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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1)

beautician 2023. 9. 11. 11:39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1)

 

 

4 자바전쟁의 시작

 

세상의 모든 왕가들이 그렇듯 어린 술탄 뒤에서 실권을 쥐려는 외척들과 정치가들은 섭정 자리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기 마련입니다. 제왕의 이름을 빌어 마음껏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죠

 

술탄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네덜란드 관리들의 전횡도 도를 넘기 시작했습니다. 궁전을 함부로 드나들던 그들이 궁전 여인들을 범하기까지 것입니다. 안에서 일하는 여인들이란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당시의 관념으로는 모두 술탄의 여인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지 몰라도 최소한 왕실에 속한 여인들, 엄밀히 말해 왕실의 재산이었으므로, 이민족이 궁에 들어와 궁안의 여인들과 함부로 잠자리를 한다는 것은 커다란 불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끄라톤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어야 마땅할 술탄이 아무 것도 모르는 살짜리 아이가 아니었다면 절대 벌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왕족과 귀족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스캔들이 터지고 부패와 독직이 만연했을 아니라 왕가의 비옥한 토지가 대단위로 유럽인들이나 중국인들에게 임대되면서 백성들의 고통이 가중되었지만 끄라톤이 끝내 외면으로 일관하자 민초들의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각종 세금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피폐해 갔는데 도시와 성읍 관문들의 운명권마저 중국인들에게 넘어가자 자바의 백성들은 길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통행세를 뜯겨야 했습니다.

 

결국 민심도 흉흉해지면서 하멩꾸부워노 5세의 즉위 직후인 1822 왕가를 비난하며 곳곳에서 소요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민란이 일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만한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바의 중국인들 https://nusantara.news/sejarah-dominasi-etnis-cina-di-indonesia/ https://likalulu.weebly.com/pecinan-di-bandung.html https://x.detik.com/detail/intermeso/20170126/Masakan-Cina-bukan-Hanya-Milik-Tionghoa/index.php

 

디포네고로 왕자는 술탄의 측근들로 이루어진 자문기구에 참여해 어린 술탄을 보위하고 왕정을 바로 세우려 했으나 끄라톤의 실권은 이미 다누레죠와 네덜란드 총독부에 완전히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네덜란드는 자바의 왕가를 쥐락펴락 하면서 게걸스러운 탐욕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고 왕국의 이권들을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국가 역량의 대부분을 소모한 후였으므로 당장의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전세계 식민지에서 강력한 조세정책을 시행해 결과적으로 현지 민초들이 기아선상에 나앉을 정도로 혹독하게 수탈했고 각종 사업과 판매권의 독점하여 재정수입을 극대화하려 했습니다.

 

당연히 자바와 수마트라 전역도 예외가 아니었고 세 살짜리 술탄이 다스리는 족자 왕국이야말로 가장 만만한 밥그릇이었겠죠. 더욱이 실질적인 섭정으로서 왕실의 왕자들과 귀족들을 압도하며 막강한 실권을 휘두르던 다누레죠 재상은 노골적으로 네덜란드의 편을 들었습니다. 가혹한 조세정책과 네덜란드의 독점행위가 왕실의 무력감, 다누레죠 재상의 부패와 맞물려, 그렇지 않아도 고통받고 있던 인도네시아 민중들의 목을 더욱 졸랐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822 머라피 화산(Gunung Merapi) 폭발하고 1824 콜레라가 창궐하면서 자바섬엔 더욱 혼란의 시대가 찾아왔고 민중들은 물밑에서 네덜란드에 대한 저항을 준비하고 있던 디포네고로에게 은연 기대와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족자에서 멀지 않은 머라삐 화산 http://www.mixanitouxronou.gr/to-pedi-tou-krakatoa-echi-ipsos-305-metron-gennithike-meta-tin-ekrixi-tou-fonikou-ifestio-stin-indonisia-pou-prokalese-tsounami-ipsous-43-metron-ke-exontose-36-chiliades-anthropous-pos-alla/

 

네덜란드 관료들과 현지 영주들의 필요에 따라 아무 댓가 없이  수시로 노동력을 차출당해야 했던 농부들은 자신의 논을 경작하지 못해 소득이 급격히 감소했고, 그 와중에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버린 세금을 내야 했으므로 그나마의 소득도 국가에 모두 빼앗겼습니다. 들판 가득 벼와 밀이 익어가는 풍요로운 광경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굶어 죽어가야 했던 그들의 원성은 당연히 드높았습니다.

 

한편 귀족들은 귀족들대로 재상과 총독부가 토지임대권을 독점해 자신의 영지에 속한 토지들에 대한 운영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게 되자 이로 인한 기회이익의 박탈은 왕실과 네덜란드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습니다. 귀족들은 민중의 고통보다 자신의 이권이 빼앗겼다는 사실 때문에 네덜란드에 이를 갈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이유는 각각 달랐지만 귀족들과 백성들 모두 네덜란드의 게걸스러움에 극도의 반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동인도인들이 맨 가마 위에 올라탄 네덜란드인들

 

디포네고로 왕자님이 어쩌면 자야바야 예언서가 말한 라투아딜(Ratu Adil) 현신인지도 몰라!”

 

자야바야의 예언 (배경의 문자는 자바어 알파벳)

 

쁘라렘방 자야바야(Pralembang Jayabaya) 예언서란 분열되어 있던 12세기의 중부 자바 끄디리(Kediri) 왕국을 재통일한 자야바야 대왕의 예언을 담은 것으로 당시 사람들은 자야바야가 힌두신 비슈누의 환생이라고 했다죠.

 

예언의 골자는 세상이 혼돈과 불의로 편만 하거나 거대한 위기가 닥쳤을 라투아딜(Ratu Adil – 공의의 여신 또는 정의로운 제왕) 강림해 세상을 평정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까우리빤 왕국 국왕 아이르랑가(Airlangga), 싱가가리 왕국 라자사 왕조 앙록(ken Angrok), 마자빠힛 왕국 시조 라덴 위자야(Raden Wijaya) 등이, 현대에 들어서서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선봉에 섰던 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와 수까르노 초대 대통령 같은 이들을 사람들은 라투 아딜의 현신이라 생각했습니다. 1820년대의 자바 백성들은 디포네고로 왕자가 바로 라투 아딜이라 믿었습니다.

 

사족이지만 훗날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맞았을 네덜란드 특수부대 대위 출신인 베스털링이란 영악한 자가 스스로 라투아딜을 자처하며 수까르노의 신생정부를 상대로 아프라 반란(Pembrontakan APRA) 일으킨 일도 있습니다.

 

요즘 매일 술탄 아궁 대왕의 무덤에 꾼띨아낙이 나타난다는군. 불길한 징조야.”

 

꾼띨아낙이란 출산과 관련해 목숨을 잃은 여인의 원귀로 대체로 우리 손말명이나 처녀귀신과 통합니다.

 

걱정하지 , 디포네고로 왕자님에게 니롤로키둘이 현신했데. 그분이야말로 마타람의 적통이란 뜻이지. 그분이 우리 왕국을 지켜내실 거야!”

 

마타람 왕국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술탄 아궁(Sultan Agung) 무덤에서 사람들이 보았다는 불길한 원귀(寃鬼) 이야기부터 옛날 마타람 왕국의 시조 권능왕 스노빠티가 그랬던 것처럼 디포네고로 왕자도 남쪽 바다 마물들의 여왕 니롤로키둘과 만났다는 소문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야기들이 당시 세간에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자바 사람들은 니롤로키둘이 스노빠티와 만난 마타람 왕국의 수호신이 되어 역대 술탄들의 영적 아내가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니롤로키둘이 디포네고로 왕자를 찾아왔다는 항간의 소문은 그가 진정한 마타람의 후예이자 족자 술탄국의 적통임을 시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니롤로키둘

 

한편 이슬람 울라마 집단은 이슬람의 가르침에 반하는 서구의 관습이 날로 퍼져나가며 자바의 민속과 이슬람의 가르침을 타락시키는 것에 우려를 표했습니다. 그들은 민중들에게 이슬람에 입각한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고 도덕적 타락의 근원인 네덜란드를 속히 퇴치해야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디포네고로 왕자야말로  일을 해낼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마타람 까르타수라 왕국 초창기인 1647 폭군 아망꾸랏 1세가 울라마들과 이슬람 학자들을 무더기로 학살하면서 왕가와 이슬람 울라마들 사이엔 오랜 불신과 증오의 앙금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왕족이면서도 울라마이기도 디포네고로 왕자가 200년만에 간극을 극복하며 왕가와 이슬람 사회 양쪽을 모두 아우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슬람 학자와 종교 지도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 모았고 이슬람 신앙을 바탕으로  저항의 결기가 디포네고로 왕자를 통해 투영되면서 자바 전쟁의 불씨를 당깁니다.

 

네덜란드가 점령하다시피 한 끄라톤 궁전에서 온갖 권모술수와 비도덕적 행위들이 횡행하고 네덜란드 민간사업자들에 대한 왕국 토지의 대규모 임대로 인한 네덜란드의 장악력 강화, 귀족들과 네덜란드 지주들을 위해 아무 보상도 없는 강제노역에 자주 동원되어야 했던 백성들, 세금 징수를 맡은 화교들의 횡포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며 다가올 자바전쟁의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들려오는 소문과 전해 내려오는 전설, 그리고 이슬람 사회의 지지 등을 보고 들으며, 백성들 사이에서는 오직 디포네고로 왕자만이 족자 술탄국과 자바의 이슬랑 왕국들이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유일한 인물이라는 기대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