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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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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오해 2

beautician 2021. 2. 26. 11:17

오해 2

 

 

세상 살다 보면 피치 못하게 상대방과 한바탕 붙어야 할 경우가 생깁니다

정도에 따라 때로는 육체의 대화로 번지기도 하지만 나이 들면서 대개는 말로 끝내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생긴 마음 속 응어리의 쓰라림은 터진 입술보다 오래 가는 법이죠. 한바탕 다툰 끝에 등을 돌리게 된 상대방과는 한동안 꼴도 보기 싫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슬쩍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지는 게 인지상정일까요?

 

2014년부터 1년 좀 넘게 베트남 이주 가능성을 점치며 그쪽 시장을 개발해 보려 애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20년쯤 알았던 후배와 그곳에서 이런저런 도움을 주고받았는데 그 끝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오기만 하면 다 책임져 줄 테니 몸만 오라는 사람들은 정말 그럴 마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고 싶은 경우가 많고 1년쯤 마음껏 자랑하고 나면 그것도 지치기 마련이죠. 결국 여러 차례 충돌하고 막판엔 악감정만 남게 되었을 땐 하지 않아야 할 말들도 오가고 말았죠. 사람들 관계는 대개 그 지점에서 망가지고 때로는 연을 끊기도 합니다.

 

인도네시아에 돌아왔을 때 직원에게 맡겨 두었던 내 사업은 원래 내리막에 있긴 했지만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고 난 절치부심 다른 활로를 찾아야 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체념과 내려놓음을 배운 끝에 어느 날 작가라는 이름표를 달게 되었을 때 카카오톡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형님 잘~지내시지요?

세월이 무수히 지났습니다.

카톡을 살펴보니 형님 성함도 있길래 문자 보냅니다.

설~명절 잘 보내시고 건강하세요. 제 나이도 이제 50, 중년 이네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요.

그리고 그때의 그 일은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전화통화를 하면서 우린 마치 그동안 매일 통화하며 지낸 사람들처럼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조금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함께 하다가편이 갈리면서 생긴 갈등이 꽤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들 사이에 골을 만들었고 주장과 비난이 오고 가면서 그 골이 더욱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 관계를 되돌려보려 다른 일을 만들어 협업을 도모해 보았지만 서로에게 돋은 가시들만 확인하게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작년 말에 그와 관계된 모든 단체와 모임에서 물러났습니다. 충돌을 피하려면 꼭 상대방을 때려눕혀 무장해제시키는 것 말고도 그와 나 사이에 비무장지대를 만드는 지혜로운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탄인사, 설인사를 보내는 건 위선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한번 위선을 떨었더니 상대방도 위선으로 답해 옵니다.  

 

시간이 흐르면 다시 만나서 오해도 풀지요.

 

아직 충분한 시간이 흐르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저 ‘오해’라는 단어 때문일까요?

서로가 서 있는 다른 입장과 바라보는 다른 방향을 충분히 인지했고 서로에게 휘두른 악의와 비난이 아직도 너무나 선명한데 그걸 ‘오해’라고 뭉뚱그리는 건 관계개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건 단지 상대방을 말귀 못알아듣는 멍청이 취급을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니까요.

 

물론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 찬 성서처럼 저 ‘오해를 풀자’는 말에 어떤 심오한 은유가 숨어있는지 모르지만 서로의 악의가 한바탕 충돌한 후엔 그것을 깨끗이 사과하든, 서로 없던 일로 쳐버리든 해야 새로운 시작이 가능합니다. 오해를 풀자는 말은 상대방을 사정없이 무시하는 겁니다.

 

그때 내가 네 면상을 도끼로 내려친 건…… 그거, 다 오해다, 너?

 

그렇게 오해를 풀자는 사람들을 참 많이도 만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이 되어버렸죠. 

아마도 이번 일도요.

 

오해라니깐~

 

 

2021.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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