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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새해 단상

beautician 2021. 1. 1. 14:00

2021년을 맞으며

 

 

지난 해 출판진흥원 12월 모니터링 보고서를 보낸 것이 마감보다 닷새쯤 빠른 12월 10일 경.

중간에 주말이 낀 걸 감안하면 working day로는 마감일보다 사흘 쯤 빨리 보낸 셈입니다. 그걸로 일단 올해 마감해야 했던 모든 보고서들을 끝마쳤습니다. 영진위의 정기, 비정기 보고서까지 포함해 평균 한 달에 두 개 정도의 조사보고서를 쓴 것 같습니다. 그걸 위해 번역한 기사들이 천 개는 되지 않겠지만 수 백 개는 족히 넘습니다.

 

메인이 끝나서였을까요?

연말까지 써야 할 에세이 원고가 두 개 남아 있었는데 보름이 지나도록 초안은커녕 방향조차 잡히지 않는 이상한 일을 겪었습니다. 난 원래 글을 빨리 쓰는 사람인데 말이죠.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도 고작 A4 두 장 정도 분량이면 될 자카르타경제신문 기고문을 서두도 잡지 못했습니다. 2017년 <막스 하벨라르>를 번역할 당시 비슷한 슬럼프를 겪은 일이 있어요. 하루에도 A4 열 장 정도를 번역하며 속도를 내던 중 슬럼프에 빠지니 한 달에 열 장도 번역하지 못했죠. 

 

물론 이번엔 경우가 좀 달랐습니다. 자경 기고문은 2020년 12월 31일에 실리는 구랍 마지막 기고문이었고 내가 인작(인문창작클럽) 회원으로서 쓰는 마지막 글이기도 해서 처음부터 힘이 잔뜩 들어갔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코로나로 시달린 한 해와 한 챕터를 끝내는 개인의 감상을 모두 담으려 너무 무리했던 거죠. 힘을 좀 빼고 나니 마감 당일 마침내 글이 써졌습니다.

 

하나 더 써야 하는 글은 좀 더 말미를 얻었습니다.

<막스 하벨라르>를 공동번역했던 양승윤 교수님이 (책 표지엔 그렇게 써 있지만 그건 사실 좀 어폐가 있고, 양교수님이 번역하는 것은 내가 조금 도왔음) <한국-인도네시아 지식인의 대화>(가칭)을 한국어와 인도네시아어로 양국에서 출판하려 하는데 거기 들어갈 한 꼭지를 써달라 부탁해오신 겁니다. 이 원고를 시작도 하지 못한 것은 '인도네시아 속 한국의 소주문화' 같은 식의 내용에 가능하면 인도네시아의 서양문화를 담아달라는 주문이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그런 글을 쓸 만한 '지식인'이란 카테고리에 들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양교수님이 날 너무 높게 평가하고 계시는 게 틀림없어 보입니다. 아무튼 이 원고는 주제를 좀 더 숙고한 후 글을 써야 할 것이므로 1월에 할 숙제로 미루었습니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너무 오래동안 조사보고서에 몰입하는 동안 상상력과 감수성이 크게 퇴보한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상상력과 감수성은 인성 주변을 감싸고 있어 결코 없어질 리 없는 요소, 즉 원래부터 갖고 태어나 살면서 가다듬어지고 진화하는 '재능'에 가까운 것이지만 팩트와 논리에 장기간 매몰되어 있다 보면 비활성화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죠. 보고서는 생계의 문제이니 쓰지 않을 수 없지만 틈틈이 독서와 에세이 쓰기를 게을리 한다면 정말 헤어나오기 힘든 슬럼프의 심연에 빠져들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에세이 주제와 씨름하면서 한편으로는 2021년에 기본으로 깔고 갈 일들을 몇 가지 결정했습니다.

 

그 중 하나는 <Sitti Nurbaya> 번역입니다. 

원래 한새예스24문화원에서 번역하려 했던 것을 <판데르 베익호의 침몰>로 결정을 선회하면서 번역 준비만 해놓고 진행하지 못한 것인데 <판데르 베익호의 침몰> 번역을 도왔던 페페를 다시 고용해 책과 연관된 미낭까바우 문화를 조사하기 시작한지 이미 한 달이 지났습니다. 페페의 준비는 1월말이 되면 대충 끝난다고 하니 이 책의 본격적인 번역은 2월부터 시작해 아마 3~4개월 정도 하루에 일정 시간을 정해 천천히 번역할 예정입니다. 한새 측에서는 이런 고전 대신 현재 생존한 작가의 최근 작품을 추가 추천해 달라 하는데 그 새로운 번역 프로젝트가 진행된다해도 그건 올해 하반기나 내년 일이 되겠죠.

 

보다 분명하게 진행될 일은 양교수님과 함께 하는 <리콴유 평전>의 편저입니다.

<막스 하벨라르>의 경우처럼 내가 먼저 다양한 <리콴유> 전기나 평전에서 발췌한 충분한 양의 원문을 번역하면 양교수님이 그걸 감수, 수정하고 거기 당신의 글을 얹어 책을 완성하는 것이죠. 이 일은 일단 출판사의 동의까지 얻었으니 <시티 누르바야>의 번역보다 좀 더 빨리 진행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싱가폴에 원서들을 주문해 놓은 상태입니다.

 

짬이 나면 이미 써놓은 원고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내는 작업도 진행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라메디아에서 만화로 출판하기 위해 썼던 <디포네고로 왕자 전기>는 2018년에 스토리보드 형태가 아니라 청소년들이 읽을 소설형태로 만들었고 한번 다듬어 블로그에 연재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겐 전혀 관심이 없을 인도네시아 근대 영웅의 이야기를 출판해 줄 곳이 있을까요?

 

또 하나는 회심의 귀신이야기입니다.^^

그라메디아에서 출판한 Komik Horer Nusantara는 총 5권에서 3권으로 일단 마쳤지만 이건 13세 이상 청소년들을 위한 만화였고 이번엔 한국 독자들에게 인도네시아 귀신과 무속을 좀 더 재미있게 소개하는 책을 쓰고 싶습니다. 마침 데일리인도네시아에 격주로 귀신이야기를 쓰기로 했으니 이 기회에 이미 써놓은 현지 귀신과 무속에 대한 이야기를 짧은 글 50개 정도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려 합니다.

 

 

이 모든 일이 인도네시아에서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입니다.

이런 일들을 하려면 생업이 경제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풍랑을 만난 배가 화물을 바다에 버리듯 불필요한 활동, 괜히 힘만 드는 일들, 남들에게 놀아나는 호구짓은 이제 모두 그만둬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지난 연말 12시를 기해 몇몇 단체에 인사말을 남기고 탈퇴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탈퇴이유를 밝혔음에도 달리 받아들이는 이들은 어디든 있기 마련이죠. 말귀를 못알아듣는 사람들 말입니다.

 

2018년 초 문협을 나올 당시 그 사람들이 한 일은 내 블로그에 몰래 들어와 내가 어떤 글을 쓰는지 뒤져보고 저희들끼리 쑥더거리며 내 글을 문제삼고 글을 내려라, 사과문을 올려라 하며 떠들었습니다. 그것도 당사자인 나한테 직접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주변 사람들과 한인회 사람들을 둘러둘러서 말이죠. 전문용어로는 뒷담화. 그런 행태는 매번, 또 누구나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이유도 똑같습니다. 자긴 욕을 하고 돌아다니지만 상대방이 자기 욕 하는 건 절대 들을 수 없다는 것이죠. 역지사지가 안되는 겁니다. 

 

언니들 모습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혹시 그런 마음으로 또 기어들어와 이 글을 보신다면 얼마든지 날 비난하고 다니세요. 허락합니다.

한 두 번 겪는 일 아니니까요. 

 

 

그 사이 난 시간과 노력을 아껴 내 일을 할 거고요.

 

 

2021.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