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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마감시간 놓친 깐마늘의 최후

beautician 2021. 3. 8. 11:26

아는 만큼만 보이는 세상

 

 

하루 사이에 목 깊숙이 들어온 마감의 비수 네 개 중 세 개를 걷어내니 조금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 하나는 계속 찔러 들어오고 있는 상황. 사실은 칼날 네 개에 찔리든 한 개에 찔리든, 찔리면 죽는 겁니다. 게다가 가장 끝내기 어려운 것을 가장 뒤에 밀어 두었던 것이죠. 이젠 시간 계산이 필요합니다. 오늘이 마감이라지만 최대한으로 늘리면 내일 한국에서 담당자가 출근해 컴퓨터를 켜는 시간까지…… 열 시간쯤 남은 겁니다

 

두 자리 수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하니 살짝 안도감이 생깁니다. 마치 한숨 안자고도 그 열 시간을 완전히 쓸 수 있는 수퍼맨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죠

 

사실 어제도 마감 원고 두 개를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잠깐 여유가 생겼던 게 사실입니다. 물론 그걸 끝내도 남은 것들이 만만찮게 버거운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몰릴 때까지 몰리면 오히려 사고방식이나 상황평가가 평소와는 다르게 돌아갑니다. 아직 다 끝나지 않았지만 몇 시간 지나고 나면 분명히 끝내야 할 걸 어떤 식으로든 끝내고 잠자리에 들게 될 거란 근자감도 생기고요. 그럼 일단 뭘 좀 먹어야죠.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요.

 

냉동실을 열어보니 그간 단촐해진 내용물 중에 돼지고기 한 덩어리와 닭 한 마리가 보입니다. 아직까지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지만 저 두 가지를 한 솥에 넣고 끓이면 어떤 맛이 날지 궁금해졌습니다. 게다가 냉장실에는 엄청난 양과 싼값에 놀라 구매한 해파리 닮은 성명 불상의 버섯이 살짝 썩기 시작할 기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쟤도 마감시간이구나….

 

와이프가 닭을 압력밥솥에 넣어 요리하는 걸 어깨너머로 본 바가 있어 일단 얼어서 떨어지지도 않는 열 두 토막 닭 한 마리와 손바닥 만한 돼지 목살에 칼집을 내서 밥솥 밑바닥에 깔고 한 달 전에 미리 까놓고 야금야금 먹던 마늘을 꺼냈는데 파란 곰팡이가 폈습니다. 아니? 곰팡이가 마늘에도 피는 거야? 일단 20알 정도 곰팡이 부분을 잘라내고 투하. 그런데 마늘을 넣은 비닐봉지가 대체로 푸르스름한 것이 마감시간을 넘긴 음식물의 운명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런 다음 양파 두 개, 미리 작게 잘라 놓고 얼린 고추 한 주먹, 역시 잘라서 얼린 부추도 한 주먹. 생각해 보니 해 놓은 밥이 없어 그 대신 감자 세 개 껍질 벗겨 넣고 물 부었는데 뚜껑을 닫기 전에 간을 맞춰야죠. 보통은 라면 스프 한 개 넣으면 되지만 여분의 스프가 남은 게 없으니 얼마 전 사놓고 쓰지 않던 붐부 깔두사삐(bumbu kaldu sapi), 소고기 국물 맛을 내는 양념이라니 아마 소고기 다시다 같은 것일 텐데 그거 한 스푼 넣고 뚜껑을 닫으며 생각합니다. 닭고기, 돼지고기에 소고기 다시다면 결과물은 무슨 맛일까?

 

압력밥솥을 중불에 올려놓고서, 아마도 한국 간 후 남편 끼니 거르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을 와이프에게 주방 사진을 찍어 보냈습니다. 잘 하고 있다는 칭찬을 기대했는데 와이프는 의외의 답변을 보내옵니다.

 

와이프: 가운데에 뭐 씌워야 하는데

나: 뭘 씌워?

와이프: 이거!

 

 

와이프: 씽크대 위에 오른쪽 문 열면 뚜껑에 씌우는 거 있어.

 

압력밥솥이 조립식으로 나오는 건 줄 몰랐습니다. 뒤져보니 과연 종 같은 게 있어서 그걸 끼우고 사진을 다시 보냈죠. 이제 끓기만 기다리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와이프가 또 메시지를 보내옵니다.

 

와이프: 왼쪽은 세워야지. 눕히지 말고.

나: 왼쪽? 그건 무슨 소리? 저걸 끼우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세우기까지 해야 해?

와이프: 멍충아!

 

 

나: 아, 저거 세우니까 이제 소리가 안나네.

와이프: 처음부터 세웠어야지, 아저씨.

 

우여곡절 끝에 결국 요리를 마쳤는데 비주얼은 무참했지만 의외로 괜찮은 맛이 났습니다. 나이 들면서 뭔가 새로운 거 배우기 어려워져 가는데 요리 과정에서 두 가지를 배웠다는 것도 뿌듯했습니다. 압력밥솥 쓰려면 일단 뚜껑 끼우고 왼쪽 공기 밸브를 세워야 한다는 것!

 

2018년에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란 책을 낼 때 책 말미 맺는 말에 이런 문장을 썼던 걸 기억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인도네시아는 우리가 아는 만큼만 그 문을 열어 우리를 맞이할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압력밥솥도요.

그리고 이제 마감시간 놓쳐 전사한 깐마늘들의 최후를 기억하며 남은 마감원고에 다시 매진합니다.

 

 

2021. 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