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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나이들면 정신이 퇴락할까?

beautician 2020. 9. 24. 12:10

 

나이들면 정신이 퇴락할까?

 

 

 

 

 

 

예전엔 외지에 출장가면 호텔 프론트에 모닝콜을 요청해 놓곤 했습니다. 자명종은 출장가방에 넣기 너무 크고 핸드폰도 나오기 전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의 일입니다. 자명종 기능이 탑재된 다양한 핸드폰을 몇 개씩 가지고 다니는 요즘 모닝콜은 완전히 옛날 얘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요청하지도 않은 모닝콜을 보내주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새벽 일찍 어떤 분은 시를 보내주고 어떤 분은 성경귀절을 보내줍니다. 그것이 선의를 기초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쾌적하고 의미있는 하루를 맞으라는 기원이죠. 물론 세상의 모든 기도가 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기원 역시 역효과를 내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렇게 밀려오는 메시지들이 핸드폰 메모리를 한없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잡아먹는 분명한 공해이지만 그 메시지들이  새삼 마음에 뜨겁게 와닿는 어떤 날도 있어 그 선의가 고맙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깜빡 까먹고 핸드폰 소리를 죽여놓지 않으면 매일 새벽잠을 깨워놓고야 마는 대 여섯 명의 짜증나는 발신자들의 선의만큼은 그래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꼭 모닝콜 성격은 아니지만 동문회나 정보공유성격의 단톡방에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주장하는 이들도 사악한 저의를 가지고 있을 리 없습니다. 그들이 올린 글을 읽고 동의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불쾌해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차치하고서 말입니다. 주로 50대 이상인 그분들은 이념적 사안을 개인적 분노로(또는 돈벌이로) 치환해 인터넷 게시판 댓글창에 욕설을 싸지르는 저열한 키보드워리어들과는 차원을 달리 합니다. 때로는 존경받을 만한 지위에서 여러 업적을 남긴 분들이 점잖은 말투로 정치적 반대진영에 있는 이들을 폄하하고 바보취급하는 건 그들이 꼭 전투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당신에게 그토록 명명백백한 이념에 다른 모든 이들도 동의할 것이란 확신하기 때문이죠. 물론 다른 생각 가진 사람도 있다는 걸 그들이 모를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생각을 고쳐먹고 올바른 자기 생각에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그래서 20대 30대 후배들이 들어와 있는 동문회 단톡방에서 태극기 집회 참석 인증사진을 올리고 그래서 후배들이 우수수 단톡방에서 나가 버리든 말든 또래의 다른 동문들이 '선배님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이십니다"라는 타이핑을 시전하는 것이고 갓 전역한 후배들이 잔뜩 포진한 밀리터리 아카데미 출신 단톡방에 노인들 카톡방에 돌아다니는 문정부가 빨갱이라는 가짜뉴스들을 퍼나르는 것이죠.

 

 

 

 

 

 

바로 그 지점에서 선배들, 원로들의 태도가 지하철 1호선에 스피커와 깃발을 장착하고 나와 승객들의 평온을 누릴 권리를 방해하며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기독교 광신자들과 맥락이 닿습니다. 누구나 각각 다른 생각을 갖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 문제입니다. 그게 종교든, 이념이든 말입니다.

 

도대체 왜들 그러는 걸까요? 하태경 의원이 손학규 바른미래 대표에게 말한 것처럼 나이들면 정신이 퇴락하기 때문일까요? 

 

그건 기본적으로 사고의 유연성 문제입니다. 

생각이 유연하다는 건 박쥐처럼 상황에 따라 신념과 생각을 슥삭 쉽게 바꾼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스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입장에서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생각해보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죠. 그걸 역지사지라 합니다. 단톡방에 편향된 정치신념을 싸질러놓고 반대하는 이들과 싸우거나 무시하는 원로들, 전철 속 평온을 깨는 광신 전도사들은 그걸 못하는 겁니다.

 

나이들면 존경받아야 하지만 그럴 만한 인성을 갖줘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나이 들면 고집이 세진다지만 그게 바람직한 것이 아님을 우린 다 알지 않습니까? 나이 들었다고 자녀들과 젊은이들을 무시해도 되는 민주국가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영웅호색이란 호색한들이 다 영웅이란 뜻이 아니듯 지혜로운 노인이 존경받는 것은 그가 노인이기때문이 아니라 지혜롭기 때문이잖습니까?

 

그 노인들에게 뭔가 가르치려 하는 주제넘는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대신 늘 그렇듯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할 뿐이죠. 

 

내가 나이들어 고집불통 노인이 되고나면 응분의 심통은 부릴지언정 자녀들과 젊은이들의 얘기를 끝까지 다 들어보고 왜 저런 택도 없는 소리들을 하는지 책과 인터넷을 뒤져보며 그 생각과 의도를 헤아려 보려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 놈들이 빨갱이이기 때문'이라는 결론 따위는 절대 내지 않겠습니다.

 

시와 성서의 모닝콜은 환영합니다.

하지만 정치적, 종교적 개소리는 사양합니다.

 

 

2019. 9.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