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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Steak 21의 위용

beautician 2021. 8. 23. 11:07

스테이크 먹기

 

ROTC 소위 임관하기 직전인 1986년 2월 한화그룹에 막 입사했을 때, 당시 아직 한화 계열사였던 경인에너지 연수원에서 신입사원 교육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교육 그 자체보다 맛있고 정갈한 연수원 음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때 회덥밥을 처음 먹어보고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나 싶었습니다.

 

군시절 군사분계선 가까이 GOP 안에 있던 우리 부대에서 1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캠프 그리브스'라는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거기 장교클럽에 자주 가면서 당시 한국 수퍼에서는 구할 수 없던 버드와이저, 미켈럽 같은 맥주들을 먹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간혹 이런저런 특식이 나올 때도 있었는데 어느날 피가 줄줄 흐르는 미디엄-레어 쿡의 스테이크가 그렇게 입안에서 살살 녹는 음식이란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 스테이크는 그 전, 그 후 한국 경양식집에선 죽어도 맛볼 수 없는 음식이었는데 인도네시아에 와서 자카르타 시내 수디르만 거리 체이스 플라자(Chase Plaza)라는 건물 꼭대기 층에 있던 앙구스(Angus) 식당에서 그런 맛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질이 스테이크는 대략 150불 정도 내야 맛볼 수 있는, 도저히 내 돈 내고는 먹기 힘든 음식이란 것도 알았습니다.참고로 앙구스는 지금도 소고기 등 육류수입으로 가장 유명한 현지 회시입니다.

 

그후 자카르타도 많이 발전해 길거리에서 나름 오리지널 비슷한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고 Abuba라는 스테이크 집은 이제 인니 서민-중산층 들에게도 한화 5천원-1만원 정도면 로컬 또는 뉴질랜드 소고기로 요리한 써로인 스테이크를 제공합니다.

 

몰에도 따마니(Tamani) 같은 카페에서 괜찮은 스테이크를 주문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엔 '스테이크 21'이란 곳도 나름 오리지널  스테이크가 나온다는 걸 알고 애들을 마루타로 데려갔습니다. 델타변이가 창궐하기 직전, 대체로 코로나 팬데믹 소강상태였던 지난 5월, 1년 넘게 집안에서만 지냈던 아이들을 오랜만에 데리고 나온 겁니다.

 

 

 

다행히도 그곳은 꼭 일인당 150불씩 내지 않아도 20불 안쪽으로 아이들을 한껏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곳이었어요. 스테이크로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고요. 단지 미디엄-레어의 세계를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들은 이번에도 웰던을 시켰습니다..

 

그럴 때마다 불러주는 노래가 있습니다.

 

깜뿡깜뿡안~ 깜뿡깜뿡안~ (Kampung-kampungan, Kampung-kampungan~) 

스빠뚜꾸 끄끄찔라~안 (Sepatu ku kekecilan~)

 

촌스러, 촌스러라, 

아이고 신발이 작아졌네~

 

뭐 이런 뜻인데 한국민요와 트로트를 대충 섞은 듯한 가락에 맞춰 구수하게 불러주면 애들이 놀리지 말라고 핀잔을 주죠. 애들 처음 만나서 지금까지 한 500번은 불러줬던 곡입니다. 

 

사실 이런 곳에 데리고 다니는 건 나처럼 20대 초반이 되어서야 처음 회덮밥을 먹어보는 촌놈이 되지 말라는 취지죠. 그래서 가능하면 애들이 평생 못먹어 보았을 만한 음식이 나오는 식당들을 돌아다닙니다. 물론 아이들은 한국식당을 가장 좋아하지만요.

 

 

2021. 8.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