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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더욱 잔혹한 가해자로 변해가는 과정

beautician 2019. 9. 5. 11:00

피해자가 더욱 잔혹한 가해자로 변해가는 과정





서파푸아에서 8월 16일 이후 벌어지고 있는 반인종차별, 독립요구의 시위와 폭동에 대한 후속 기사가 데스크에서 두번씩이나 잘렸습니다. 물론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닙니다. 동시기에 벌어지고 있는 홍콩 반중국 시위에 비해 규모나 한국의 관심도가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미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 말고도 한국은 조국 법무장관 후보 청문회 불발, 일본과의 경제전쟁 및 지소미아 종료 등 초대형 이슈들에 선점되어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지구 반대편 파푸아에 관심가질 하등의 이유도 없고 그럴 상황도 아닌 것이죠.


하지만 파푸아는 어떤 점에서  강점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 초반 수하르토를 사령관으로 한 인도네시아 뜨리꼬라 작전사령부가 파푸아를 침공해 네덜라드군과 전쟁을 벌인 바 있고 얼마전 YTN이나 KBS에서도 '인도네시아령 파푸아'라는 명칭을 쓰고 있었습니다. '령'이란 바로 식민지라는 뜻입니다. 한국도 내심 파푸아를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라 여기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로서 고통받았던 인도네시아가 독립전쟁을 마친 지 20년만에 식민지 종주국으로 탈바꿈한 셈입니다. 다른 나라에도 그런 선례가 있었을까요?


파푸아가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의 식민지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인구가 너무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넓은 땅덩어리에 1969년 당시 유권자가 80만 명 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 원시부족 상태로 흩어져 살아 식민부대들에게 조직적 항전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파푸아 독립운동단체(OPM)가 아무리 강고한 무장 항전을 벌인다 해도 최신 병기로 무장한 인도네시아 정규군의 상대가 될 리 없습니다. 숫적으로나, 화력으로나 말이죠.


그렇다면 인구 500만이 넘은 지금도 파푸아가 독립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전히 인구문제가 있습니다. 그 500만의 태반이 인도네시아 국내이주정책에 따라 파푸아에 유입된 마두라인 등 외지인들이고 그들은 절대적인 통합 합병파들인 것입니다. 인도네시아 중앙정부 정책에 부응해 고향을 버리고 그대신 현지에 땅을 무상으로 불하받아 들어간 개척민들이 현지 토착민들 불만이 좀 있다 해서 "그래 너희들이 맞아" 이러면서 파푸아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리 없는 것입니다. 미국 웨스턴 무비와 비교하자면 파푸아로 유입된 자바인, 마두라인들은 포장마차타고 캘리포이나로 뉴멕시코로 향하는 서부 개척자들이고 파푸아 원주민들은 그들을 괴롭히는 아파치, 코만치족 같은 인디언(토착 아메리칸)들인 셈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파푸아의 풍부한 천연자원때문입니다. 다른 나라가 그런 자원들을 가지고 있었다면 돈 주고 사와야만 했지만 자기 나라라면 그냥 파 쓰면 되는 일이니 말입니다. 그런 거대한 자산을 인도네시아가 포기할 리 없습니다. 그래서 파푸아는 자유를 얻기 어려운 형편에 있습니다. 그들이 자유를 얻어 독립하려면 1999년 독립찬반투표를 전후에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던 동티모르의 선례를 따르게 될 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먼 나라, 다른 나라의 일이니 우리가 꼭 신경쓸 필요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말이죠.

구한말부터 지난 세기 전반까지 우리 역시 세계의 무관심 속에서서 공공연히 일제의 군화발에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누가 대신 와서 총들고 싸워줄 것을 원한 게 아니라 우리 말을 좀 들어달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 많이 이들이 조국을 등졌고 이준 열사 같은 이들은 국제회의장에 들어서지 못해 홧병으로, 자결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518 광주항쟁 당시에도 광주시민들은 세계가 자신들을 바라봐 주길 바라며 압도적으로 불리한 싸움에 나서 수많은 목숨이 파괴되었던 바 있습니다.


그런 일이 파푸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홍콩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꼭 가서 함께 돌을 들고 총을 들고 싸울 필요 없습니다.

비자문제, 외교문제, 형사법 문제 등등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 주는 것이 법에 저촉될 리 없습니다. 

불리한 상황에서 대의를 구현하는 것은 많은 이들의 희생이 필요한 일인지 모르나 그 배후엔 수많은 이들의 관심과 응원이 있었습니다. 

그게 힘이 됩니다.



2019.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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