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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도네시아 호러 영화의 역사

beautician 2021. 1. 15. 11:48

인도네시아 영화산업 초창기의 호러 장르 영화들

 

 

** 이 글은 2012년에 히스토리아 잡지에 실린 글이다. 이미 꽤 오래 전에 작성되었지만 인도네시아 영화의 호러장르에 대한 합리적이고 날카로운 분석이 돋보인다.

 

1941 년작 <살아있는 백골(Tengkorak Hidoep)>

 

라덴 다르마지(Raden Darmadji)가 두 명의 믿을 만한 사람들과 함께 무스티카 섬 탐험에 나섰을 때 사랑스러운 딸 루미아티(Rumiati)도 따라나섰다. 그는 10년 전 침몰한 배에 승선했던 형제의 흔적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스티카 섬은 하나의 괴담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섬에는 2천년 전 굼바 여신(Dewi Gumba)과의 전쟁에서 패한 마하 다루(Maha Daru)의 유해가 묻혀 있다고 전해져 왔다. 마하 다루는 언젠가 자신이 무덤에서 다시 일어나 굼바 여신에게 설욕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라덴 다르마지 일행이 한 동굴을 조사하고 있을 때 큰 비가 내리면서 벼락이 떨어져 마하 다루의 무덤을 갈라 열었고 거기서 백골이 된 마하 다루가 살아나 일어났다. 다르마지 일행은 간신히 동굴에서 빠져나왔지만 이번엔 원주민들에게 쫒겨야 했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신성시하는 동굴을 이방인들이 파괴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라덴 다르마지의 딸 루미아티가 원주민들에 쫒겨 위기에 처했을 때 마하 다루가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었다. 하지만 마하 다루는 악의적인 본심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굼바 여신이 환생한 인간을 죽여 복수하려 했는데 그 환생이 바로 루미아티였던 것이다. 하지만 루미아티는 숲 속에 살던 한 젊은이의 도움을 받아 마하 다루를 물리쳤고 결국 그 젊은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1941년 딴쭈이혹(Tan Tjoei Hock) 감독이 제작한 이 영화에는 딴쩽복(Tan Tjeng Bok), 모 목타르(Moh Mochtar), 비쑤(Bissu) 같은 당시 유명 배우들이 출연했다. 그룹 다르다넬라(grup Dardanella) 같은 다수의 유명 예술극단들은 물론 안자르 아스마라(Andjar Asmara), 랏나 아스마라(Ratna Asmara), 아스타만(Astaman), 이누 뻐르바타사리(Inoe Perbatasari), 수스카(Suska) 같은 배우들도 이 영화에 참여했다.

 

1941년 12월 1일 발행된 마잘라 뻐르짜뚜란 두니아 필름(Majalah Pertjatoeran Doenia Film), 즉 영화세계 잡지는 영화 <살아있는 백골(Tengkorak Hidoep)>이 현대적 스토리에 판타지를 가미한 것으로 인도네시아 영화역사 상 이런 형식의 첫 번째 영화라고 극찬했다. 이러한 평가에 힘입어 영화는 흥행에도 성공했다.

 

인도네시아 영화전문잡지인 ‘F’의 설립자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누르딘 아시하디(Nurruddin Asyhadie)는 당시로선 범상치 않은 라워크나 유명 극단의 배우들을 캐스팅한 것이 <살아있는 백골>의 큰 흥행요인이었다고 말한다. 영화세계 잡지는 신인배우 미스나하티(Misnahati)를 부각시키며 영화의 흥행에 있어 그녀의 기용을 일종의 도박이라고 평가했지만 결과적으로 영화는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1908년 4월 15일생인 딴쭈이혹은 무역회사 출신으로 영화산업에서는 아무런 배경도 없는 신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엔 무대 위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는 거의 매일 밤 프린센 공원(Prinsen Park – 지금의 망가브사르 지역 로카사리 Lokasari)에서 공연을 도왔다. 거기서 바타비아에서 태어난 테킴레(The Kim Le)라는 부유한 사업가의 장남 테뗑춘(The Teng Chun)을 만나면서 영화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1941년 <누사 뻐니다(Noesa Penida)>를 찍고 있는 테뗑춘 (출처: 위키페디아)

 

1902년 6월 18일 수라바야에서 태어난 테뗑춘은 나중에 따자르 이드리스(Tahjar Idris)로 이름을 바꾸게 되지만 영화산업에 익숙한 인물로 미국에서 경제학을 배우다가 영화에 매료되어 학업을 중단한 전력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첫 상업영화인 <찌끔방 출신 붕아 로스(Boenga Roos dari Tjikembang)>(1931)로 데뷔한 테뗑춘은 <여덞 명의 미인 (Sam Pek Eng Tay, Pat Bie To = Delapan Wanita Tjantik)>, <8인의 무사(Pat Kiam Hiap=Delapan Djago Pedang)>, 호러 장르인 <두 마리 요괴백사(Ouw Phe Tjoa = Doea Siloeman Oelar Poeti en Item)>같은 중국 전설들을 토대로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테뗑춘의 요괴영화에 대한 사랑은 당시로서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크고 현대적인 영화사인 자바 인두스트리얼 필름(Java Industrial Film-JIF)이 1940년 설립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JIF 의 로고

 

 

년 어느날 테뗑춘은 프린센 공원에서 공연을 돕는 탄쭈이혹을 발견하고 그에게 영화감독직을 제안했다. 탄쭈일혹은 비록 사전경험이 없었지만 이를 수락했고 테뗑춘은 기꺼이 그를 뒷받침해 주었다. 탄쭈이혹과 테뗑춘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죠니 와이즈뮬러 주연의 타잔 풍의 영화를 만들기로 하고 타잔과 제인처럼 모 목타르와 하디자(Hadidjah – 이드리스 사르디의 부인)을 캐스팅했다. JIF는 이후 그를 완전히 신뢰하여 <살아있는 백골>을 포함한 모든 액션장르 영화의 제작을 맡겼다. 그로부터 탄쭈이혹은 흥행감독이 되어 자신의 하얌우룩 스튜디오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따누트리(Tanu Trh)라는 필명의 기자로 더욱 이름을 떨쳤다.

 

탄쭈이혹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살아있는 백골>은 공포영화의 전형을 구축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미스바흐 유사 비란(Misbach Yusa Biran)은 1900-1950년 영화사(史)에서 <살아있는 백골>을 인도네시아의 첫 공포영화로 꼽았다.

 

하지만 이러한 선정에 대해 논란이 없지 않다. 인도네시아의 첫 번째 영화인 <루뚱 까사룽(Loetoeng Kasaroeng)>(1926) 역시 호러 장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무성영화는 서부자바의 전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전설은 뿌르바사리(Purbasari)란 여인은 한 마리의 긴꼬리원숭이를 사랑하게 되어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당하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한편 그녀의 언니인 뿌르바라랑(Burbararang)은 인드라자야(Indrajaya)란 이름의 미남과 짝을 이룬다. 그리고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모두 짐작하는 바와 같이 긴꼬리원숭이의 실체는 원래 잘생긴 왕자였던 것이 밝혀진다.

 

<루뚱 까사룽(Loetoeng Kasaroeng)>(1926)  

 

하지만 이 영화를 첫 번째 인도네시아 영화 또는 첫 인도네시아 호러영화로 쳐주지 않으려는 이유는 비록 인도네시아의 전설을 인도네시아 배우들이 연기했지만 L. 후벨도르프(L. Heuveldorp) 감독과 G. 크루거스(G. Krugers) 카메라감독 등 외국인들이 제작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인이 만든 공포영화로 따져도 <살아있는 백골> 이전의 영화들이 분명 존재한다. 카틴카 판헤이렌(Katinka van Heeren)은 ‘끼아이의 귀환: 수하르토 시절 인도네시아의 영화 TV에 구현된 호러,, 상업성, 그리고 검열(Return of the Kyai: Representations of Horor, Commerce, and Censorship in Suharto Indonesian Film and Television)’이라는 긴 제목의 저서에서 1930년대 이후 제작된 호러장르의 영화들을 언급했다. 그는 테뗑춘이 1934년에 제작한 <두 마리의 요괴백사(Doea Siloeman Oelar Poeti en Item)>를 최초의 공포영화로 지목했다.

 

<두 마리의 요괴백사>에서 테뗑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천 년간 수행한 한 마리 백사의 이야기를 담은 ‘바이주주안(Bai Zhu Zhuan)의 전설’을 선택해 각색했다. 백사의 소원은 이루어져 뱀은 바주주안이란 이름의 아름다운 처녀가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 무렵 청사(靑蛇) 요괴가 변신한 시야오칭(Xiao Qing)을 만나 친하게 지내게 된다. 영화에서는 청사가 아니라 흑사(黑蛇)로 묘사된다. 모든 계층의 관객들 관심을 끌기 위해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100% Bitjara Melajoe”라고 씌여 있다. 이 무성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변사(辯士)가 대사와 상황을 설명해 준다는 얘기다. 이 영화는 대체로 흥행에 성공했고 테뗑춘은 이후 후속편으로 Anaknja Siloeman Oeler Poeti <요괴백사의 후예(Anaknja Siloeman Oeler Poeti)>를 제작했다.

 

  

 

JB 크리스딴토(JB Kristanto)는 또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필름 인도네시아의 카탈로그에서 1971년 작 영화 <리사(Lisa)를 첫 영화로 지목한다. <리사>에서 계모(라하유 에펜디- Rahayu Effendi)는 세상을 떠난 남편의 유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남편의 딸 리사(레니 마를리나- Lenny Marlina 분)를 죽이려 한다. 리사는 착한 의사가 구해주지만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한 계모는 리사의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하며 공포에 시달리다가 실제로 리사가 집에 돌아오자 두려움에 떠밀려 절벽에서 떨어지게 된다.

 

 

 

“이 영화는 같은 해 배급된 영화 ‘엑소시스트’에 영향을 많이 받았을 개연성이 큽니다. 이 영화가 카탈로그 맨 앞에 온 것은 영화인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이전을 생각해 보면 이 영화가 첫 호러영화라는 주장이 이해가 됩니다. 공포영화란 기본적으로 관객에게 공포감을 선사하는 것인데 <리사>는 그런 기법을 사용한 첫 번째 영화입니다.” JB 크리스딴토는 이렇게 주장한다.

 

아무튼 <살아있는 백골>이나 <리사>를 첫 인도네시아 호러영화로 본다면 그 이전의 호러장르의 발전과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들고 있는 잣대에 달린 것이다.

 

귀신과 심리

누르딘 아시하디는 호러에 대한 기준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첫 번째 인도네시아 호러영화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고 본다. <살아있는 백골>에서는 악마적인 공포, 복수를 위해 무덤에서 일어난 괴기스러운 존재를 보여준다. 악마적 공포는 미스터리, 피가학적 요소, 문명으로부터부터 억압받아 억눌린 인간들의 잠재력 발산과 같은 요소들을 통해 흥미를 자아낸다.

 

한편 <리사>는 개인에게 내재된 공포를 보여주는데 1970년대에 제작된 이런 류의 영화들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1968년작 <로즈마리 베이비(Rosemary Baby)>의 영향을 받아 최소한의 예산으로 흥행성공에 도전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에서는 ‘너무 심각한 주제’라는 인상 때문에 별로 각광받지 못했다. 지금도 감독들이 이런 류의 영화를 잘 만들지 않는 것은 관객들이 소화하기 어렵다는 이유때문이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호러장르에서는 악마적 공포라는 서브장르가 관객들로부터 심리호러보다 더 좋은 반응을 얻는 것이라고 누르딘은 분석했다. (이 사실은 2016년부터 2020년 사이 로컬영화 흥행 15위 내에 든 호러영화의 실제로 100%가 모두 악마적 공포 장르의 영화들이란 점에서도 확인된다-역주)

 

그래서 인도네시아 영화관들은 <무덤 속 출산(Beranak Dalam Kubur)>에서부터 <안쫄다리의 처녀유령(Si Manis Jembatan Ancol)>에 이르기까지 그간 악마적 공포를 담은 영화들로 넘쳐났다. 그런 측면에서 누르딘은 <살아있는 백골>이 인도네시아 호러장르에서 악마적 공포라는 서브장르의 효시라고 주장한다. 그 분명한 기여가 애매하게 희석되어 버린 것은 194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 인도네시아 영화의 사실상 공백기가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무작정 단정해 버릴 수는 없다. 공포효과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귀신이나 심리효과 측면에서 <두 마리의 요괴백사> 역시, 같은 가능성을 갖는다. 물론 우린 지금 관객들이 느끼는 공포감을 일반화하여 측량할 수는 없지만 현재 호러영화들이 시장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호러영화 제작은 역사적으로 그 호황과 불황을 반복적으로 겪어왔다. 1980년대에는 대략 69편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시장반응도 뜨거웠다. 호러영화의 퀄리티도 크게 향상되어 <남쪽바다의 여왕(Ratu Pantai Selatan)>(1980)은 1981년 인도네시아 영화제에서 특수효과 부문 LPKJ 트로피(자카르타 예술교육위원회상)를 수상했다.

 

그러나 1990년에 영화산업 침체기가 찾아와 겨우 33편의 영화가 제작되었을 뿐이다. 이 시절의 공포영화 트랜드는 등장인물들의 섹시한 몸매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사쿠라이(Sakurai), 노르웨이의 비키 비테(Vicky Vette), 미국의 사샤 그레이(Sasha Grey)같은 포르노 배우들까지 공포영화에 출연했다.

 

“호러영화가 섹스영화, 포르노영화화 되어가는 것은 당시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누르딘은 그렇게 회상했다. 어쩌면 그렇게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이 완전히 죽었기에 호러영화가 다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출처: 히스토리아- 2012년 9월 7일

https://historia.id/kultur/articles/horor-bangkit-dari-kubur-vYZQP/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