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선의와 고문 사이, 그 미묘한 경계선 본문
지난 8월 말-9월 초 사이 오랜만에 방문한 한국에서 어머니 상을 치르며 새로이 느끼는 바가 여럿 있었습니다.
한국의 발전한 모습과 변화한 문화에 대한 생경함과 신비로움이 있었어요.
특히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와이파이가 연결되는 것이 정말 신기했습니다.
어머니 상을 치르며 가족관계라는 것, 형제간의 우애 같은 것들이 얼마나 쉽게 상처받고 부스러지는 것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마치 노년의 끝을 향해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처럼, 늘 강건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존재의 대책없는 나약함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상을 치른다는 것, 그 모든 복잡한 절차와 비용을 감수하는 것이 어머니의 시신, 가족의 유해를 이름도 모를 산 속 어딘가에 '매장'이란 허울로 버리고 오기 위해 요식행위, 사회적 동의를 얻기 위한 면죄부라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습니다.
나이가 90이 넘은 아버지가 여전히 비상한 머리와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역시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확증편향과 옹고집으로 인해 말도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아버지와 여러 대화를 나누면서 사실은 모든 감성이 그대로 살아있는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인간이란 존재'라는 게, 사실 당연한 일인데도 놀랍게 다가왔습니다. 글을 전혀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나빠지자 전화번호는 물론 은행 계좌번호까지 외어버리는 92세 노인의 기억력은 내 것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일주일 가량의 기간 동안 아버지도 나도 배우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에 매우 어색해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잠자리가 늘 편치 않았어요.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잠습관을 알았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잠을 이루기 힘들었던 아버지는 2년 넘게 수면제를 먹고서야 잠이 들었는데 첫 한 시간 정도는 소파에 기대어 앉아 주무시다가 나중에 약기운이 충분히 돌면 그제서야 침대에 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카르타에서 가져온 여러 일감을 가지고 밤새 랩톱을 켜놓고 낑낑대는 내 방문에 얼굴을 집어넣고 한참을 살피다가 가기를 여러 차례. 처음엔 아버지가 날 보고 있다는 걸 몰랐는데 나중에 그렇게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후로는 '다른 사람 같으면 기겁했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아들이니 놀라도 그저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내 처나 아이들, 조카들 특히 여자아이들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괴기스럽게 느껴질 정도의 장면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나 없이 아버지와 지내기 어렵다고 하던 말이 이해되었고 아버지 모시기 힘들어 했던 형수, 아예 고려도 하지 않는 제수 입장이 어느 정도 수긍되었습니다. 아들인 나는 견딜 수 있지만 내 아이들에게조차 강요하기 어려운 어떤 '곤란한 점'이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 너무 오래 치매 어머니를 독박간병 하면서 생긴 생활습관, 수면제로 인한 취침습관에 우린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게 아버지의 삶이었으니 다른 사람이 적응하고 말고 할 것이 절대 아니었는데 우리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노년을 쓸쓸히 혼자 살게 된 것입니다.
그나마 내 집에 모셔, 직접 같이 살진 못하지만 얼마든지 더럽히고 엉망을 만들어도 못된 집주인처럼 잔소리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아버지 역시 더 이상 매년 전세값 올려줘야 했던 상황에서 벗어난 것에 나름 만족스러워 합니다. 나름 윈-윈인 셈이죠.
그렇게 아버지와 지내면서 어머니 생전에 어떻게 지냈을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치매증상은 폭력이나 욕설을 동반하진 않았지만 마지막 몇 년은 고집이 세지고 식사를 거부하면서 아버지가 많이 애를 먹었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내게 모든 선의를 담아 편의를 봐주기 위해 밤에 방을 엿보고 이런저런 일들을 강요하고 강제했던 것처럼, 어머니에게도 분명 그랬을 거란 부분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할머니가 생각 났어요,
내가 자카르타에서 파산했을 때 돌아가신 할머니 장례식엔 결국 가지 못했는데 할머니도 말년에 치매로 고생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도 아버지가 (당시엔 치매가 발현되기 전인 어머니와 함께) 모셨지만 자꾸 문제를 일으키는 할머니를 윽박지르고 큰 소리를 내며 다그치던 것을 기억합니다. 가끔 형이 아버지와 그런 식으로 싸우는 걸 보면서, 아마도 매우 높은 확율로 아버지가 중증 치매로 접어든 어머니에게도 그렇게 대했을 거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아버지로서는 최선을 다한 선의였다 해도 말이죠.
스스로 노인이면서 치매노인인 어머니를 간병하는 아버지가 짠했지만 젊은 사람의 세심한 간호 대신 남편의 윽박지르는 식의 간병을 받던 어머니 역시 짠하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아버지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그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 간병을 단 하루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자식들과 며느리들은 아버지가 간병과정에서 어머니에게 했을 격한 행동과 감정, 말들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마지막 몇 개월간 매일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지냈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이 해야 할 바 이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순간, 처음 들었던 감정은 안도감이었어요.
어머니도 인생의 끝자락에서 폐렴과 치매로 인한 고통, 간병 과정에서 받아야 했던 부당한 처우를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 아버지도 더 이상 당신의 건강과 시간을 갉아넣는 방식의 간병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 그게 그토록 다행스럽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슬픔과 안도감이 전혀 별개의 감정이란 것도 그때 느꼈습니다. 어머니의 소천은 물론 슬픈 일이었지만 어머니를 위해서, 아버지를 위해서 한없는 안도감을 느꼈으니까요.
그 '선의의 이름을 한 폭력', 아버지가 절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어머니 입장에서 또는 그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면 우리도 느꼈을 '실제로 간병과 치료를 위한다지만 한편으로는 환자의 불안과 불만을 증폭시키는 어떤 행위'가 이제 완전히 끝났다는 것. 그래서 어머니가 비로소 진정한 안식에 들었다는 것.
난, 나 자신을위해 좀 더 폭넓은 종류의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가족이나 자녀들 그 누구도 내 죽음에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는 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말이죠
2022. 9. 28.
'매일의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랜만의 느긋한 환자생활 (0) | 2022.11.20 |
---|---|
바퀴벌레 이야기 (6) | 2022.11.20 |
시골사람들과 함께 탄 바틱에어 (0) | 2022.11.14 |
공항에서 또 한바탕 (0) | 2022.11.14 |
원고 가성비 문제 - 비싼 주방에서 떡볶이만 끓일 순 없다 (0) | 2022.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