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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바퀴벌레 이야기

beautician 2022. 11. 20. 11:31

 

전직장을 그만두고 자카르타로 다시 돌아왔을 때의 일입니다.

 

서울로 철수하기 전 공장의 생산관리자였던 윤대리 집에 맡겨 두었던 몇 무더기의 짐들은 아직 돌려받을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우선 찾아 온 것이라곤 독립군이 된 후 첫 사무실이었던 짜꿍(Cakung)거리의 한 공장 구석방에 갖다 놓은 구식 386 컴퓨터 한 대와 딸린 컴퓨터 책상 하나가 전부였어요. 초창기 4개월 동안 묵었던 꼬스(Kost)라 부르는 현지 자취방도 너무 좁고 어수선해서 짐들을 갖다 놓을 환경이 아니었거든요.

 

그러던 중, 북부 자카르타 외곽의 따만 모데른(Taman Modern)이라는 주택단지는 비록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밀집한 자카르타 남부의 거대하고 호화로운 저택이나 아파트에 비교할 바 안되는 허름한 곳이었지만 그곳의 작은 주택 하나를 임대계약 하던 날, 나는 마치 세상을 얻은 듯 기뻤습니다. 작고 허술해 보였지만 제법 넓은 거실은 물론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간이 2층도 만들어져 있었고 당시 막 할부로 구매한 중고 다이하추 페로자 찝을 간신히 집어넣을 만한 주차공간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비로서 그동안 맡겨 놓았던 짐들을 모두 가져올 준비가 된 셈입니다.

 

그 짐이라는 게 달랑 가방 대여섯 개와 맥주 캔 한 박스.

집을 임차하면서 바로 구입한 식탁 하나, 침대 하나 외에는 텅텅 비어 있는 집에 짐들을 던져 놓으면서 흥겨운 맘에 미지근하기 이를 데 없는 맥주 캔 하나를 땄어요. 이 맥주는 원래 내가 자카르타에서 철수할 당시 자재업자인 심사장이 내 이삿짐에 자기 골프채를 넣어달라며 수고비 조로 주었던 것인데 어쩌다가 그때 포장도 뜯지도 못한 채 4개월을 묵혔던 것입니다.

 

미지근한 건 참을 만 했는데 목구멍을 반쯤 넘긴 맥주를 웩! 하고 마당에 토해버리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동안 냉장고에 넣지 않고 방치했던 맥주 맛이 완전히 가버렸던 것입니다. 다른 캔들도 따보았지만 맛간 건 마찬가지. 박스 채로 버려야 했던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번엔 가방들.

원래 이 가방들에는 버려도 상관없을 물건들만 들어 있어야 했습니다. 서울로 철수할 당시 아직 회사를 계속 다닐지, 당장 그만두고 자카르타로 돌아와 다른 길을 찾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던 시절이었으므로 내가 자카르타에 굳이 남겨 두었던 것들은 허름한 옷가지와 버리기 직전인 냄비, 식칼 등 약간의 주방도구, 낡은 이불보 같은 것들 뿐이었는데 남편의 장래를 너무 확실히 예감한 아내는 이 가방 저 가방에 이런 저런 물건들을 틈틈이 끼워 넣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어떤 가방에서는 김치 담글 때 쓰는 멸치액젓도 나왔습니다.

 

그 가방들 중 한 개의 지퍼를 열면서 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이거 뭐 컴컴해서 하나도 안보이네…”

 

토요일 오후 대낮이었는데도 가방 안이 시커멓게 보이는 건 필시 그림자 때문이라 생각했어요. 옆에서 일을 돕고 있던 릴리와 에피는 그들대로 다른 가방들을 풀면서 물건들을 분주하게 주방으로, 식탁 위로 옮기느라 내가 여는 가방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 보였습니다. 전 직장에서 알게 된 그 두 친구는 내 자카르타 사무실의 첫 직원들이기도 했습니다.

 

 

 

 

가방 안에서 확 풍겨 나오는 시큼한 냄새… 그리고 가방 안 그 시커먼 그림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으아악!!!!

 

생전 그렇게 놀란 적이 없었습니다.

막 가방 지퍼 끝까지 밀려 나온 것처럼 보인 그림자가 사실은 그 수를 셀 수도 없는 바퀴벌레 군단이었거든요. 몰려나오기 시작한 바퀴벌레 떼에 파묻혀 가방은 일순간 마치 사라진 듯 보일 정도였고 거실 타일 바닥에 착지한 바퀴벌레들은 마치 애당초 그렇게 하도록 철저히 사전훈련을 받은 것처럼 일제히 사방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꺄아악!!

 

비명 이중창.

릴리와 에피가 동시에 식탁 위로 뛰어 올라가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건 순식간의 일이었고 나까지 모양 빠지게 식탁 위로 뛰어 올라가자 이번에는 식탁 다리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삐걱거리며 함께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위에서 본 건 얼마 크지도 않은 그 가방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바퀴벌레 떼의 노도와 같은 질주였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내는 그 가방에 순창 고추장 한 통을 끼워 놓았던 것입니다.

 

‘저걸 잡아? 말아?

 

그런 생각을 0.1초 사이에 수백 번은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난 어느새 벗어 든 운동화를 두 손에 들고 번개처럼 식탁에서 뛰어내리면서 1초에 열 번 씩 초고속으로 타일바닥을 마구 두드리며 훑어 나가기 시작했고 뒤이어 두 여자도 손에 잡히는 크리넥스 통이며 전화번호부 등을 들고 바퀴벌레 부대와 격렬한 항전을 시작했습니다. 그건 정말 후세에 길이 남을 불꽃 튀는 사투였습니다.

 

전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어요. 수많은 바퀴벌레 시체들이 거실 타일바닥에 산산조각 나 널브러졌고 적지 않은 수가 내 발바닥이며 전화번호 표지에도 너덜거리며 붙어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바퀴벌레 병력들이 후일 게릴라전을 기약하며 도피 및 탈출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 길로 ‘바이곤(Baigon)’ ‘힛(HIT)’ 등 바퀴벌레 스프레이 세 통인가를 사와 집안 곳곳에 뿌려댄 끝에 상당수의 잔당들을 소탕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바퀴벌레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사방천지에 출몰하며 소름을 돋게 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바퀴벌레들은 한국의 동족들보다 그 크기가 몇 배는 더 큰 것 같은데 검지손가락 크기는 보통이고 손가락 두 배쯤 되는 놈들도 종종 눈에 띕니다. 더욱 소름 끼치는 것은 이 놈들은 지들이 메뚜기라고 착각하고 있는지 뻑 하면 날아다닌다는 사실이죠. 뭔가 중대한 임무라도 띈 것처럼 더듬이를 꼿꼿이 세운 심상찮은 표정으로 무슨 헬리콥터 소리 같은 걸 내면서 일직선으로 곧장 날아갑니다. 어디론가 날아가는 건 좋지만 나를 향해 날아드는 순간에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은 물론이고 뒷덜미가 쭈뼛하면서 머리털마저 곤두서 버리죠

 

바퀴벌레 가방을 연 이후로 그런 놈들이 매일 집안에 들끓었습니다. 가방을 집 밖에서 열었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후회가 막심했지만 이미 벌어져 버린 일을 다시 되돌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잘 때 머리맡에는 안경, 자명종시계, 스킨로션이 놓인 옆에 한동안 스프레이식 살충제 한 통을 늘 놓아 두곤 했어요. 대청소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가끔 침대를 옮겨 보면 그 밑에 수십 마리의 바퀴벌레 시체들이 우글거렸고 가끔은 옷장 속에서도, 한번은 자카르타에 딱 한 벌 있는 양복 주머니에서도 한 마리 나온 적이 있습니다.

 

옆집이 이사를 나가 빈집이 되면서 바퀴벌레들 상당수가 그 집으로 이주했는지 우리 집에 떼지어 출몰하는 일은 점점 잦아들었어요. 하지만 그래도 가방을 개봉한 후 1년쯤 지나는 동안 바퀴벌레들은 끊임없이 우리 집을 방문했는데 그러던 중 옛 의류팀 출신 동업자들 중 서울본사를 맡고 있던 박사장이 자카르타를 들렀습니다. 짠돌이 박사장이 내 집을 놔두고 호텔에 묵을 리 없었으므로 대청소를 하고 침대 밑, 옷장 속, 창고로 쓰던 2층 방까지 철저히 청소한 후 공항에서 박사장을 맞았어요.

 

그리고 그날 밤.

한 방에서 나는 1인용 침대에, 박사장은 별도의 매트리스에서 각각 잠을 청하려는데 낮익은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바스락 바스락…

 

 

 

이미 불이 꺼져 어두웠지만 난 이 소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퀴벌레가 천 위를 기어가고 있는 소리죠. 바퀴벌레랑 같이 살면 금방 그 소리에 익숙해집니다.  불을 켜면 순식간에 어디론가 도망을 가버릴 테니 이런 순간 바퀴벌레 소탕의 관건은 소리로 위치를 파악한 다음 번개같이 불을 켜고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도구를 사용해 0.5초 내에 소리가 난 지점을 있는 힘을 다해 가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바깥 쪽 어딘가가 아니라 침대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위치를 더욱 분명하게 파악하려고 은연 중에 운기하며 내공을 청각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의 진원지는 다른 곳도 아닌 바로 내 배게 밑. 소름이 돋았어요. 오후에 그렇게 열심히 청소를 하고 바퀴약도 쳐놨는데 바퀴벌레 군단은 내 침대 위까지 자객을 침투시킨 것입니다. 무서운 놈들…

 

침대 위에서 실눈을 뜨고 자객을 상대할 무기를 찾아 보았습니다. ! 골프채가 있었습니다. 침대 발치 방문 뒤쪽에 세워둔 골프가방. 얼마 전 청소할 때 골프가방 안에서 바퀴벌레 시체가 1개 중대는 나왔고 그 중엔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놈들이 있어 7번 아이언으로 거실에서 미친 듯이 스윙연습을 하기도 했습니다. 골프채에 맞는 순간 그 바퀴벌레는 좀 심한 상태로 산산조각 나고 말았죠. 미안하다 골프채야. 필드에도 못 데려가는 주제에 널 파리채 대용으로 쓰고 있으니…

 

어찌 생각해 보면 바퀴벌레들이 나한테 앙심을 먹고 자꾸 덤벼들며 자객까지 보내는 건 그 동안의 학살현장을 돌이켜 보거나 점점 가공의 도를 넘어 날로 창조적으로 선택되고 있는 내 신무기들을 생각해 보면 무리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침대에서 강시처럼 몸을 화들짝 일으켜 세우며 몸을 날려 골프가방에서 7번 아이언을 뽑아 들고 전등 스위치를 올리는 데까지 0.8. 그리고 베갯잇이 해어지도록 골프채로 두드려 패는 건 1. 잠들다가 화들짝 놀라 깬 박사장은 넋이 나간 듯 내게 뭐하느냐고 묻지도 못한 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베갯잇 밑을 들춰보니 아무것도 없었어요. 하지만 그 동안 내공이 쌓인 내 대 바퀴벌레 청각 레이다가 잘못된 적은 한번도 없었죠. 이번에는 침대 쿠션을 살짝 들춰보니, 아니나 다를까 바퀴 두 마리가 허둥지둥 퇴로를 찾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두 손으로 낑낑거리며 들어 올리던 무거운 침대 쿠션이 초긴장상태에서는 한 손으로 홱 제켜집니다. 이건 뭐 초능력입니다. 그 상태에서 그대로 회심의 일격! 그러나 골프채가 살짝 빗나가며 침대 나무가 퍽! 하며 먹어버리는 소리를 냅니다.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연습도 제대로 안한 주제에 지난 번 요행을 다시 바란 건 과욕이었죠. 더욱이 딱 한번 필드에 나가 확인해 본 내 골프실력이라는 게 남들은 재봉틀 박듯 직선으로 쭉쭉 나가는 골프코스에서는 나는 봉제공장 출신답게 촘촘하게 오바로쿠 치며 버벅거렸거든요.

 

위기를 벗어난 자객들은 민첩하게 침대 밑으로 급속 행군! 이번엔 무서운 힘으로 침대마저 한 손으로 홱 제키면서 다시 한번 골프채로 망치질! 하지만 바닥 타일만 힘없이 깨질 뿐 바퀴벌레 두 마리를 지그재그를 그리며 쏜살같이 빠져나갑니다.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박사장 방향! 이제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 박사장이 달려드는 바퀴벌레들을 향해 갑자기 베개를 집어 듭니다.

 

!

 

! 잡았어! 잡았어!

 

베개로 그 밑에 깔린 바퀴벌레들을 압박하면서 싱긋 웃고 있는 박사장 이마엔 땀방울마저 송글거립니다.

 

“잠깐 기다려! 놓지면 안돼!

 

이젠 어쩔 수 없습니다. 제 몫을 못한 7번 아이언을 엉망진창이 된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으면서 잠깐 3번 우드를 생각해 보지만 여전히 어림도 없고 결국 바퀴벌레들의 한 맺힌 전화번호부를 거실에서 들고 뛰어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 벌어진 잔학행위는 차마 눈뜨고 키보드 두드릴 수 없습니다….

 

자객들을 처형하고 나자 피로가 몰려 옵니다. 박사장은 여전히 상기된 표정이었고요.

하지만 이 때 또 들려오는 소리…

 

바스락…

 

? 바스락이라구? 그럴 리가? 자객들의 실패를 사전에 예측한 바퀴벌레 수뇌부가 정녕 제 2의 자객팀을 보낸 것일까요?

 

“또 있어. 가만히 있어 봐.

“아까 다 잡았잖아? 난 아무 소리도 안들리는데…?

 

이번에는 머리 위에서 나는 소립니다. 문득 고개를 드니 창문의 커튼 레일링 위에서 내밀었던 머리를 흠짓 도로 집어넣는 녀석이 보였어요.

 

“저 위야!!

 

내가 벌떡 일어서자 박사장도 엉겁결에 벌떡 일어나며 커튼 위를 바라봅니다. ! 그런데 이놈은 비행단 소속입니다. 단독으로 커튼 위에서 사태를 주시하던 이 놈은 상황의 불리함을 느꼈는지 내뺄 심산이지만 빨간 마후라답게 도주하기 전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었어요. 각질 날개 밑의 잠자리 날개 같은 것을 활짝 편 이놈은 순식간에 커튼 위에서 이륙하며 급강하, 저공비행을 감행해 왔습니다. 예의 그 헬리콥터 날아가는 소리를 내면서요.

 

“우와아아아아악!!!

 

이 비명은 박사장이 지른 것인데 나중에 그가 애써 변명한 말을 옮기자면 자기 코앞으로 날아들던 바퀴벌레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지만 내가 급히 몸을 돌리며 침대 위 7번 아이언을 다시 잡는 모습에 질겁했다고 합니다.

 

뒤로 엉거주춤 물러서던 박사장은 이불이 발에 꼬이면서 엉덩방아 찧고 뒤통수를 벽에 냅다 부딪히며 넘어져 버렸어요. 그런 그의 이마 위를 스치듯 지나친 바퀴벌레는 열린 문을 통해 거실의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 갔습니다. 작전성공에 신이 났는지 평소 매우 짧은 비행을 하는 녀석의 날갯짓 소리는 꽤 한참 동안이나 들렸던 것 같습니다. 난 난생처음 보는 바퀴벌레들의 조직적인 작전에 넋을 잃고 말았어요.

 

그날 가벼운 뇌진탕을 일으킨 박사장은 그 후 자카르타에 올 때마다 호텔에 가서 자는 아주 좋은 습관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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