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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과 원혼의 상관관계 - 꾼띨아낙(Kuntilanak)

beautician 2019. 6. 7. 10:00


출산과 원혼의 상관관계 꾼띨아낙(Kuntilanak)

 


인도네시아 귀신 대표선수는 누가 뭐래도 꾼띨아낙(kuntilanak)입니다한국의 처녀귀신손각시와 비견되는 꾼띨아낙은 드레스코드가 분명해요얼굴을 완전히 가린 헝클어진 머리칼과 부대자루 같이 헐렁한 흰 옷이죠. 거기에 밤하늘을 뒤흔드는 간드러진 웃음소리영화화된 에피소드들에선 대부분 원한을 갚으려는 원귀로 표현되지만 사실 그 원래의 기원은 임신 또는 출산 중 목숨을 잃은 엄마의 혼입니다그래서인지 꾼띨아낙은 임신한 여성들에게 강한 질투심을 보여 물리적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태아나 갓난아기를 빼앗아 가려 합니다

 



 

꾼띠(Kunti)란 임신한 엄마아낙(anak)은 아기를 뜻하므로 스산하게 들리던 꾼띨아낙이란 단어가 ‘아기엄마라는 다정한 표현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가 Perempuan mati beranak, 즉 출산 중 죽은 여인이라는 뜻의 Pontianak (뽄띠아낙)에서 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서부 깔리만딴의 주도에 ‘뽄띠아낙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그 지역에 술탄왕국을 건설한 압두라흐만 알카리(Abdurrahman Alkadrie)가 정글을 개척할 때 이 귀신에게 몹시 시달렸기 때문이라는 기사도 있습니다실제로 말레이시아에서는 꾼띨아낙을 뽄띠아낙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꾼띨아낙의 출현방식은 하나도 다정스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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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가 쏟아지는 깊은 밤허름한 빈민촌 끝자락의 조산소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제발 비명 좀 지르지 마저것들이 자꾸 다가오잖아!”

 

조산원의 비단(bidan=산파)이 그렇게 다급하게 속삭이지만 극도의 산고를 겪고 있는 산모의 귀에는 그 목소리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아아아아아악!!!”

이히히히힛이히히히힛!”

 

아까부터 산모가 비명을 지를 때마다 멀리서 들려오던 간드러진 웃음소리는 이제 바로 담 너머에서 들리는 듯 가까웠습니다조산원은 끄라맛 센티옹(Kramat Sentiong)과 조하르 바루(Johar Baru) 사이의 묘지터와 접해 있었는데 인가의 마지막 열을 구성하는 그 골목에서 조산원 집은 사실상 반쯤 묘지 안쪽으로 삐죽이 들어가 있는 형국이었습니다지명에 포함된 ‘끄라맛(Kramat)’이란 말은 일견 신의 축복을 담은 곳으로 사람들이 발길을 삼가는 성스러운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귀신들이 곧잘 출몰하여 사람들이 좀처럼 들어서지 않는 스산한 장소를 묘사하는 앙커르(angker)라는 단어와도 맞닿아 있습니다실제로 경제활동이 번잡한 끄라맛 센티옹은 자카르타 도심 한복판이지만 과거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엔 대형 묘지터였다가 수하르토 시절 대부분 철거하고 갈아엎어 도로와 주거지로 만든 곳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곳곳에 오래된 공동묘지들이 남아 있고 밤마다 꾼띨아낙이나 뽀쫑을 목격했다는 일화가 넘쳐납니다. 그런 곳에서 더욱이 자정을 지난 시간,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산모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으니 이를 듣고 흥분한 꾼띨아낙들이 스믈스믈 몰려드는 것은 어쩌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히히히힛!! 이히히히힛!!!”

 

이제 꾼띨아낙들의 웃음소리는 조산원의 지붕 위에서도 들려왔고 귀신들 움직임 때문인지 아니면 쏟아붓는 폭우 때문인지 집안에서도 대들보 위로 어슴푸레 들여다 보이는 기와장들이 삐걱거리며 움직이고 있었습니다그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산모는 다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고 거기 화답이라도 하는 듯 꾼띨아낙들이 간드러진 강렬한 웃음소리를 내는 동안 공포에 질린 가족들과 산파들은 주문이라도 외듯 알꾸란의 구절들을 중얼거리면서도 아기를 받기 위해 분주히 손을 움직였습니다.

 

아아아아아악!!!”

 

전날 저녁부터 이미 하루를 훌쩍 넘은 지독한 산고가 이제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이미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던 산모로서는 지붕 위의 꾼띨아낙들이 그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앞세우고 집안으로 쳐들어 오는 한이 있어도 이젠 더 이상 주저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었습니다.

 

탯줄이 아기 목을 감고 있어서 정상분만하려면 아기 목이 졸릴 수 있어요제왕절개수술을 하는 편이 안전할 텐데요.”

 

몇 주 전 의사가 초음파검사 결과를 보며 그렇게 얘기했지만 핸드폰 가게를 하느라 센티옹의 아버지 집까지 은행빚에 잡혔다가 돈 한 푼 건지지 못하고 완전히 망한 것이 바로 몇 달 전그나마 간신히 마련한 돈으로는 정상분만비용도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산모는 그 몇 배가 들 제왕절개수술 비용을 도저히 마련할 수 없었어요모든 걸 책임지겠다던 남자친구는 이미 1년 가까이 연락이 끊겨 수소문 해보았지만 전화번호는 물론 거처도 여러 번 바꾸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입니다그녀는 절망의 끝에 서 있었어요결국 돈을 마련할 수 없었던 그녀는 최악을 각오하면서 정상분만을 시도했지만 그건 길고 긴 난산의 시작이었습니다산파들은 아기가 세상으로 나올 자리를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했고 산고가 길어지며 산모가 지쳐가자 지금이라도 병원으로 옮겨 수술하라고 종용했습니다하지만 상황이 변한 것은 없었습니다수술은 여전히 큰 돈이 필요했고 산모와 아기가 죽고 사는 것은 여전히 하늘에 달려 있었습니다.

 

아가야네가 살려면 지금 세상에 나와야 해그러지 않으면 널 영영 구할 수 없게 된단다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절대 너 혼자 보내진 않으마죽든 살든 엄마가 너랑 같이 할 거야하지만 이번 한 번만은 엄마를 좀 도와주렴.

 

산모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어요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몇 대 째인지 모를 촉진주사를 맞았을 때 마침내 산고의 통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그리고 그녀의 날카로운 비명이 다시 폭우 속의 밤하늘을 갈랐습니다아기의 첫 울음소리는 지붕 위와 사방에서 귀가 아플 정도로 웃어대는 꾼띨아낙의 웃음소리에 파묻혔습니다꾼띨아낙이 노리는 바로 그 순간이 찾아 온 것입니다.

 

그때 일단의 남자들이 조산원의 문을 박차고 들어와 일부는 큰 소리로 알꾸란을 읽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그릇에 담아온 소금을 천장 위기왓장 밑으로 뿌려대기 시작합니다그런 비현실적인 장면들을 보면서 산모는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듯 한데 어머니가 산모의 귓가에 다급히 속삭입니다.

 

잠들어서는 안돼절대로잠들지 마!”

 

24시간 넘는 산고를 겪은 산모는 이제 태어난 아기를 안아보기도 전에 실신해버릴 것 같았는데 그 말에 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하지만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어요잠들지 말라고 했던 어머니를 포함해 산파들은 물론 알꾸란을 읽으며 소금을 뿌려대던 남자들까지 모두 그 짧은 찰나의 순간 오히려 모두 바닥에 널브러져 잠들어 있었고 산모 혼자만 조산원 안에 깨어 있었던 것입니다귓속에서 메아리 치듯 하던 꾼띨아낙의 웃음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조산원은 기왓장을 때리는 폭우소리에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그때 조산원의 문이 다시 열렸어요흰 형체들이 문 앞에 어른거리고 있었습니다그러다가 팔 두 개가 조산원 안으로 쑤욱 들어왔습니다긴 손톱을 달고 있던 그 창백한 팔 들이 한없이 길어져 산모 옆에 뉘인 아기를 안아 올리려 할 때 산모는 어머니와 다른 사람들에게 도와달라며 발버둥을 쳤지만 마치 가위에 눌린 듯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산모는 꺽꺽 거리며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어요아기는 꾼띨아낙의 두 손에 들려지고 있었습니다.

 

산모의 눈에 불이 번쩍 일었습니다.

 

잠들지 말라 했잖아!!”

 

어머니가 소리지르고 있었어요얼마나 따귀를 갈겨댔는지 양쪽 볼이 얼얼했습니다자기를 빼곤 모두가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사실은 산모 혼자 기절하듯 잠결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산모는 아기가 무사한 것을 보며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어느새 묘지 쪽으로 멀어져 있던 꾼띨아낙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는 머스짓의 새벽기도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이제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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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함께 일했던 메이가 첫 아이를 낳던 밤의 장면입니다. 스넨시장이나 시내 수로빠띠 공원에서 몇 킬로 떨어지지도 않은 중부자카르타의 한복판에서도 불과 십수년 전까지도 밤이면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그 진위여부를 떠나서 말입니다.

 



 

꾼띨아낙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엔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어떤 지역의 유지에게 겁탈당한 한 아름다운 여성이 그 일로 인해 임신하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그러나 그 유지는 거꾸로 그녀가 부도덕하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주민들의 증오를 사게 만들었습니다처녀의 임신이 금기시되던 시절, 사람들은 처녀의 부정한 행위가 마을에 악운을 가져올 것이라 믿었습니다주민들은 그녀를 몰아세운 끝에 급기야 생매장하기에 이릅니다구덩이 속에서 애원하는 그녀에게 마을사람들은 흙을 퍼부었습니다. 어처구니 없이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후 그녀의 원혼은 꾼띨아낙이 되어 마을의 모든 남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출몰하며 자손 7대에 걸쳐 괴롭혔다고 합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임신한 여성이 가위, 바늘작은 칼 같은 날카로운 물체를 지니면 꾼띨아낙의 접근을 예방한다고 믿습니다. 같은 이유도 갓난아기 주변에도 그런 물건들을 놓아 두었죠위의 에피소드에 등장한 메이도 둘째를 임신했을 때 한 화교 두꾼이 준 작은 은장도를 늘 가지고 다녔습니다.

 

꾼띨아낙을 봤다는 목격담은 요즘도 인터넷에 많이 올라오는데 그중엔 화장실에서 생리대에 뭍은 피를 핥아먹고 있던 흰 옷의 여인을 봤다는 얘기도 있고 예전 두꾼들이 낙태시술을 할 때면 꾼띨아낙을 불러내 태아를 자궁에서 빨아내도록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물론 옛날 홍콩영화 ‘천녀유혼처럼 꾼띨아낙과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에 빠지거나 구미호 전설처럼 아기까지 낳은 아름다운 아내가, 가물치를 평생 먹지 않겠다던 결혼 전부터의 약속을 남편이 어기자 무시무시한 꾼띨아낙의 모습으로 변해 비통해 하며 떠나갔다는 등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있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꾼띨아낙의 개념은 더 이상 출산 중 사망한 여인의 원혼이 아니라 사실상 성별이 여성인 귀신들을 통칭하는 것이 되었습니다아마도 현대의학 발달로 출산 중 산모나 태아의 사망률이 크게 낮아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에게 있어 출산이란 여전히 목숨을 거는 모험이자 거대한 용기임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