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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3) 본문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3)
족자의 귀족들과 일반 민중들이 끝없이 밀려들어 디포네고로의 휘하에 들었으므로 깔리사카에서는 더이상 그들을 수용할 수 없어 뜨갈레죠를 나온지 불과 며칠 만에 왕자는 더 넓은 곳을 찾아 옮겨가야 했습니다. 가족과 병사들을 거느리고 꿀론쁘로고군 (Kabupaten Kulonprogo) 덱소 마을(Desa Dekso)에 도달한 디포네고로는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꺾어 반뚤시(Kota Bantul)로부터 서쪽으로 5킬로미터, 족자에서 남서쪽으로 약 9킬로미터쯤 떨어진 고아슬라롱 (Goa Selarong)이란 곳에 이르렀습니다. 고아(Goa)란 동굴이란 의미이므로 고아슬라롱은 '슬라롱 동굴'이라고 번역되지만 그 동굴이 있는 지역을 통칭하는 지명으로 쓰였습니다.
그의 아내들 중 그를 따라 나선 라덴 아유 렛나닝시(Raden Ayu Retnaningsih)와 하녀들은 고아 슬라롱 서쪽지역에 묵었습니다. 다른 부인들은 일찍 죽거나 전장에 따라나서지 않은 상태에서 라덴 아유 렛나닝시만이 자바 전쟁 초기부터 전쟁 마지막 날까지 디포네고로의 곁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그곳에 군대의 본진을 설치하고 죠요멍골로(Joyomenggolo), 바후유다 (Bahuyuda), 항고위끄로모(Hanggowikromo) 같은 지휘관들을 통해 군대 체계를 편성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족자 남쪽 게게르 마을(Desa Geger)과 끼둘(Kidul)산 지역, 빠라깐 마을(Desa Parakan), 꺼두(Kedu) 지역의 끔방아룸 마을(desa Kembangarum) 등 여러 지역에 화약공장들을 비밀리에 세우고 본격적인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자바 전쟁은1825년부터 1830년까지 5년간 자바땅 대부분을 휩쓸게 됩니다. 이를 디포네고로 전쟁이라고도 부르죠.
이 전쟁은 네덜란드가 동인도에서 예전엔 단 한번도 겪어본 적 없던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중부 자바 전부와 동부 자바 일부, 그리고 자바 북부해안지역 대부분을 포함한 자바섬 거의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규모 항전에 네덜라드 총독부는 물론 유럽의 본국도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치열하고도 연속적인 전투로 양쪽 모두 엄청난 인적, 물적피해를 감수해야 했는데 네덜란드측 문헌에 따르면 이 전쟁 중 약 20만 명 정도의 자바인 민간인들과 7천 명의 디포네고로군 장병들이 사망했고 네덜란드군도 8천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디포네고로군은 게릴라전에 능했고 매복공격으로 네덜란드군 병참로를 속속 차단했는데 정작 네덜란드군은 일관성 있는 전략이나 제대로 된 응전의 결기도 없었으므로 전쟁 초반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피해가 컸습니다.
자바전쟁은 자바의 구시대와 근대, 자바 역사와 인도네시아 역사를 나누는 경계선이라고도 합니다. 네덜란드의 전비와 군사, 경제적 역량을 완전히 바닥낼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된 이 전쟁이 고작 디포네고로 왕자의 조상 묘역을 파헤치려는 네덜란드와의 말뚝 분쟁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관점일 것입니다. 그 배경은 분명 훨씬 더 깊고 입체적일 터이죠.
사실상 자바전쟁은 1813년 술탄 하멩꾸부워노 3세가 화병으로 사망할 때 태동하여 그로부터 10년 후인 1823년 술탄 하멩꾸부워노 4세가 독살되던 시기에 이미 불붙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뜨갈레죠에서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해 사상과 정치, 국가, 문화, 군사전략과 세부 행동에 대한 기초를 완성했습니다. 하멩꾸부워노 4세 입누자롯이 처참하게 유명을 달리한 후 세 살짜리 술탄이 즉위해 족자 술탄국이 실질적 지도자 없이 표류할 때 지난 십 수년간 끄라톤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며 분명한 자리매김을 한 디포네고로 왕자를 유일한 희망이자 진정한 지도자로 여긴 백성들과 이슬람 지도자들, 귀족들이 속속모여든 것이죠. 그가 자바를 떠돌며 포교활동을 하던 이슬람 학자들과의 부단히 서신교환을 하고 인편을 통해 각 지방의 근황과 고통에 귀를 기울이면서 뜨갈레죠는 자바 전역의 연대와 소통을 상징하는 곳이 되었고 개혁과 독립을 희구하는 사람들 네트워크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자바 전역의 지역사회를 분석하고 민초들의 마음을 끌어당겼습니다. 그는 군대를 구성할 때에도 그렇게 수집된 각 지역별 특성을 전투능력의 데이터로 사용했습니다.
“마디운(Madiun) 사람들을 첫 번째 공세를 막아내는 데에 훌륭한 능력은 발휘하지만 그 후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소. 빠장(Pajang) 사람들은 용맹스럽기 그지없지만 역시 오래 버티기엔 능하지 않아요. 바글렌(bagelen) 사람들은 자기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질 경우 가장 요긴한 전력이 될 것이요. 하지만 타 지역 전투에 투입된다면 쉽게 전열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런데 마타람 사람들은 이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오. 그들은 강고히 적과 맞설 수 있고 전투의 우선순위를 알뿐 아니라 전쟁이 필연적으로 가져올 처참한 파국조차 초연히 견뎌낼 수 있소.”
그는 은밀하게 정보망을 구축해 활용했는데 이는 자바 전쟁을 수행하면서 적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에 오래동안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 지방총독과 부지사들은 물론 그들과 손잡은 끄라톤 왕궁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궁전뿐만 아니라 다누레죠 재상, 지방총독(주지사), 지방총독의 비서, 각 지방의 지방총독 보좌관(부지사), 네덜란드 식민정부 관료들 및 그들과 가까이 지내는 귀족들, 이슬람국가 건설에 대해 반대입장에 있는 사람들 집안에 하인이나 마구간지기 등을 포섭하거나 첩자를 들여보내 비밀리에 정보를 수집했던 것입니다. 그가 하멩꾸부워노 4세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통지받기 전에 미리 알고 끄라톤으로 달려갔던 것도 그런 정보망이 작동했던 것입니다.
그는 1825년 중반까지 쌀을 대량으로 구매해 군량미로 비축하기도 했으니 비밀리에 전쟁을 대비한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의 아버지 하멩꾸부워노 3세가 1813년 승하한 이후 12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동안 디포네고로 왕자가 지역적 기반을 공고히 다지며 용의주도하게 사회적, 군사적 역량을 키워오던 중 마침 말뚝 사건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자바 전쟁으로 비화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드디어 숙청의 빌미가 될 미끼를 물었다고 다누레죠 재상과 네덜란드 총독부가 쾌재를 부르던 그 순간 정작 디포네고로 왕자 자신은 자바땅을 되찾아 이슬람국가를 세우기 위해 그동안 준비한 모든 역량을 동원할 시기가 드디어 온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제4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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