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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2) 본문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12)
그러던 중1825년 7월 중순, 네덜란드는 족자에서 문띨란(Muntilan)을 거쳐 마글랑까지 이어지는 도로계획의 원래 경로를 조금 틀어 굳이 뜨갈레죠(Tegalejo)를 통과하도록 수정하면서 자바전쟁의 직접적 단초를 제공합니다. 그렇게 수정된 도로공사가 하멩꾸부워노 외가의 조상 묘소들을 지나게 된 것입니다.
비록 매일 등청하진 않았지만 당시 술탄 하멩꾸부워노 5세의 숙부이자 가장 중요한 후견인 중 한 명인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사전 언질은 물론 양해와 허락을 받아야 마땅했으나 그런 절차를 깡그리 무시한 것은 다누레죠 4세 재상의 은밀한 입김이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었죠. 다누레죠 재상이 공사강행을 위해 그 땅에 경계표시 말뚝을 박으려 하자 그제서야 조상들의 묘역이 파헤쳐지게 되었음을 알게 된 디포네고로 왕자가 크게 격분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저 놈들이 우리 묘역에 박은 말뚝들을 모조리 뽑아버려라!”
디포네고로 왕자는 수하들을 시켜 그 말뚝들을 모두 뽑아 불태워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다누레죠 재상이 노리던 반응이었죠.
당시 뜨갈레죠 저택과 그 일대에는 디포네고로 왕자 주변으로 모여드는 이슬람 학자들과 청년들 숫자가 무섭게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숫자가 여단급 병력규모에 가까워지자 지척의 끄라톤 궁전을 장악한 다누레죠 재상은 물론 브레더부르크 요새의 네덜란드군에게도 적잖은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들로서는 어떻게든 빌미를 만들어 디포네고로 왕자를 제거하거나 최소한 그의 힘을 크게 위축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다누레죠 재상이 도로계획의 방향을 뜨갈레죠로 틀어 디포네고로 왕자를 격분시키는 묘수를 생각해 냈던 것입니다. 조상의 묘소가 파헤쳐질 것을 알고도 가만 있을 후손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그 미끼를 덥썩 물고 만 것이죠.
“더 이상 디포네고로 왕자가 제멋대로 구는 꼴을 봐줄 수 없소. 이번 도로공사는 왕국을 위해서도 우리 네덜란드를 위해서도 더 없이 중요한 일이요. 그런데 그가 말뚝 박는 인부들을 때리고 우리 측량사들을 쫒아 냈으니 이건 반역행위와 다름없지 않소? 당신이 디포네고로 왕자를 끌고와 사과를 시킨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왕족이든 귀족이든 상관치 않고 뜨갈레죠로 쳐들어가 그곳을 초토화시키고 말겠소!”
네덜란드 지방청사에서 다누레죠 재상을 뒤에 세운 채 목에 핏대를 세우던 스미사르트 주지사 /지방총독(Resident Smissaert)은 디포네고로 왕자의 삼촌 망꾸부미 왕자(Pangeran Mangkubumi)에게 노발대발하며 디포네고로 왕자를 잡아들이라고 악을 써댔습니다. 물론 망꾸부미 왕자가 이 사태를 잘 무마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총독부와 다누레죠 재상은 최소한 아무런 중재나 절충도 없이 디포네고로 왕자를 무조건 공격했다는 세간의 비난을 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내 말을 들을 녀석은 아니지만 한번 얘기는 해 보겠소.”
하멩꾸부워노 3세가 죽고, 그보다 앞서 그 형제인 망꾸디닝랏 왕자, 머르타사나 왕자가 그들의 아버지 하멩꾸부워노 2세와 함께 말레이 반도 삐낭섬으로 유배된 후 뒤에 남은 형제들의 맏형이 된 망꾸부미 왕자는 자기 수하 백수십 명을 무장시켜 뜨갈레죠로 향하했습니다. 그 군세가 자못 위풍당당했으므로 마치 디포네고로 왕자가 말을 듣지 않으면 망꾸부미 왕자가 일전이라도 불사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렇다고 나는 너희들 말 들을 놈 같더냐?’
그도 하멩꾸부워노 2세의 반골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은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뜨갈레죠에서 조카를 만난 망꾸부미 왕자는 디포네고로 왕자를 끄라톤으로 데려가긴커녕 그와 의기투합하여 함께 네덜란드와 맞서 싸우기로 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삼촌 망꾸부미 왕자를 얼싸안던 그때에 망구부미의 전향을 알게 된 다누레죠와 네덜란드 측은 속은 것에 분개하며 직접 군대를 풀었습니다. 그것이 1825년 7월 21일의 일입니다.
네덜란드군이 뜨갈레죠로 들어가는 길을 폐쇄했을 때 디포네고로의 저택에는 망꾸부미 왕자가 데려온 사람들까지 포함해 1,500명의 지지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네덜란드군이 디포네고로 왕자를 잡으러 들이닥칠 것이란 소문에 동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디포네고로 왕자가 그들 앞에 나섰고 망꾸부미 왕자가 그 곁에 섰습니다.
“이런 날이 올 것을 몰랐던 것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이곳은 네덜란드 기병대와 전투를 하기엔 매우 불리한 곳이니 시종들이 저들을 막는 동안 주력은 뜨갈레죠가 완전히 포위되기 전에 여기 망꾸부미 왕자님을 따라 빠져나가 추격을 뿌리친 후 후방에서 집결해야 한다.”
스미사르트 주지사는 디포네고로 왕자가 망꾸부미 왕자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간주하고 부지사 쉐발리에(Chevallier)를 시켜 부르데부르크 요새의 기병대를 지휘해 왕자의 저택을 포위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뜨갈레죠의 초입에서부터 그들은 디포네고로 지지자들의 강력한 저항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남쪽과 동쪽으로부터 밀고 들어가는 네덜란드군은 저항군이 마치 잘 조련된 군대처럼 공략하기 어려운 방어선을 만들고 조직적으로 조금씩 물러서는 전술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저한 화력의 차이 때문에 디포네고로 시종들의 전열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적잖은 인명피해를 교환하는 사투를 벌인 끝에 네덜란드군은 방어선을 뛰어넘었고, 이후 거의 일방적으로 짓쳐 들어가 저택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디포네고로 왕자와 망꾸부미 왕자는 대부분의 수하들을 거느리고 이미 그곳을 탈출한 후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격분한 쉐발리에 부지사는 디포네고로 왕자의 저택, 즉 과거 하긍 태후의 거처를 완전히 불살라 버렸습니다.
이 사건은 그 후 5년간 지속되는 자바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었습니다. 습격을 당해 밀려난 셈인 디포네고로 왕자가 이 사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리 없는 일이었습니다.
“Sadumuk bathuk, sanyari bumi ditohi tekan pati!” (사드묵 바툭, 산야리 부미 디토히 뜨깐 빠띠!)
뜨갈레죠를 빠져나가기 직전 디포네고로 왕자가 지지자들에게 외친 이 자바어 문장은 그후 디포네고로군의 모토가 되었는데 ‘머리를 한번 건드리는 손가락에도, 단 한 치의 땅을 뺏으려는 누군가의 시도에도 목숨을 바쳐 저항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도발과 공격을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철철 흘러 넘치는 외침이었죠.
네덜라드군의 공격 반대방향인 북쪽으로 빠져나간 디포네고로 일행은 네덜란드의 포위망을 벗어나 일단 깔리사카(Kalisaka)에 도착했습니다. 자바 전쟁의 첫 전투라 할 만한 뜨갈레죠 전투는 결코 디포네고로 왕자의 승리라고는 할 수 없는 결과였지만 이 사건 소식이 자바 전역에 빠르게 전파되었고 네덜란드에 대한 공개적 저항을 시작한 왕자의 행동은 백성들의 연민과 응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추종자들이 깔리사카로 몰려 들었습니다.
한편 왕족들과 귀족들도 디포네고로 왕자에 대한 지지를 밝히거나 직접 병력을 데리고 모여들었는데 수라카르타의 빠꾸부워노 6세도 은밀한 지지를 보냈고 가가딴(Gagartan)군의 영주 라덴 뚜먼궁 쁘라위로디자야(Raden Tumenggung Prawirodijaya), 아디네고로 왕자(pangeran Adinegoro), 빠눌라르 왕자(Pangeran Panular), 아디위노토 수리요디뿌로(Adiwinoto Suryodipuro), 롱고 왕자(Pangeran Ronggo), 수렝로고 왕자(Pangeran Surenglogo) 등 내로라하는 왕족들과 귀족들도 디포네고로 왕자 편에 섰습니다.
자바 전쟁에서 디포네고로가 승기를 잡던 시기에 궁성의 왕자 29명 중 15명, 족자 지역 태수와 군수들 88명 중 41명이 그를 정치적, 군사적으로 지지했으므로 실제로 족자 술탄국의 왕가와 귀족 절반이 디포네고로 왕자의 지휘를 받으며 네덜란드군과 맞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왕자 전하! 문안 드리옵니다.”
이슬람 학자 한 명이 이슬람기숙학교 쁘산트렌 학생 복장을 한 수백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나 깔리사카에 나타나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허리를 굽혔습니다.
“무슬림 아니냐? 정말 반갑구나!”
오래 전 뜨갈레죠에서 만났던 천재소년 무슬림 모하마드 칼리파는 수라카르타에서 저명한 이슬람 선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울라마 끼아이 모조(Kyai Mojo)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얻어 수라카르타의 수수후난 빠꾸부워노 6세의 측근이 되었고 일무 까누라간(Ilmu Kanuragan)이라는 신비로운 능력을 익혀 전장에서 목소리 하나로 적들을 격파하는, 일견 사자후(獅子吼)와 같은 공력을 과시했다고 합니다.
그의 이름은 수라카르타는 물론, 족자 술탄국 구석구석과 망꾸느가라안 봉국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와 망꾸부미 왕자는 크게 반가워하며 그를 얼싸안았습니다. 그의 합류 자체가 전력에 큰 보탬이 되었을 뿐더러 그의 배후 빠꾸부워노 6세의 존재가 의미하는 바는 더욱 컸습니다. 그것은 네덜란드의 압박 속에서 대외적으로는 네덜란드에 동조하는 듯한 입장을 보이던 수라카르타가 사실은 디포네고로의 저항을 내심 지지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끼아이 모조는 이후 전장에서 디포네고로군의 전략사령관이자 이슬람 큰 선생으로서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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