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매일의 삶

입장 곤란하게 만드는 그 입

beautician 2020. 8. 27. 11:14

 

 

 

뻥이 좀 심한 정도의 사람은, 평생 그런 인간 한 두 명 만난 게 아니니 어떻게든 극복하고 처리 가능한 일이지만 세상 모든 일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래서 그렇지 못한 일조차 자기 이익에 부합하도록 조작하는 사람은 매우 곤란한 일을 일으킨다.

 

전 직장을 그만 둔 것이 지난 2월 말. 늦어도 4월 말까지 정산해 주어야 할 퇴직금 정산은 아직 지지부진한 가운데 회사일에 필요하다며 자꾸 노력동원을 요구한다. 어차피 직원들 모두 나갔고 관련 프로젝트를 세세히 알고 외국어로 브리핑 가능한 사람은 나뿐이니 여력이 된다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런 부탁을 하려고 퇴직금 정산을 끝까지 미루며 무기로, 빌미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보여 불쾌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최소한 그는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거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다.  문제는 스스로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사람이라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그건 자기 잘못이 아니라 신의 뜻이거나 천재지변이라 믿는다. 참 피곤한 일이다.

 

더욱 곤란한 것은 그가 남들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내 앞에서 이미 수 백 명에 대한 욕을 해댔지만 우리 주변에 그런 개차반의 인간들만 살고 있을 리 없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을 액면가의 20% 정도만 믿어주게 된다. 그것도 너무 많이 믿어주는 거 아닌가 싶다.

문제는 그가 나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얘기한다는 것이다.

 

"요즘 대사관에 출근한다면서요?"

"네?"

 

난 화들짝 놀랐다. 그게 무슨 소리? 내가 왜 대사관에 출근해?

 

"외무부에 취직하셨다고?"

"전에 그리 얘기하고서 왜 그래요?"

 

예의 J가 마치 내가 전에 한 말을 왜 번복하냐며 나서는데 눈을 찡긋거리며 입을 맞춰 달라고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이건 말을 맞춰줄 사안이 아니다. 나도 간혹 대사관 사람들을 만나곤 하는데 J가 한 거짓말이 그들 귀에라도 들어가면 내 꼴이 뭐가 될 것인가?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난 문체부 영화진흥위원회 쪽 일을 봐주게 되었지만 공무원이 된 건 아니고 그냥 민간인 신분으로 필요한 일을 지시받으면 수행해 주는 것 뿐이에요. 그래서 그 일환으로 일전에 주아세안 우리 대표부랑 미팅하러 간다고 말씀드린 적 있었죠. 그게 어떻게 내가 외무부 들어가서 대사관 출근하는 게 되요?"

 

내가 대사관 출근하냐고 물었던 사람이 황당하다는 표정 짓는 순간 J가 다시 덤벼든다.

 

"아니, 전에 한 말이랑 틀리네. 전엔 대사관에...."

"아니에요.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아니, 분명히 전에...."

"그렇게 말한 적 없다고요. 나 대사관 출근 안해요."

 

내가 조금이라도 굽히면 J는 십중팔구 내가 말을 잘못해서 자기가 잘못 이해했다는 식으로 몰고  갈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자기 입장을 세우려고 다른 사람 등 뒤에서 거짓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물론 부지기수다.

하지만 J처럼 면전에서 거짓말을 하면서 말을 맞춰달라고 신호보내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훨씬 많다.

 

 

 

2020.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