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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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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결정해야 하는 순간

beautician 2019. 6. 9. 10:00





군시절 모시던 상관이 요즘 시니어 모델이 되어 매스컴을 자주 타십니다. 

군 보1사 멸공관에서 처음 만난 것이 1987년의 일이니 30년도 더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시니어가 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지만 당시 전방 야전부대 중대장 마치고 멸공관 보좌관으로 부임했던, 누구보다도 군인다웠던 그가 '모델'이 된 것은 역시 의외의 일입니다. 하지만 잘 관리한 다부진 체격에 멋지게 나이 들어 빛을 발하는 백발과 턱수염을 보면 그를 픽업한 에이전시의 안목이 빼어나다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60대에 들어서 인생의 두 번째 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가 멸공관에 부임한 건 내가 막 중위를 달았을 때였습니다. 나를 비롯한 안내장교들과 소대장들은 모두 학군 ROTC 출신이었고 실장님은 중령 진급예정자인 육사 출신이었는데 삼사 출신인 그는 새 부임지에 간단히 녹아들어 한 몸이 되었고 우린 그의 집 칡술 뱀술을 모두 거덜내면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가 1년이 채 되지 않아 다른 곳으로 발령받았을 때 난 그가 군에 뼈를 묻으리라 (순국한다는 게 아니라 군에서 정년를 맞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내가 전역하고 인도네시아에 오기 전 어느 시기에 그가 전역하여 뭔가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 한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군이든 기업이든 합리적이고 친화력 좋고 아랫사람들을 보호하며 챙기려는 사람들은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현실이 새삼 그의 모습에서 투영되는 것 같았습니다. 독선적, 이기적이고 자기 잘못조차 아랫사람둘에게 지우는 사람들만이 별을 달고 이사 상무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면서요. 당찬 군인이었지만 사회에선 순진하기 그지없는 초짜였을 그는 전역 후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내가 2-3주마다 머리를 염색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세상은 더욱 각박해졌지만 나역시 누군가에게 간단히 밟혀죽진 않을만한 강단과 녹록찮은 끈질김을 얻었습니다. 앞길이 막히면 옆길도 찾고 멀리 되돌아가는 융통성도 배운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삶은 팍팍하고 노후는 보장되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문학상과 출판한 몇 권의 책은 아직 내 미래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날로 직원들에게 야박해지며 대형 사기를 당할 방향으로 직진해 들어가는 조직에 사표를 던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내가 몸담은 조직이 죽어가는 게 분명히 보이는데 보수가 나오는 한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게 지혜로운 것일까요?  우유부단이나 비겁함은 아닐까요?


늘 높은 이의 직접 컨펌을 요구하며 까다로운 조건을 내밀던 그가 저렇게 간단히 무장해제되어 버리는 것은 한편 이해되는 면이 있습니다. 뭔가 간절히 추구하는 사람은 그 목적에 반하는 이슈들이 나올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고 의심하고 욕을 하곤 하죠. 하지만 그게 당연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이 내 입맛에 딱 맞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바, 기대하는 바를 100% 부응하는 상대방은 신이거나 사기꾼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걸 깨달아야 하는데 정작 당사자에겐 그게 보이지 않는 법이죠.


전에 있던 직원들 때문에 많은 손해를 보았다는 그는 "아무도 내게 얘기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제 내가 그에게 세상은 당신 입맛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현실을 가리키자 "난 당신 말 듣지 않겠습니다. 더 이상 말하지 마세요"라고 말합니다. 결국 그는 얘기해 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도 듣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제 아마도 파국으로 치달을 지도 모르는 거대한 사기극을 눈앞에 두고서 조언을 듣지 않고 함정으로 걸어들어가는 그의 팔을 난 한 번 더 잡아 보겠지만 만약 그 팔을 뿌리친다면 나 역시 더 이상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사표를 던지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 일 봐주던 뷰티션이란 인간도 사기극이 진행되는 걸 뻔히 보고서도 아무 말 안해주더라"라는 말을 하고 다닐지 모를 일입니다. 



당당하게 노년을 향해 걸어들어가는 보좌관님 모습은  대견스럽고 부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그 길을 가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겠죠. 


내게도 그 비슷한 결단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2019.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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