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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아이를랑가의 까후리빤 왕국

beautician 2022. 4. 5. 11:41

까후리빤 왕국(Kerajaan Kahuripan)

 

까후리빤 왕국

 

까후리빤은 아이를랑가가 1009년 동부자바에 세운 왕국으로 1006년 멸망한 머당 왕국(Kerajaan Medang)의 후신 격이다.

 

머당 왕국의 마지막 왕은 다르마왕사 떠구(Dharmawangsa Teguh)로 스리위자야 왕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인물이다. 1006년 스리위자야 일족인 르와람(Lwaram)의 우라와리 왕(Raja Wurawari)이 머당 왕국의 수도 와딴(Watan)을 공격했다. 성대한 잔치가 벌어지던 틈을 탄 기습이었다. 여기서 다르마왕사 떠구 왕은 죽고 조카인 아이를랑가는 간신히 공격을 피해 살아남았다.

 

아이를랑가는 다르마왕사 떠구의 여동생 마헨드라다타(Mahendradatta)와 발리의 왕 우다야나(Udayana) 부부 사이의 아들이었다. 그가 도주하는 도안 나로타마(Narotama)라는 시종이 늘 그의 곁을 지켰다. 아이를랑가는 이 시기부터 산과 정글 속에서 명상수련을 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1009년 머당 왕국 사람들이 일단의 대표단을 꾸려 아이를랑가에게 가 그가 나서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머당 왕국 수도 와딴은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으므로 아이를랑가는 뻐낭궁안 산(Gunung Penanggungan) 가까이에 도시를 건설해 그곳에 와딴이란 이름을 붙였다.

 

처음 아이를랑가가 왕국이라 칭하여 다스린 곳은 뻐낭궁안 산과 그 일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머당 왕국에 속해있던 지역들이 그 사이 독립해 나갔기 때문이었다. 1023년 인도의 콜라만달라 왕 라젠드라 콜라데와(Rajendra Coladewa)에 의해 스리위자야 왕국이 멸망하자 아이를랑가는 왕사 이사야(Wangsa Isyana) 왕국의 영광을 재건하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아이를랑가는 끝없이 전쟁을 벌여 동부자바의 여러 왕국들을 하나씩 복속시켰다. 그러다가 1032년 거인 같은 힘을 발휘하는 디아 뚤로동(Dyah Tulodong)이라는 걸출한 여성 왕의 공격으로 수도 와딴 마스(Watan Mas)를 잃었다. 디야 뚤로동은 현재 동부자바 뚤룽아궁(Tulungagung) 지역에 존재했던 로도용 왕국(Kerajaan Lodoyong)을 다스리는 왕이었다. 아이를랑가 왕의 부대가 디아 뚤로동의 부대와 전투를 벌이다 패배한 일은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이들의 충돌은 당시 로도용 왕국 근처에 영향력을 끼치며 영토를 확장하던 아이를랑가의 세력을 디야 뚤로동이 저지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디야 뚤로동은 이 전투를 치르면서 엄선한 여성전사들로만 이루어진 별동대를 거느리고 전선을 누볐다. 그녀는 그 부대로 아이를랑가의 부대를 밀어붙여 버낭궁안 산 근처의 와딴 마스 왕국(kerajaan Watan Mas)에서 빠따깐(Patakan-현재의 동부자바 라몽안 군 삼벵 Sambeng) 지역까지 패퇴시켰다. 1031년에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불과 1년 후인 1032년 말에 디야 뚤로동운 아이를랑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패배하게 된다. 아이를랑가는 군사를 움직여 남쪽으로 로도용 왕국을 압박했다. 디야 뚤로동이 패한 후 로도용 왕국의 우라와리 왕 역시 쓰러져 아이를랑가는 동부 자바 거의 전체를 석권했다.

 

그런 후 아이를랑가는 현재의 시도아르조 지역을 수도로 삼아 까후리빤(Kahuripan)이라 이름지었고 이후 아이를랑가가 다스리는 왕국의 이름이 되었다. 이것은 싱가사리(Singhasari)가 수도 이름일 뿐이었지만 나중에 꺼르타나가라(Kertanagara)가 다스리는 왕국의 이름으로 사용된 것과 같은 경우다.

 

빰와탄 비문과 스랏 짤론 아랑(Serat Calon Arang) 문서에 따르면 이후 아이를랑가 왕국은 1042년 수도를 다하(Daha)로 옮겼다.

 

 

장갈라 왕국 수도 까후리빤

아이를랑가의 치세 말년에 두 아들이 왕좌를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원래 태자는 상가라마위자야 뚱가데위(Sanggramawijaya Tunggadewi) 였으나 그는 왕위보다는 수행과 명상을 선택했다.

 

1045년 11월, 왕국의 책사 음뿌 바라다(Mpu Barada)의 조언에 따라 아이를랑가는 부득이 왕국을 둘로 나누기로 한다. 다하를 수로도 하는 서쪽의 까디리(Kadiri)는 스리 사마라위자야(Sri Samarawijaya)에게, 까후리빤을 수도로 하는 동쪽의 장갈라(Janggala)는 마판지 가라사칸(Mapanji Garasakan)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아이를랑가는 그런 후 왕좌에서 내려와 1049년 죽을 때까지 명상을 하며 수행생활을 했다.

 

 

마자빠힛 역사 속의 까후리빤 왕국

까후리빤이란 이름이 마자빠힛 왕국 시대인 1293년에 다시 등장한다. 마자빠힛을 건국한 라덴 위자야는 옛날 아이를랑가가 세운 두 개의 왕국에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까디리 왕국과 장갈라 왕국은 수도의 이름을 따 다하 왕국, 까후리빤 왕국(또는 지와나 Jiwana 왕국)이라고도 불렸는데 라덴 위자야는 이들 두 왕국을 자신의 바로 아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켰다. 그래서 마자빠힛은 중앙, 다하는 서쪽, 까후리빤은 동쪽, 이런 식의 구성이 되었다.

 

빠라라톤(Pararaton – 왕들의 책, 열왕기)에는 까후리빤의 바타라(재상-고문), 줄여서 브레 까후리빤(Bhre Kahuripan)을 맡았던 인물들의 이름이 몇 개 등장한다. 제일 먼저 나오는 이름은 뜨리부와나 뚱가데위 뿌뜨리(Tribhuwana Tunggadewi)로 라덴 위자야의 딸이다. 1319년 가자마다가 라 꾸띠(Ra Kuti)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빠띠 까후리빤(patih Kahuripan)이란 직명을 가진 재상이 되어 정사에 참여했다.

 

하얌 우룩(Hayam Wuruk)도 한때 유와라자(yuwaraja)라는 직책을 가졌는데 이는 까후리빤 왕을 뜻하는 지와나라자야쁘라티스타(Jiwanarajyapratistha)라는 직을 겸했다.

 

브레 까후리빤 직을 맡았던 뜨리부와나 뚱가데위가 죽고서 그 뒤를 손자인 스라와르다니(Surawardhani)가 맡았고 이후 그 아들이 랏나빵까자(Ratnapangkaja)가 물려받았다. 그 다음은 부인 수히타(Suhita)의 조카인 라자사와르다나(Rajasawardhana)가 되었고 라자사와르다나가 마자마힛의 국왕의 자리에 오르자 장남인 사마라위자야(Samarawijaya)가 브레 까후리빤을 맡았다.

 

즉, 까후리빤이란 명칭은 마자빠힛 왕국에서 매우 고귀한 직책을 뜻하는 대명사와도 같았다.

 

참조:

https://id.wikipedia.org/wiki/Kerajaan_Kahuri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