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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세바시 인생질문 에세이

오해1

beautician 2021. 2. 25. 11:16

오해1

 



오해가 잘못된 선입관을 낳고 결과적으로 오류 투성이의 세계관을 낳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보았고 다른 사람이 이상한 현실판단을 할 때 속으로 얼마나 혀를 차며 비웃었는지 모른다.

1995년 쯤에 그런 일이 있었다.
인도네시아 초급 문법책을 세 번쯤 읽고 자카르타에 들어왔을 때 우리 창고장은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쥐뿔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한없이 센 놈들이야. 뭘 물어봤을 때 그걸 모르면 순순히 모른다고 하질 않고 자긴 아는 게 좀 모자란다....곧 죽어도 이런 식으로 대답한단 말이지. 알긴 아는데 완전히는 잘 모른다? 내가 보기엔 전혀 모르던데?"

띠다따우(Tidak tahu)라 대답해야 하는 걸 꾸랑따우(kurang tahu)라 대답한다는 걸 두고 한 말이다. Tahu는 알다, kurang은 모자라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꾸랑따후 역시 모른다는 뜻의 또 다른 표현이고 심지어 어딘가 공손한 어감까지 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완전히 오해했던 것이다. 자카르타 폭동 직전 귀국한 그는 결국 8년간 현지법인에서 일하며 인도네시아에 대한 개인적 관점을 발전시켜 갔고 어쩌면 지금도 지인들에게 인도네시아에 살던 경험을 얘기할 때면 그 쥐뿔도 없이 자존심만 강한 놈들이란 얘기를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 얘기를 하기엔 다들 만만찮은 비슷한 경험들을 각자 가지고 있을 것 같다. 내 경험은 고양이에 얽혀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생활에 쉼표가 찾아온 건 1998년 자카르타 폭동과 외환위기 때문이었다. 최근 코로나로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당분간 뭘 어찌하든 결국 아무 것도 못하게 되었던 그 시절 뭉툭한 짧은 꼬리를 한 고양이들이 자주 보였다. 폭동 당시 화교여인들을 겁탈하고 불구덩이에 던져 넣기도 하고 해맑은 표정으로 가게들 약탈을 자행하던 현지인들은 지난 몇 년간 내가 알고 지내던 인도네시아인들이 아니었는데 그들이 고양이를 잡아 꼬리를 자르는 모습이 너무 쉽게 머리 속에 그려졌다.

버스웨이 전용버스에서 내리던 내가 다시 돌아들어오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뒤통수에 주먹질을 했던 생전 처음보는 남자를 내가 가방을 몽땅 내던지고 버스로 다시 들어와 멱살을 잡고 끌어내자 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문닫고 출발하는 버스에 찰싹 달라붙어 도주하던 장면을 기억하며 절대 보복할 리 없는 고양이 꼬리를 무자비하게 자르는 것이 인도네시아인들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후 20년 넘게 짧은 꼬리 고양이들을 도처에서 만나면서 난 그들을 가엾게 여겼고 내 머리속 세계관 속 인도네시아의 한 구석엔 고양이 꼬리를 정글도로 내리치는 인니 청소년들의 모습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재작년 차차와 마르셀이 홍수에 떠내려가던 새끼고양이를 구한 일이 있었는데 잿빛 얼룩무늬의 성묘가 되더니 작년 5월에 새끼 세 마리를 낳았다고 연락이 왔다. 엄마가 출근한 사이 아이들만 인터넷 원격수업을 받다가 새끼들이 태어나 내가 급히 가 보았는데 살짝 고개를 갸우뚱 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미고양이가 처음부터 뭉툭한 꼬리를 한 것이 태어나자마자 누군가 잔인하게도 잘라버린 거라 생각했었는데 새로 태어난 세 마리 모두 뭉툭한 꼬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르셨어요? 유전적으로 저렇게 짧은 꼬리를 가진 고양이들이 있어요. 짤린 게 아니라고요."

나중에 차차 엄마에게 그런 얘기를 듣고서 수많은 고양이들의 뭉퉁꼬리에 대해 내가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비로서 깨달았다. 지난 20년 이상 난 인도네시아인들이 몰래 고양이 꼬리나 마구잡이로 잘라대는 잔인한 망나니들이란 생각을 마음 한 구석 어디에선가 줄곧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 세계관이란 그렇게도 왜곡되기 쉬운 것이니 남 비웃을 일도 없다.

 




2021.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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