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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자신의 인물평은 남이 해주는 것

beautician 2021. 3. 9. 11:04

자존감 최상의 순간

 

 “난 한번 뱉은 말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반드시 지키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술에 떡이 되어 필름이 끊겨도 그 상황에서 한 말들조차 무슨 수를 쓰든 다 지켜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날 좋아하는 거에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과 3년도 넘게 일했는데 그 사이 그가 나한테 지키지 않은 굵직한 약속만 해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남도 아니고 자길 누구보다 잘 아는 나한테 확신에 찬 표정으로 저런 얘기를 하는 것은 그가 정말 그리 믿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그가 나한테 지키지 못한 그 여러 약속들을 하나도 기억 못한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내가 반박하려 하면 인문사회철학적 수사를 동원하여 당시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완벽한 이유와 당위성을 내세웁니다. 그럼 그의 설명이 끝날 즈음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는 오히려 엄청난 대인배가 되어 있고 그 일을 아직 마음에 담고 있는 나는 찌질한 소인배로 몰리곤 했죠.

 

그의 주옥 같은 명언들 중에 이런 것도 있었어요.

 

“인도네시아 온지 한참 됐는데도 내가 왜 인니어를 안배우는지 아세요? 난 한국에서 불과 몇 명밖에 알 수 없는 고도의 금융기법을 머리 속에 완벽하게 정리해 담아 온 사람입니다. 허접한 인니어 배우겠다고 깔끔하게 정리된 머리 속을 흩트려 놓는 건 큰 손해일 뿐이에요.”

 

그때 내가 마시던 음료를 뿜었던가 잘 기억이 안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면서 그 근거없이 하늘을 찌르는 자신감, 자만심에 혀를 내두르곤 합니다. 그리고 한 인물에 대한 평가란 그 인물이 스스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사람들이 내리는 거란 걸 새삼 느끼게 되죠. 사람들이 보는 내 얼굴이 나 스스로 상상하는 것과 적잖은 차이가 나는 것처럼 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분명 내가 가진 스스로의 평가와 사뭇 다를 것이 틀림없는 일입니다. 저 금융고수의 경우처럼 말이죠.

 

하지만 솔직히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나면 청소년 시절처럼 모든 것이 불명확한 것이 아니라 비록 틀릴 지라도 세상 모든 일에 대해 내 생각은 더 없이 명료해집니다. 그걸 좀 있어 보이는 말로, 그러나 매우 부정적인 뜻으로 ‘확증편향’이라 하는데 꼰대들의 특징이죠. 확신은 정의로운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 나이쯤 되면 나쁜 놈들도 모두 확신에 가득 차 있어요.

 

그러니 나 역시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 규정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지기도 합니다. 사실 그게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저 금융고수처럼 ‘난 죽어도 약속 지키는 사람이야’ 따위의 남들이 절대 인정할 리 없는 발언을 하게 되면 이후 현타와 쪽팔림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를 평가하려면 모름지기 내세울 만한 것뿐 아니라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부분들도 평가항목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나 역시 그런 과정을 거치며 불의를 잘 참고 견디며 뒷담화에 강한 성향까지 모두 감안해 스스로를 규정지을 단어를 하나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잡놈’

 

‘Job-norm’이라고 있어 보이게 표기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이렇게 스스로에 대한 나름대로의 규정이 되어야 그제서야 그에 걸맞는 자존심과 자존감을 논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존심이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곳은 CV 상에 기재하는 자신의 프로필입니다. 그간의 프로토콜에 따라 세상이 나를 서울고, 외대 영어과, 육군 ROTC를 거쳐 한화그룹 출신 서울 놈 정도로 인식하는 상황에서 기왕에 내 손으로 소개할 바에 잘 포장하는 게 인지상정이죠. 그러니 거기 적을 직책들도 지금 맡은 것은 물론 전에 했던 것, 가능하면 앞으로 하고 싶은 것 다 끌어오고 출판한 책들은 물론 살짝 거들며 심부름 좀 해주었던 프로젝트들을 모두 섭렵해서 적고 나면 지나치게 뽀샵된 인스타그램 플픽처럼 나 아닌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어 있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런 이력들을 다 버리고 프로필을 세 줄로 줄이고 나니 조금 더 진짜 나한테 근접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내 프로필

 

하지만 누군가 소개해 주지 않는 상황이라면 내가 나의 언어로 나를 소개하려 애쓰는 대신 저기 단어 한 개만 써넣고 싶습니다. ‘Job-Norm’~

 

 

그럼 그날은 정말 자존감 최상인 상태로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2021. 2. 22

 

 

 

 

PS. 마감 마친 지 얼마 안되어 아직 정상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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