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이름은 본질을 말해주지 않는다. 본문
오래 전 한화그룹을 떠난 후 친구들과 동업하기도 하고 몇몇 회사의 직원으로 들어가 일을 봐주면서 지니게 된 내 직책 직함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다.
외국회사 다니는 이들의 명함엔 이런 직책들이 써 있습니다
President director
Director
General manager
Manager
Executive
등등.
주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이죠. 업무의 본질...그것을 직책명으로 한 것입니다.
한국회사들의 직함은 주로 이런 것들이죠.
사원 - 주임 - 계장 - 대리 - 과장 - 차장 - 부장 - 실장 - 팀장 - 사업본부장 - 이사 - 상무 - 전부 - 부사장 - 사장
이건 맡은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니라 조직 내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말해주는 좌표같은 것입니다.
단지 언젠가 누군가가 General Manager는 부장, Manager는 과장이라고 번역한 이후로 마치 저 영어들과 한글 직책들이 뭔가 유기적, 필연적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믿게 되었다는 것이 문제죠. 사실은 아무 관련도 없는데 말입니다.
한국회사들을 보면 대기업, 중견기업들을 제외한 일반 작은 회사들, 영세기업들도 모두 과장, 차장, 부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회사는 사원들 한 명도 없는데 모든 직원들이 이사급 이상의 직함을 갖습니다. 그중 누군가는 (사업)본부장을 맡고 있기도 한데 그건 그가 뭔가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업본부를 관장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그런 직책명일 주었졌을 뿐이기 쉽습니다.
처음 독립했을 때 새가슴이었던 우리 동업자들은 어린 나이에 임원급 직책을 가지고 나가면 거래선들에게 빈축을 살 거라면서 모두 과장 - 대리 급의 직함을 스스로 달았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실소를 지었던 건, 최소한 과장이라면 자기가 맡은 과, 즉 경리과든 수출과든 인사과든 뭔가 있어야 하는데 맡은 과도 없는 과장이란 직책이 너무나 웃겼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원-주임-계장으로 시작되는 저 위의 한국식 직책은 사실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뜻하는 게 아니라 그의 계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군대로 치면 소대장 - 중대장 - 대대장 - 연대장 - 여단장 - 사단장 - 군단장 - 군사령관 등으로 이어져 그가 무엇을 하는지(어떤 규모의 부대를 지휘하는지)를 얘기하는 업무의 본질이 아니라 소위- 중위 - 대위-소령-중령-대령 - 준장-소장-중장-대장 등의 계급을 말하는 개념이라는 겁니다. 그 계급개념에 과의 장, 부서의 장, 사업본부의 장이란 식의 이름을 붙였다는 건 넌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면 자의식의 발로, 또는 내재된 열등감의 표시였거나요.
내가 만약 다시 사업을 하게 되더라도 부장-과장 같은 직책을 다시는 쓰지 않겠습니다. 과거 미용사업을 할 때에도 우리 직원은 모두 마케팅 담당이었고 그 대장에게 필드캡틴이란 직함을 주었죠. 이제 혹시라도 큰 규모의 조직을 꾸린다면 맡은 책무를 나타내는 직함 옆에 계급, 즉 급여수준 결정의 기준이 되는 표시를 해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경리 2호(봉), 인사 8호(봉), 대관업무 7호(봉), 운전 22호(봉) 같이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직장을 옮기는 것을 보면서 싱가폴 기업사회에선 타이틀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한국도, 세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팀장, 시니어, 리더 등의 직함이 붙어야만 그 다음 단계로 점프하는 것이 더욱 용이하다는 것이죠. 만약 아무런 직함도 없다면 점프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그건 교회를 예로 들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난 누가 나에게 '집사'라 부르는 것을 간단히 용납하거나 그러려니 하지 않습니다.다. 적극적으로 '난 집사 아닙니다'라고 꼭 말해주곤 합니다. 그리고 난 집사가 아니므로 그 다음 단계인 권사나, 안수집사, 장로 등으로 진행해 나갈 수도 없습니다. 원하지도 않지만 아무리 능력있는 자라도 어느 일정한 직급에 있어야만 그 상위 직급으로 이동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기업들은 맡은 과가 없는 과장, 맡은 부서가 없는 부장들을 그토록 양산해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직함을 가진 자에게 나름 자부심을 주고 미래 다음 단계로 진행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것이기 때문이겠죠.
이 세상에 직함만큼 인플레이션이 심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구멍가게 주인이 CEO란 이름을 달고 남의 직장에 이름만 걸고 출근하는 인간들이 전부, 부사장 명함을 품고 다니는 일상이 우리 주변에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2019.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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