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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백신 1차 접종 후기 본문

매일의 삶

코로나 백신 1차 접종 후기

beautician 2021. 6. 14. 13:22

 

잘 준비된 접종현장, 그러나 비리가 짐작되는 움직임

6월 9일(수) 아침 아스트라제네카 코로나백신 접종이 진행되고 있던 Jl. Hang Jebat의 BBPK(의료 연수원 플라자) 스스로 등록요원(실제론 안내요원이겠지)이라 자칭하는 사람들이 입구에서 접수대 사이에 잔뜩 서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선 안되는 것도 없지만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그나마 체계적으로 돌아갈 것 같은 코로나 백신접종도 대략 그 범주를 넘지 못한다는 확신이 드는 아침이었습니다.

60세 이상 백신접종이 진행될 때 외국인들도 나이 조건만 충족시키면 백신을 맞았고 중국산 시노백 백신은 1-2차 접종 간격이 짧아 지금은 2차 접종까지 마친 어르신들도 적지 않습니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접종후기가 많이 올라 왔어요. 그러다가 5월 중순을 지나면서 50-59세 접종신청도 시작되고 18세 이상도 접종신청하라는 공지가 6월 8일부터 뜨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백신 접종신청하려 관련 웹사이트를 다녔지만 대부분 Sold out 상태였는데 6월 초에 다시 공지가 떠서 어찌어찌 신청이 가능했습니다. 접수가 되니 인니 보건부 공식 Whatsapp계정에서 접수확인 문자가 날아오고 아마 신청 웹사이트 관리를 대행하는 걸로 보이는 loket.com으로부터도 이메일로 접수증이 도착했습니다. 이제 해당 날자에 맞으러 가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6월 9일 아침 9시반 쯤에 시내 여러 접종장소 중 jl. Hang Jebat에 있는  BBPK (의료연수원 같은 곳)에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구부터 붐비는 게 시장통 같았지만 좁은 길에 접종 받으러 온 사람들 차량이 즐비하고 안쪽에선 접수가 한창이었습니다. 우린 접수증들은 물론 Nik 번호(주민등록번호랑 비슷한 개인식별번호)가 찍힌 SKTT(주거지등록증)라는 외국인 전용서류도 들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외국인이시군요? 외국인은 60세 이하는 백신접종을 받을 수 없습니다."
"네?"

등록신청할 때 그런 말 없었고 아무런 사전공지도, 현장에 관련 안내문도 없는데 그걸 가방에서 꺼내드는 걸 본 '등록직원'이란 사람들이 길을 막아선 겁니다. 그들은 건물 입구에서 10미터 쯤 안쪽에 설치된 접수대 사이에 기도처럼 여럿 서 있었습니다. 빤히 눈앞에 보이는 곳을 안내하려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서 있는 이유는 안내가 아니라 다른 목적 같았습니다.

"아니, 등록 다하고 접수증도 받았는데 왜 안되는 겁니까? 관련 공지도 보지 못했는데?"
"저 안쪽에서 결정한 일이에요. 아무튼 당신은 안됩니다. 60세 이하 외국인들은 접종 안돼요."

 

사진 왼쪽 밑에 인상쓰고 있는 렌디라는 친구가 결국 나를 저 천막 안 접수장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내 인생이 그렇지. 하지만 아무리 평탄치 않은 인생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디테일이 살아 있을 필요 없는데 이번에도 아무 문제 없어야 할 부분에서 어김없이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접수확인증이나 거기까지 온 노력들이 모두 개무시당한 겁니다. 난 절차를 따랐으니 중간에 변경사항을 만든 당국의 잘못이라고 목소리 높여 따질 수 있겠지만 경험상 그래봐야 아무 소용 없을 게 뻔합니다. 

바로 전날 자카르타에 6월말에 유효기간 만료되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40만회분을 빨리 처분해야 한다는 기사가 나온 터여서 빨리 소진해야 하는 당국에서 외국인이라고 돌려보낼 상황은 절대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돼지 췌장에서 추출한 트립신효소를 촉매로 사용했다는 루머가 있어 인니 인구 80%가 넘는 무슬림들이 접종을 꺼리는 브랜드입니다. 그래서 외국인들에게도 순서가 돌아온 거라 생각한 건 자연스러운 사고의 흐름이었습니다. 그러니 '저 뒤에서 외국인 배제결정을 했다는 사람'들이 혹시 그렇게 백신을 남겨 뒤로 빼돌리려 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앞으로 남은 20일과 자카르타 인구를 생각하면 40만회분은 얼마 되지 않는 물량이었으니 그 희소가치는 엄청난 것이 될 터입니다.

어쨋든 난 그 접종센터에서 접수도 못하고 돌아나와야 했습니다. 어쩌면 거기서 외국인 티를 내지 않았어야 했나 생각했습니다. 등록담당이란 이들은 그곳에서 아침부터 나 말고도 외국인 여러 명이 접종을 받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했지만 그건 직접 보지 못한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날 내 앞 뒤로 온 다른 외국인, 한국인들 중 접종 맞고 간 사람도 분명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다른 접종장소에선 차별대우하지 않는 외국인들을 그 특정 접종센터에서 배척하는 건 뭔가 정정당당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게 뻔하다 생각했습니다.

결국 접종실패. 

 

하지만 조금 더 시도해보기로 했습니다. 줄도 빽도 없는 외국인이 인도네시아에서 할 수 있는 거란 오직 맨땅의 헤딩 뿐이지만 그것도 20년 넘게 살다보면 용의주도하면서도 동시에 세련된 헤딩이 가능해집니다. 다른 곳에선 당일 현장에서 등록해 접종했다는 얘기도 들은 적도 있어 다른 사람들 후기에 등장했던 곳 중 서부 자카르타 따만앙그렉몰을 떠올렸습니다. 안될 때 안되더라도 한 번 가보는 겁니다.

 

따만앙그렉 몰 4층 대기실 홀 바깥쪽에 늘어선 접종희망자 줄

 

그렇게 도착한 오전 10시반의 따만앙그렉 몰 4층엔 실로 수백 명이 바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선 외국인이나 60세 이하에 대한 차별이나 거절이 없었어요. 접종받으러 온 사람들이 넘쳐나는 가운데 상황을 통제하는 직원들은 대체로 친절하고 효율적이었습니다.  

 

나는 직원 안내를 받아 우선 현장 스탠딩배너에 있는 QR 코드를 찍어 거기 나오는 목록 빈칸을 채워넣었습니다. 이름과 간단한 개인정보. SKTT에 있는 NIK 번호를 쓰는 것과 여권상 영문이름을 이름 먼저, 성은 뒤로 가도록 쓰는 게 키포인트입니다. 그리고 60세 미만이니 Pra-Lansia 카테고리로 하여 클릭. 그렇게 온라인 등록을 마친 후 100명 쯤 늘어선 긴 줄 맨 뒤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 줄이 세 개쯤 있어 줄 선 사람들이 3백 명 안팎으로 보였고 대기실 홀 안에도 2뱅 명 쯤은 들어가 있어 전체적으로 500명 정도가 앞에 있었지만 줄이 들어드는 속도는 꽤 빠른 편이었습니다.  홀 안쪽에 들어가 재등록, 혈압 및  체온확인, 문진까지 가는 게 몰에 도착한 시점부터 대략 한 시간 걸렸습니다. 현지 은행 상담창구에서 앞에 세 명 쯤 앉아 있어도 족히 한 시간 넘게 기다리곤 하는 인도네시아에서 앞에 줄 선 500명이 한 시간 만에 처리되어 나가는 건 기적이나 다름없습니다.

 

왼쪽은 접수증 재확인하는 데스크, 오른쪽은 혈압 및 체온확인 데스크
문진 데스크
문진까지 마치면 이렇게 앉아서 접종순서를 기다립니다.


그런 다음 접종.
접종장소는 사진촬영금지가 걸려 있어 이 감격적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길 수 없었습니다.

 

저 안쪽 접종장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되어 있어 내 사진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접종해 준 친절한 여의사는 머리가 아프면 빨간색 파나돌 먹고 물 많이 마시고 혹시 팔이 저리거나 몸이 뻐근하면  좀 몸을 움직여 주라 하더군요. 

그런 다음 다시 대기실에서 번호 불리길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접종 후 용태를 관찰한다는 의미겠지요. 여기서 2차접종일정 등을 받으면 백신접종 전과정이 일단 끝나는 겁니다.  여기서 접종 증명서와 함께 9월 1일에 다시 같은 장소에서 2차 접종을 받으라는 안내를 받았습니다. 그런 내용이 접종증명서에도 적혀 있었고요.

 



따만 앙그렉 도착한지 1시간 반. 그리 나쁜 기록은 아닌 듯합니다.

늘 느끼는 일이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뭐든 단번에 끝나는 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늘 시행착오가 생기고 늦어지고 틀리고 하지만 대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별로 미안해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젠 당연히 그려러니 합니다. 하지만 백신접종 현장에 많은 현지인 직원들이 땀 흘리며 노력하고 있는데 그것까지 폄하하고 싶진 않습니다. 분명 일말의 진심이 담겼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대충 여기까지 쓰고 나니 예전 우리 사업부서장님이 내 품의서를 집어던지며 이렇게 악을 쓰던 모습이 새삼 다시 떠오르는군요.

 

"이 새끼는 보고서를 쓰라면 맨날 소설을 써와요!"

 

ㅠㅠ

 



2021.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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