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일단 굶지는 않을 듯...

beautician 2020. 8. 25. 13:23

 

 

지난 2월 말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둔 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당시 이미 한국은 대구발 코로나로 난리가 나 있던 상황이었고 이후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가 팬데믹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일거리가 줄어들고 수입이 주는 건 당연한 듯 보였다. 그 와중에서 전 직장은 퇴직금 지급을 미루면서 이미 회사를 그만 둔 사람에게 끈질기게 이런저런 일을 시키려 헀고 그나마 퇴직금이 당분간 유일한 수입이었던 상황에서 그런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세무서와 노동청 일들을 봐주고 kitas 비자를 내주고 여러 미팅에 참석해 통역도 해주고 업무조언도 해 주어야 했다. 전 직장 사장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것을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팬데믹 상화이 악화되고 인도네시아에 코로나 신규확진자들이 더욱 늘어나면서 절박해진 것도 사실이다. 퇴직금을 찔끔찔끔 주면서 부려먹으려는 전 직장은 차치하고 다음 직장을 잡거나 뭔가 돈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앞날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난 3월 경 콘진원 용역이 나왔을 때 거기 매진했었다. 연말까지 매월 한류 각 분야를 조사해 매월 2~3건의 보고서를 만들어야 하는 해당 용역은 필리핀과 싱가폴을 상시 커버해야 하고 베트남과 태국도 어느 정도 조사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연간 1억원 정도의 예산이면 가능할 듯 했고 내 영화-출판관련 통신원/코디테이터 경험이 분명 도움이 될 듯 했다. 그래서 입찰에 참여하고 인터뷰까지 했지만 탈락.... 아마도 앞전에 했던 다른 업체가 어드벤티지를 입었던 것 아닌가 싶다. 물론 하던 곳과 하는 게 콘진원 쪽에서도 안전했겠지.

 

비록 탈락했지만 이 과정을 통해 문체부에서 이런 식으로 배정된 예산이 적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나중에 그 규모가 거의 조 단위에 달한다는 것, 그것을 한국의 문화 체육단체 지원에 사용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사업 개발해 물건 팔아 이윤을 내보려 발버둥쳐 왔던 평생이 조금 우스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출판진흥원 코디네이터 계약이 연장되고 영진위에선 통신원에서 국제교류팀의 주재원으로 승격하면서 조사하고 보고서 쓰는 활동으로만 일단 먹고 살 기본수입을 깔 수 있게 되었다. 비록 1년이란 기한이 정해진 것이고 딱히 비자 등 지원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1~2년 연장 가능할 것도 같고 조사 및 보고는 내가 제일 잘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유명한 이슬람지도자였던 부야 함까(Buya Hamka)의 1940년대 소설 <반더베익호의 침몰>은 9월 말까지 번역을 마쳐야 한다. 소개해 준 사람의 사정, 예스24의 입장 등을 감안해 평소 받던 원고료의 4분의 1로 계약한 것인데 비록 몸값을 내렸다는 자괴감은 있지만 매우 서정적인 책이어서 번역하는 동안 뭔가 힐링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더욱이 이 일을 진행하면서 한국어과를 나오지 않고도 한국어를 기가 막히게 하는 인도네시아 아가씨 두 명을 알게 되고 그 중 한명을 고용해 오역방지를 위한 조사와 검토를 시켰다. 이게 완성되면 그간 냈던 책들에 비해 가장 뿌듯한 결과물이 될 것 같다.

 

영화 <반더베익호의 침몰>

 

그리고 번역비를 제대로 받아 이틀에 1500불 정도를 받는 번역용역, 3천 만원 이상의 예산이 책정된 설문조사 용역 등이 잇달아 들어왔다. 앞서 콘진원 입찰을 위해 구축했던 조직을 이번 설문조사 용역을 위해 대부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오피니언 뉴스 사장과 아시아 투데이 국제부 편집장도 카톡과 전화로 원고를 의뢰해 왔다.

 

특히 아시아 투데이 편집장의 8월 25일 전화는 매우 이례적이다. 작년 9~10월 이후 아시아 투데이에 거의 기사를 보내지 않고 있는 이유는 통신원임에도 기존 기자와 똑같이 모든 양식을 맞춰 기사를 송고해야 한다는 점에서, 관련 툴의 사용방법, 관례 등을 잘 모르는 통신원에겐 매우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보낸 원고를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3~4회 데스크에서 커트한 일이 있어 자신감이 크게 떨어진 상황이었다. 더욱이 영진위나 출판진흥원 일에 비해 기사 당 5만원인 원고료는 흥미를 잃게 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원고료는 기사 당 10만 원이었는데 말이다. 아무튼 편집장이 멀리 전화까지 해주었으니 다시 기사를 보내야 할 것 같다. 사실 내가 지난 1년 넘게 매일 현지 유력 신문 세 개를 컴퓨터에 띄워놓고 매일 모니터링 하고 있는 것은 작년 5월 아시아투데이 통신원 계약을 맺은 후 그쪽 일을 하면서 굳어진 버릇이다. 

 

 

그래서 요즘 오히려 일이 많이 늘어난 것을 피부로 느낀다.

가장 부담되는 것은 <반더베익호의 침몰>인데 시간이 빡빡하지만 위약금을 물지 않으려면 시간 내에 마쳐야 한다. 마감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겪는 것은 전업작가의 숙명이다.

 

그래서 2020년 8월, 난 일이 적어 걱정해야 하는 상황은 일단 벗어났다.

 

무역회사의 직원으로 처음 오게 되었던 인도네시아 땅에서 난 이제 전업작가가 되어 여기저기 조사보고서와 원고를 보내며 한편으로는 문체부, 노동부, 교육부 등의 용역을 수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명색이 소설가인데 소설은 언제 쓰나....?

 

 

2020.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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