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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치 환산법

beautician 2019. 8. 19. 10:13


문화가치 환산법



<막스 하벨라르> 출판기념회와 히스토리카의 인도네시아 국립대학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등장한 한국인 투사들의 역할> 세미나를 준비하던 바쁘고 복잡하고 가성비 안나오는 비경제적인, 그러나 추진하고 진행해 오던 일의 한 챕터를 야무지게 닫는 의미있는 시간이 마침내 끝나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들어섰습니다. 


하지만 생업은 여전히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또 다시 글쓰는 일들만 쏟아집니다. 

만화 스크립트의 인도네시아어 번역, 그라메디아 출판용 이태수 작가 스튜디오에 제공할 인도네시아 호러 스토리 100꼭지, 영화진흥위원회 8월 정기보고서, 아시아투데이 인니기사.... 많은 일이 기다리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아이들에겐 한 가지 일로 가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업종이나 직장을 가지라고 충고하게 됩니다. 티끌을 모은다고 태산 될 리 없으니 말이죠. 여전히 티끌일 뿐입니다. 티끌만큼 스스로의 정체성에 충실한 놈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ROTC 동남아총회 초청장 스크립트도 그 사이 만들어 제출했군요.



1안 (동문용)

예쁜 고래들이 뛰노는 태평양을 건너, 하루 한 차례 지나가는 태양의 불마차와 부딪히지 않게 조심스럽게 적도를 가로질러 나오는 남양의 인도네시아로 동남아 각국 ROTC 동문들을 초대합니다.


3.1운동과 임정수립 100주년을 맞은 뜻 깊은 해에 푸른 제복에 담았던 청춘을 뒤로 하고 한인 디아스포라가 되어 재회하는 자카르타에서 동문간의 친목과 협력을 돈독히 하고 ROTC와 조국을 새삼 가슴에 새기는 의미 있는 시간을 준비하며 두 팔 활짝 벌려 동문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2안 (귀빈용)

1961년 창설된 이래 20만 명 넘는 임관자를 배출한 대한민국 ROTC의 동문회 인도네시아 지회가 주최하여 자카르타에서 열리는 제4회 ROTC 동남아 총회에 초대합니다.


중앙회 회장단과 동남아 각국 ROTC 지회 회장단 등 150명가량 참석하는 이 행사에 아무쪼록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이런 스크립트도 글 쓰는 사람이란 이유로 내 몫이 됩니다. 번거롭지만 이것도 향토작가로 자리매김을 하는 길목에서 꼭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인니 한인 100년사 편찬위원회의 일도 있습니다. 

모두가 힘을 모아야 마땅한 이 작업에 자신의 역사관이나 기득권을 주장하며 위원회의 구성에, 자신의 맡은 직책에 불만을 품고서 상대방을 폄훼하고 전체의 발목을 잡는 이들마저 건재한데 이제 앞으로 1년 남짓 활동하면서 인니측 총무로서, 후반기 총괄위원 중 한 명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시간과 노력을 갈아 넣어야 하지만 요청한 '기회비용보상비'가 나올지는 확답을 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해야 할 일은 몇차례의 미팅으로 명확해지지만 그에 대한 보상 또는 보수는 여전히 어정쩡한 상태로 결론도 없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죠. 상대방 능력이나 배경을 이용하고 싶지만 딱히 그 댓가는 치르고 싶지 않은 것이 이 시대의 인지상정입니다. 생업도 그렇고 글쓰기도 대체로 그렇습니다.


걸그룹이나 영화배우, 인간문화재같은 유명인이 아닐 경우 문화활동에 투여된 개인의 노력과 시간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그 문화를 누리는 이들의 문화와 보상에 대한 인식과 각성의 수준이 매우 낮기 때문입니다. 행사를 준비하고 공연하는 이들의 노력보다 거기 관심 갖고 참석해 주는 자신의 시간과 노력이 더 중요하다 여기는 것이죠. 새 책이 나올 때마다 한국의 동문들과 친구들은 꼭 책을 사보겠다며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카르타의 지인들 중 일부는 이런 말을 너무 쉽게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새 책 나왔다면서? 축하해요. 나도 한 권 줘 봐."


책은 사보는 것이 아니라 저자나 번역자 또는 출판사에 부탁해 공짜로 받아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굳게 박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보진 못해도 아무튼 읽어줄 테니 고맙게 여기라는 것이죠. 왜 그런 풍토가 자카르타에 자리잡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양승윤 교수님은 출판기념회 참석자들에게 당신이 책을 한 권씩 무료로 주고 식사도 한 끼 제공하겠다 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책을 공짜로 얻으려 하는 자카르타 풍토를 너무 잘 알고 계셔서 그랬을까요?


문화활동이란 왜 그토록 가치없는 것이 되었을까요?



2019.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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