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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막 왕국의 아리야 뻐낭상 본문
아리야 뻐낭상 (Arya Panangsang)
아리야 뻐낭상(Arya Penangsang)은 16세기 중반 지빵(Jipang)지역의 고위 귀족(Adipati)로 아리야 지빵(Arya Jipang) 또는 지빵깡(Ji Pang Kang )이라고도 불렸다.
아리야 뻐낭상에 대한 이야기는 19세기에 자바어로 쓰여진 자바땅의 역사서(Babad Tanah Jawi)나 드막 연대기 (Babad Demak) 등 공식 역사서에도 등장한다. 자바땅의 역사서에서 아리야 뻐낭상은 쉽게 화를 내고 부주의하며 잔인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는 수난 꾸두스(Sunan Kudus)의 총애를 받은 제자였고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진실을 수호하는 데에 일절 타협이 없었다고도 전해진다.
족보
전승과 연대기에 따르면 아리야 뻐낭상은 1505년 라셈(Lasem)에서 수로위요토 왕자(Pangeran Surowiyoto)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수로위요토 왕자는 라덴 끼낀(Raden Kikin)이라고 불렸고 드막 빈또로(Demak Bintoro)의 왕 라덴 빠따(Raden Patah)의 아들 스까르 스도 르뻰 왕자(Pangeran Sekar Sedo Lepen putra)라고도 알려진 인물이다.
라덴 끼낀의 어머니는 수난 암뻴(Sunan Ampel)의 손녀이자 라셈의 이디빠티(군주) P. 위로느고로 라자(P. Wironegoro Raja)가 수난 암뻴인 라덴 라흐맛(Raden Rahmat)의 딸 니 아긍 말로카(Nyi Ageng Malokha)의 딸이었다.
아리아 뻐낭상의 어머니는 뿌뜨리 아유 렛노 빵궁(Putri Ayu Retno Panggung)으로 지빵(Jipang)의 군주 라뚜 아유 렛노 꾸몰로(Ratu Ayu Retno Kumolo)의 딸이자 마자빠힛 왕국의 군주 브라위자야 5세의 손녀였다. 아리야 뻐낭상은 할머니의 뒤를 이어 지빵의 군주 아디빠티가 된다.
역사적 기술
라덴 빠따의 장녀와 혼인한 빠띠 우누스(Pati Unus – 포르투갈인들은 그를 Pate Unus 또는 사브랑 로르 왕자(Pangeran Sabrang Lor)라고도 부름)는 즈빠라(Jepara)의 군주 모하마드 유누스(Mohammad Yunus)의 아들 라덴 빠따의 장남이었는데 1521년 말라카에서 포르투갈인들을 공격하다가 전사했다.
그러자 빠띠 우누스의 동생 뜨렝가나(Trenggana)가 왕위를 놓고 라덴 파타(Raden Fatah)의 아들 라덴 끼낀과 싸웠다. 라덴 끼낀에게는 라덴 아리야 뻐낭상과 라덴 아리야 마따람이란 두 아들이 있었고 뜨렝가나에게는 수난 쁘라워토(Sunan Prawoto)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라덴 묵민이란 아들이 있었다. 묵민은 금요일 낯 기도를 마치고 돌아간던 라덴 끼낀을 라셈의 한 강변에서 끼아이 세딴 꼬베르(Kyai Setan Kober)란 이름의 끄리스 단검으로 살해하고 드막의 세 번째 술탄이 된다. 살해된 라덴 끼낀은 ‘강물 속에 스러진 꽃잎’이란 의미인 ‘스까르 스다 잉 르뻰 왕자’(Pangeran Sekar Seda ing Lepen)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된다.
라덴 끼낀이 죽자 아리야 뻐낭상이 16세의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빵의 군주가 되었고 재상 맛아훈(Patih Mat Ahun)이 그를 보좌했다. 그가 즉위한지 4년째 되던 1525년 아리야 뻐낭상은 20세가 되었다.
한편 뜨렝가나가 1521년 드막 왕국의 왕위에 올랐으나 빠띠 우누스의 유지를 받들어 포르투갈을 공격하다가 1546년 시뚜본도의 빠나루깐(Panarukan,)에서 세상을 떠나자 라덴 묵민이 네 번째 왕이 된다. 그가 수난 쁘라워토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수도를 쁘라워토로 옮겼기 때문이고 드막 왕국도 이 시기인 1546~1549년 다시 드막 쁘라워토(Demak Prawoto)라고도 불렸다.
1549년 아리야 뻐낭상은 마침내 수난 쁘라워토에게 랑꿋(Rangkud)이란 자객에게 그 한맺힌 끼아이 세딴 꼬베르 끄리스 단검을 들려 보내 복수를 꾀한다. 자객 랑꿋은 수난 쁘라워토와 동귀어진 하고 아리야 뻐낭상은 드막 왕국의 다섯 번째 술탄이 된 후 왕국의 수도를 지빵으로 옮기니 1549-1554년 시기의 드막왕국은 드막 지빵이라 불렀다.
동화 속 기술
‘자바땅의 역사서’에 따르면 빠장(Pajang)의 아디빠티였던 자카 띵키르(Jaka Tingkir)가 외유를 마치고 빠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난 쁘라워토와 하들리린(Hadlirin)의 남편이 죽은 후 라뚜 깔리냐맛(Ratu Kalinyamat)이 혼자 살고 있던 다나라자 산(Gunung Danaraja)을 들렀다. 라뚜 깔리냐맛은 자신이 수난 쁘라워토의 왕위계승자라고 주장하던 아리야 뻐낭상을 죽여주면 드막과 즈빠라를 자카 띵키르에게 주겠다고 꼬드겼다.
하지만 자카 띵키르는 자신이 드막 왕가의 사위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아리야 뻐낭상과 전쟁을 벌이는 것을 꺼렸다. 그러자 라뚜는 아리야 뻐낭상을 죽이는 자에게 빠띠와 알라스 먼따옥(Alas Mentaok)의 땅을 주겠다는 공개 살인청부를 냈다. 알라스 떤따옥은 훗날 마타람 왕국의 영토가 되는 곳이다. 자카 띵키르의 양부모인 끼 아긍 뻐마나한(Ki Ageng Pemanahan)과 절친 끼 빤자위(Ki Panjawi)는 끼 주루 마르타니(Ki Juru Martani )의 안내를 받아 그 청부에 응해 이름을 올렸다. 끼아긍 뻐마나한의아들 수타위자야(Sutawijaya)도 청부에 응해 자카 띵키르의 창 끼아이 쁠레레드(Kyai Plered)를 들었다.
그리하여 빠장의 군대가 지빵의 꼬타라자(Kotaraja – 도성)에 쳐들어 간 것은 아리아 뻐낭상이 40일간의 금식을 막 마치던 때였다. 하디위자야(자카 띵키르)의 이름이 찍힌 도전장에 그는 격분했다. 더욱이 그 도전장을 가지고 온 사람은 그의 마구간지기로 빠마나한과 뻔자위에게 귀를 잘린 상태였다. 동생인 아리야 마타람이 말렸지만 분을 참지 못한 아리야 뻐낭상은 가각 리망(Gagak Rimang)이라는 이름의 애마를 타고 전장 한복판으로 내달렸다. 가각 리망을 탄 아리야 뻐낭상은 암컷 종마를 타고 강을 건너 뛰는 수타위자야를 추격했다. 이윽고 벙아완 소레(Bengawan Sore) 인근에서 빠장과 지빵의 군대가 맞붙었다. 이 전투의 혼전 속에서 아리야 뻐낭상의 배가 수타위자야가 휘두른 끼아이 쁠레레드 창에 찢겨나갔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지만 삭티 도술을 익힌 아리야 뻐낭상은 흘러내린 창자를 자신의 허리에 찬 끄리스 단검의 손잡이에 칭칭 감고서 전투를 계속했다. 그는 마침내 수타위자야를 구석으로 모는 데에 성공해 이제 그의 목을 베려고 세딴 꼬베르 끄리스 단검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거기 자신의 창자를 감아 놓았다는 것을 깜빡 잊은 아리야 뻐낭상이 단검을 세차게 꺼내면서 거기 감긴 창자가 끊어지며 아리야 뻐낭상은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지방의 재상 끼 마타훈(Ki Matahun)도 전사했고 오직 아리야 마타람과 그의 아내만이 멀리 빨렘방으로 도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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