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부자들은 어릴 때부터 취미를 제한하자 본문
취미
인도네시아에서 26년 넘게 살면서 거의 대부분을 끌라빠가딩이라는 자카르타 북부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동네인 뿔로마스(Pulo Mas)라는, 지금은 다 쓰러져가는 슬럼이 되어가고 있지만 옛 고급 주택가였던 그곳엔 빠쭈안 쿠다(Pacuan Kuda)라는 경마장이 있었습니다. 사실상 그곳에서 말경주를 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몇년 전까지도 말을 키우고 있었는데 한때 3홀 짜리 골연습장으로 변신했다가 아마도 그 동네 사람들 구매력에는 어림도 없었는지 그나마도 잘 안돌아가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인도네시아에 경마장이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그걸 즐기는 생활수준 높은 사람들이 경마장 객석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다는 사실에요.
자카르타에서 보고르로 가는 길엔 써킷 센툴(Circuit Sentul)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자동차 경기가 벌어지는 곳이죠. 경기장에 직접 들어가 보진 않았지만 그 주변 도로에서 가끔 마주치는 경기용 자동차들은 종이장처럼 얇은 경주차들이 아니라 일반차량에 엔진을 바꾸고 이런저런 개조를 한 것들이었으므로 아마도 그런 차들이 달리는 곳이 아닌가 했습니다. 그런 걸 즐기는 사람들이 경기장 객석을 가득 채웠을 것을 생각하며 사실은 인도네시아에 부자들이 한국 인구보다 많은 거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22년 6월에는 자카르타에서 포뮬러 E 전기차 경주대회가 열립니다. 원래 2020년에 유치하기로 한 것인데 코로나로 2년 연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서킷 센툴 경기장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카르타 최중심에 있는 국가기념탑 모나스(Monas) 공원 일대를 도는 것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일반도로로 사용되는 곳들을 나중에 경기가 임박하면 길을 막고 좀더 손을 봐서 경기트랙으로 쓴다는 것입니다.
그걸 위해서 그 역사적으로도 유서깊은 곳엔 일부 고풍스러운 보도블럭들 위로 아스팔트가 덧대어진 곳들이 보입니다.
인도네시아가 코로나와 싸우며 예산부족으로 허덕이던 와중에도 자카르타 주정부는 이 대회 유치와 개최를 위해 공사비와 수수료 등으로 벌써 한화 782억원 정도를 지출했다고 합니다. 팬데믹 와중에도 그 정도니 한국이나 인도네시아나 건설업체 같은 사업가들이 시청이나 지방관청에 빌붙어 먹고 사는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한 프로젝트에 저 정도 금액을 주저 없이 퍼넣는데 그런 프로젝트를 한 주시사/군수/시장 임기 중에 수 백 개를 할 테니까요.
문제는 경마나 자동차 경주가 나한테 다른 나라 이야기로 들리는 것처럼 인도네시아 대다수 서민들에겐 다른 세계 이야기일 뿐이란 겁니다. 물론 이번 전기차 경주가 열리는 곳은 터진 공간이니 인근에 살거나 지나는 자카르타 시민들이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옛날 골프나 사냥이 그랬듯 경마, 자동차 경주는 대체로 부자들을 위한 스포츠입니다.
그것을 추진하는 사람들도 부자들이고요.
어쩌면 아니스 바스웨단 자카르타 주지사에겐 자동차 경주가 꿈과 동경을 심어준 문화였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사는 세상에서는요.
코로나로 생계가 끊긴 사람들이 시내 한복판에 '하나님, 배가 고파요!" (Tunan! Aku Lapar!)라는 대형 벽화와 낙서를 써놓고서 경찰들에게 쫓겨 다니는 와중에 거대한 경제효과를 들먹이며 자카르타 한복판 중앙통에 길을 막고 자동차 경기장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 엘리트 정치인들을 보면서 부자들은 어릴 때부터 취미를 좀 제한해야 한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습니다.
2021.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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