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신기한 네이버 세계 본문
난 구글을 써왔습니다.
가끔 네이버에 들어가 본 적이 있지만 간단한 검색을 몇 번 해보았고 최근엔 웹툰 보러 들어가는 게 대부분이어죠.
그러다가 오늘 뭔가 검색하다가 내 책 이름을 쳐보니 예전에 구글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검색결과들이 떴습니다.
네이버의 세계는 무궁무진하고 오묘합니다.
비록 인공지능 드립을 치며 정치 경제적으로는 뻥을 치고 있지만 검색 결과는 확실히 구글과 많이 달라 신기했습니다.
그중 내 책에 대한 서평도 있었습니다.
상상의 공동체를 일궈낸 사람들 -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2018. 10. 19. 22:11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배동선
출판 아모르문디
발매 2018.09.15.
어깨너머로 배웠던 인도네시아 현대사인지라 조각조각 갖고 있는 이 나라 현대사에 대한 지식과 정보들은 쉽게 정리되진 않았다. 과연 여기서 일본은 어떤 의미 였는지, 9.30 사건은 왜 갑자기 터져서 수카르노의 종말을 가져온건지, 네덜란드는 그리 징그럽게 집착하다가 어떻게 돌아서게 된 것인지... 뭐 이제는 그런 호기심도 식어버렸지만, 이런 궁금증들이 마음 한 켠에 남아있었던 모양인지 한글로 씌여진 수카르노에 대한 책이 나왔다는 소식은 제법 반가웠다.
책은 사실 수카르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의 공, 과에 초점을 맞춘 평전은 아니었다. 그가 나서 사망할 때 까지 기간 동안의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네덜란드와의 저항, 독립과 신생국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뭐 그럼에도 나도 사실 호기심은 수카르노라는 개인보다는 인도네시아 역사에 있었기 때문에 큰 거부감 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수디르만을 비롯한 많은 군부의 영웅들과, 하타 처럼 수카르노를 도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이끌어간 많은 인물들이 친절하게 잘 소개되어 있어 현대 인도네시아를 일군 다른 많은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독립전쟁의 전개 전체에 대한 정리가 잘 되어 있었던 지라, 이 전쟁이 어떻게 전개 되었고, 이런저런 전투와 사건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기대 이상으로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일람할 수 있었던 점이 큰 의미이자 성과였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책이 수카르노라는 인물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샤리르, 수디르만, 하타 등과 대조해 가며 깎아내리는 듯한 태도와 언급을 이어간 것은 다소 유감이다. 수카르노가 위대해서라기 보다는 그가 카리스마를 갖고 1965년까지 인도네시아를 이끌어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지가 수카르노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었기에 여성 편력 등 너무 인간적인(?) 면 위주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끌고간 것은 좀 유감이기도 했다. 또한, 우리의 식민지 시절, 독립운동들과 인도네시아를 비교하는 구절들이 좀 거슬리기도 했다. 한국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있겠지만, 민족의 형성이라든가 민족국가를 이루어가는 역사적 맥락이 완전히 다른 두 나라의 독립 과정을 무작정 비교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많이 들었다.
끝으로... 이 책을 읽기 전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된 공동체’에서 필리핀, 인도네시아의 예를 들어가며 강조했던 이 양 국가를 이루려 했던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에 대한 언급이 많이 떠올랐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위한 몸부림이 수라바야 전투, 족자 총공세와 같은 치열한 전투와 인민들의 희생을 토대로 이루어졌던 것에 우선 놀랐다. 그들이 그 전에 조선이나 일본과 같이 체계적인 하나의 국가를 이룬 경험이 없었음에도 저항의 체계와 구심점을 만들어 내고 국민국가를 이루어내는 힘이 인상적이었고, 그 중심에 바로 이 문제적인 사람 수카르노가 있었으니, 그의 의미는 작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민족주의라는 그 '상상의 힘'에 지나치게 경도된 결과 ‘콘프론타시’라는 실책을 저지르고 그로 인한 갈등이 기화가 되어 9.30 사태와 공산당 말살이라는 비극과 수카르노의 몰락으로 귀결되는 모습은, 감정에 기반한 그 힘이 통제되지 못해 종종 발생한 이 아시아 현대사의 많은 비극들의 전형이 아닐까 싶다.
https://m.blog.naver.com/wilsurvive/221381108988
이 책이 나온 게 2018년 8월이었는데 10월에 이미 서평을 써주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또 어떤 분은 이런 글을.......
2012년 6월 시작 천권 읽기 918권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2019. 8. 27. 13:44
2012년 6월 시작 천권 읽기 918권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배동선 저 *인상적인 구절: (네덜란드 군의 라와데거 학살)1948년 1월 12일 유엔에 제출된 보고서는 이 사건이 매우 계획적이고 무자비하게 집행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강산이 여러 번 변하고 난 후인 2008년 9월 8일,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열 명의 생존자가 네덜란드 정부에 이 사건의 책임을 물었다. 네덜란드 측 변호사는 2009년 11월 24일, 매우 유감스러운 사건이지만 소멸시효가 지났으므로 네덜란드는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이 서한은 인도네시아 측은 물론 네덜란드 의회로부터도 격렬한 비판을 불러왔고, 네덜란드 주요 신문 「NRC 한델스블라트」는 전쟁 범죄엔 소멸시효가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하는 사설을 싣기도 했다. 그 결과 생존자들은 2009년 12월 네덜란드를 법정에 고소했고, 2011년 9월 14일 법정은 사안의 특수성을 감안해 소멸시효를 인정하지 않고 네덜란드가 손해배상의 책임이 있음을 판결했다. 네덜란드는 라와거데 학살 사건의 원고와 미망인들에게 각각 2만 유로(약 3천만 원)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했고, 구체적인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당시 약속한 보상금의 지급 일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어쩌면 네덜란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건 아마 책이 나올 당시 서평을 부탁했던 분 아닐까 싶고.....
여기서는 이 책의 챕터별 요약.....이런 게 있었는지도 몰랐습니다.
막스 하벨라르 서평도 있고요.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독립 영웅’으로 칭해지는 양칠성은 누구인가
8월 29, 2019
2019년 8월 22일 오마이뉴스 보도
‘인도네시아 독립 영웅’으로 칭해지는 양칠성은 누구인가
인니 독립 위해 싸운 영웅으로 평가 받지만, 일각에선 ‘친일’ 논란도
▲ 인도네시아 가룻(Garut)시 관립영웅묘지에 있는 양칠성씨의 묘비 | |
ⓒ 배동선 | 관련사진보기 |
[기사 보강 : 23일 오전 9시 54분]
인도네시아에는 한인 독립 영웅이 있다. 양칠성이 그 주인공이다. 인도네시아 가룻(Garut)시 관립영웅묘지에는 ‘외국인독립영웅’ 양칠성의 묘가 있다.
지난 8월 16일,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8월 17일)을 앞두고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UI)에서 UI와 인도네시아역사연구협회(히스토리카)는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서 한국인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이 세미나에서는 1940년대 후반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과 관련된 한국인(조선인)들을 재조명했다. 그 중 가장 많이 연구되고 알려진 인물이 양칠성이다. 이 세미나에는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의 저자인 배동선씨가 연사로 참석했다. 지난 20일~21일 전화와 서면 인터뷰 등을 통해 그에게 양칠성에 대해 물었다.
▲ 16일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에서 열린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서 한국인의 역할” 세미나에 참석한 배동선 작가(제일 오른쪽) | |
ⓒ 배동선 | 관련사진보기 |
전북 완주 출신인 양칠성은 1942년 2월, 일본군으로부터 강제징용당해 포로 감시원으로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이던 인도네시아로 왔다. 네덜란드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과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에서 맞붙었고, 당시 이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던 일본군은 8만 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감시하고 사역시키는 일을 감시할 군무원이 필요했다.
그의 인도네시아 근무기간 중 일본은 패망하여 인도네시아에서 군을 철수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조선인들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양칠성도 계속해서 인도네시아에 남은 조선인 중 한 명이었다. 양칠성은 그의 일본인 상사로부터 부대 이탈을 권유받은 후 일본군을 이탈한 조선인, 일본인 동료들과 함께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 뛰어든다.
▲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 뛰어든 “빵에란 빠빡(Pasukan Pangeran Papak)” 부대원 “빵에란 빠빡(Pasukan Pangeran Papak)” 부대원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양칠성이다. | |
ⓒ 한인니문화연구원 | 관련사진보기 |
이러한 결정이 그의 의사였는지 아니면 강제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독립군에서 무기 다루는 기술을 배워 폭파전문가가 되었다고 알려진 그는 인도네시아 독립군 부대에서 1948년 11월까지 약 3년간 네덜란드군과 맞서 싸우다 잡힌다.
그리고 1년 후, 1949년 8월 10일 양칠성은 네덜란드군에 의해 처형당한다. 배동선 작가는 이를 두고 “자바의 휴전 발효 바로 하루 전 양칠성을 처형한 것으로 보아 네덜란드군은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전한 외국인들을 절대 살려 두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일본군 부대 이탈 이후 3년간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에서 활약한 그의 이력은 현재 많은 한국인들에게 거부감 없이, 혹은 자랑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의 일생 중엔 친일 행각으로 보이는 행동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때문에 한국 입장에서 인도네시아의 독립 영웅인 양칠성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다.
처형장에서 양칠성은 그의 일본인 상사의 선창으로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고 총성이 울리기 직전 ‘천황 폐하 만세’를 외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점은 아직도 식민 지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지켜보는 한국인들에게 분명 거부감이 생기는 지점이다. 그러나 다른 연구에서는 독립, 혹은 자유를 의미하는 인도네시아어 단어인 ‘Merdeka’를 외쳤다는 기록도 있다.
오랜 시간 양칠성을 재조명하기위해 노력해 온 한인니문화연구원의 사공경 원장은 이와 관련하여 양칠성에 관한 새로운 기록에 대해 소개했다. 양칠성이 네덜란드 군에게 체포된 이후 반둥(Bandung) 지역의 미결수 형무소 반쩌이(Banceuy), 사형선고 이후 수카미스킨(Sukamiskin) 형무소, 자카르타(Jakarta) 찌삐낭(Cipinang) 형무소 등으로 전전했는데 처형 직전 수감됐던 찌삐낭 형무소에서 그와 함께 지낸 동료는 ‘머리와 수염이 산발된 양칠성의 모습은 마치 귀신과 같았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기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사공경 원장은 양칠성이 처형 직전 기미가요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다는 건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도네시아 독립군으로 게릴라전을 펼칠 때 양칠성에게는 사랑하는 여인(Lience Wenas)이 있었는데 둘은 사실혼 관계였고 둘 사이에는 자식도 있었다고 한다. 양칠성은 이 아내와 자식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게릴라전을 펼치며 긴박한 와중에도 이들을 데리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처형된 이후 인도네시아의 국기인 ‘메라뿌띠(Merah Putih)’로 그의 관을 덮어달라고 요구했다고 하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그는 인도네시아와 인도네시아인을 사랑한 사랑한 독립 영웅으로 평가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것이 사공경 원장의 의견이다.
또 배동선 작가는 이를 두고 “9개월간 가혹한 포로 생활 끝에 용기와 기백을 잃고 피폐한 상태에서 처형 직전 어떤 말을 외쳤는지를 두고 그의 일생을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오히려 그가 아무 말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고 받아들이는 편이지만, 이보다 중요한 건 인도네시아 독립군으로 싸우다가 죽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라고 밝혔다.
덧붙여 그는 “양칠성이 비판받는 친일행각 중 대부분은 생존을 위해, 혹은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므로 ‘친일’이라는 표현보다는 ‘일본이 묻은’ 사람이라는 평가가 더 적절하다”고 말했다. 배동선씨에 따르면, 1995년 그의 묘비가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바뀔 때만 해도 한국 대사관과 한인 사회는 반기며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현재 한국 대사관은 그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배동선 작가는 “그를 항일투사나 한국 입장에서 독립 영웅으로 평가할 순 없다”면서도 “그가 살았던 시대와 장소적 환경을 고려하면 그는 지나치게 엄격한 평가를 받으며 소외받고 있다”라고 짚었다. 배 작가는 그에게 ‘뭍은’ 일본의 흔적보다는 3년간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위해 싸운 역사를 집중하여 평가하면 한국과 인도네시아, 혹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협력적인 동반자적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내비쳤다.
https://snuac.snu.ac.kr/seacenter/?p=10629
양칠성 세미나를 정리한 서울대 동남아연구소 글도 있더군요.
신기한 네이버 세계......^^
2021.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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