들은 물론 남중국해 영유권을 주장하며 동남아 국가들과 막무가내 국경분쟁을 일으키는 중국 해군과 선단들을 단번에 몰아낼 수 있을까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