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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파티힐라 광장의 교수형 본문
우이 탐바샤의 교수형
안쫄다리 미녀유령의 도시괴담에서 시티 아리아를 살해한 배후로 지목되는 우이 탐바샤는 오래전 바타비아의 처녀들을 후리고 다니던 전설적인 플레이보이입니다. 그는 욕정을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 결과 지금은 자카르타 역사박물관이 된 바타비아 시청 앞 광장(파티힐라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우이 탐바샤는 19세기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에 바타바이에서 1827~1856년 사이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담배를 취급하던 거상의 아들로 15세가 되었을 때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았습니다.
자카르타 주정부 공식 포털사이트에 등재된 백과사전에는 그가 그렇게 대단한 부호였지만 바람직하지 못한 행실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는 오만하여 방약무인했고 부녀자들을 괴롭혔는데 그 대단한 위세를 공권력조차 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현재 서부 자카르타 땀보라(tambura) 지역 뻐르니아가안 거리(Jl. Perniagaan Raya)가 된 빠떽완 거리(Jalan Pa Tek Wan yang) 근처 지락껭(Ji Lak Keng) 지구 번화가에 나타나 돈을 물쓰듯 했고 술과 도박으로 방탕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밤이 되면 그는 그곳 클럽의 무용수들에게 돈다발을 던지며 유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라메디아에서 출간된 윈도로 아디(Windoro Adi)의 ‘바타비아 1740: 브타위 사람들의 족적을 따라서(Batavia 1740: Menyisir Jejak Betawi)’라는 책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번듯한 외모에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돈많은 청년이었습니다. 관리가 잘 된 피부는 광채가 났고 검은 비단으로 만든 고급 중절모를 쓴 그는 매일 밤 세 명의 시종이 뒤따르는 말을 타고 등장하곤 했습니다. 17살이 되었을 때 플레이보이로서의 그의 악명은 벨터프레든(Weltevreden – 지금의 빠사르바루에서 반뗑공원을 거쳐 빠사르스넨에 이르는 지역)까지 자자하게 퍼졌습니다. 딸을 가진 부모들은 이 엄청난 재력을 가진 망나니가 지역에 들어설 때마다 온갖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는 이미 결혼해 부인이 있었지만 여전히 여자들을 ‘사냥’하고 다녔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경쟁자들, 즉 자신이 타겟으로 정한 여성을 지키려는 남편이나 형제들을 괴롭혔을 뿐 아니라 심지어 살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븐땅 뿌스타카(Bentang Pustaka) 출판사에서 나온 ‘인도네시아가 품은 이야기들(Indonesia Poenja Tjerita)이란 책에도 우이 탐바샤의 악행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잡화상의 아내였던 코진양(Khoe Tjin Yang)을 유혹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코진양이 결국 그의 유혹에 넘어가 안쫄 소재 빈땅마스(Bintang Mas)의 우이 탐바샤 저택 근처 한 별장에 들어가자 ‘바타비아의 권력자’에게 아내를 빼앗긴 남편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정신이 이상해져 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현지 화교 대표들의 모임인 콩코안(Kongkoan)에 화교사회 지도자들이 모여 물의를 빚고 있는 우이 탐바샤의 문제를 진지하게 의논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콩코안의 의장은 우이 탐바샤의 친척인 탄응고안(Tan Eng Goan)이란 사람으로 당시 바타비아의 시장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우이 탐바샤의 돌아가신 부친으로부터 예전에 경제적인 도움을 입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그는 우이 탐바샤에게 우호적인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화교 대표들이 탄응고안에게 우이 탐바샤에 대한 강경한 조치를 취하도록 강력히 요구했으므로 그들의 협의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정치적 소용돌이 속의 화교사회(Tionghoa dalam Pusaran Politik)’라는 책에 우이 탐바샤에 대한 글을 쓴 베니 G 스티요노(Benny G. Setiono)는 결국 화교대표들의 압력에 굴복한 탄응고안이 우이 탐바샤가 지금까지 보여온 못된 행실을 당장 중지하도록 경고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이 탐바샤의 악행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시 유명한 뻐깔롱안 출신 무용수이자 가믈란 악단의 가수인 마스 아젱 군징(Mas Ajeng Gunjing)을 돈으로 유혹해 자신의 건물에 입주시키고 첩으로 삼았습니다.
마스 아젱 군징은 비할 바 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처소를 옮긴 그녀를 친오빠인 수테조가 방문했습니다. 아마도 수테조 역시 여동생 미모에 걸맞는 대단한 미남이었던 모양인지 마스 아젱 군징 옆에 있던 수테조를 본 우이 탐바샤의 마음 속에서 질투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의 화교사회’에는 우이 탐바샤가 자신의 수하 깡패인 삐운과 수라를 시켜 수테조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이 탐바샤를 교수대로 이끈 것은 또 다른 사건입니다. 콩고안 위원회의 의장이자 시장인 탄응고안의 사위 림수켕(Lim Soe Keng)이 뻐깔롱안에 살다가 브타위(지금의 자카르타 지역)로 이사해 왔는데 젊고 잘생긴 그를 우이 탐바샤는 자신의 경쟁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이 탐바샤는 림수켕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략을 세웠습니다. 림수켕의 하녀를 독살하고 그 죄를 림수켕에게 덮어씌우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림수켕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고 직접 수사를 지휘한 탄응고안 시장은 오히려 우이 탐바샤가 하녀 독살의 범인이란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네덜란드 총독부의 법정인 란트라아트(Landraad)에서 열린 재판에서 우이 탐바샤에게 사형을 선고되었습니다. 그의 악행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가족들이 상급법원에 항고하려 했지만 너무나 명백한 혐의로 인해 여의치 않았고 총독에게 감형을 요청했지만 그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타비아 시청인 스타두이스(Stadhuis) 건물 앞 광장 교수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현재 자카르타 구도심의 파티힐라 박물관이라 불리는 자카르타 역사박물관이 되어 있는 곳입니다. 운집한 바타비아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우이 탐바샤는 숨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교수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안쫄다리의 미녀유령이라고 여기는 시티 아리아(Siti Ariah)를 우이 탐바샤가 생전에 납치하려다가 살해했다는 이야기는 이상에 언급한 어떤 공식문서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동시대의 인물이었다면 충분히 그럴 개연성은 있습니다. 그런데 우이 탐바샤가 그렇게 심판을 받아 목숨을 잃고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아리아의 유령이 아직까지 안쫄 지역에 출몰하는 것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일까요?
참고: 더틱닷컴- Danu Damarjati – 28 Des 2020 16:49 WI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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