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이웃을 털자 - 바비응예뻿 본문
이웃을 털자 – 바비응예뻿(Babi Ngepet)
재물주술을 뜻하는 뻐수기한(pesugihan)이란 단어는 부를 의미하는 ‘수기’(sugih)를 어근으로 한 명사입니다. 귀신 또는 마물과 계약을 맺어 부자가 되려고 시도하는 각종 행위, 즉시전자가 즉각적인 부를 얻기 위해 시전하는 주술이죠.
뚜율, 부토이조 등이 재물주술의 대명사인데 실제로는 꾼띨아낙이나 뽀쫑 등 거의 모든 귀신들과 마물들이 재물주술에 동원됩니다. 인도네시아의 귀신들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할 뿐만 아니라 재산증식의 기회도 제공하는 매우 극단적 양면성을 가지고 있죠. 등에 구멍 난 미녀귀신 순델볼롱이 다녀간 노점들이 손님들로 미어터진다거나 근드루어를 까마귀고기구이로 불러내 복권당첨번호를 묻는 것도 재물주술의 일종입니다. 숲의 마물과 영혼을 건 계약을 맺어 평생 부를 누린 노인이 노랑원숭이가 되어 마물의 권속으로 들어간 사람의 일화도 마찬가지고요.
재물주술은 방대하고 복잡해서 파고들 엄두가 나지 않는 거대한 분야이지만 일단 바비응예뻿(Babi Ngepet)이라는 돼지요괴 주술부터 살살 풀어가 볼까 합니다.
한국에서는 호랑이나 여우, 너구리 같은 동물들은 물론 심지어 두꺼비, 지네 같은 미물들도 도력을 쌓아 사람으로 둔갑하는 재주를 부리는데 인도네시아에선 사람이 요괴와 귀신들의 힘을 빌어 동물로 둔갑하는 반대방향의 둔갑주술이 발견됩니다. 돼지로 둔갑하는 바비응예뻿 주술이 그중 대표적이고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돼지일까요? 구약시대 야훼교에서와 같이 이슬람의 시각에선 돼지가부정한 동물의 대표격이기 때문이겠죠. 악마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는 재물주술이 이슬람 교리의 정반대편에 서있다는 사실이 돼지를 등 떠밀어 비도덕적 재물주술의 대표주자로 만든 측면이 크다 생각됩니다. 종교적으로 먹을 수 없는 동물군에 포함된다고 해서 꼭 나쁜 동물, 귀신들이 즐겨 부리는 마물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인데 13-14세기 이후 꾸준히 이슬람화가 진행 중인 인도네시아에서 돼지들도 억울한 누명을 쓴 건 아닐까요?그래서인지 삼겹살을 즐겨먹는 한국에선 돼지귀신 얘기를 들은 적 없는 것 같습니다.
바비응예뻿은 ‘도둑돼지주술’이라 번역하기로 합니다.
재물주술을 시전하는 사람이 돼지로 변해 도둑질을 나가는 겁니다. 동부자바에서는 이와 유사한 쩰렝끄레섹(Celeng Kresek – 끄레섹돼지)이라는 주술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이 돼지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멧돼지요괴의 도움을 받아 도둑돼지를 불러내 운용하는 것입니다. 대개의 주술들이 밤에 시전되는 것과 달리 쩰렝끄레섹 주술은 밤낯을 가리지 않고 시전할 수 있습니다.
도둑돼지주술은 뚜율을 키우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법을 통해 이웃들의 돈을 훔쳐 빨리 부자가 되겠다는 의도를 바닥에 깔고 있습니다. 우선 두꾼을 통해 초자연적 존재와 계약을 맺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우선 주술에 정통한 두꾼을 모셔와야죠. 두꾼은 주술을 발동시키기 위해 일정 의식을 진행하는데 의뢰자의 자식이나 부모 또는 친인척의 생명을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물론 사람을 죽여 그 심장을 재단에 올려놓는 식이 아니라 제물의 이름을 걸면 주술이 발동되면서 제물로 바쳐진 사람은 직장에서 또는 주방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 식입니다. 돈에 눈이 멀면 소중한 사람들조차 등가교환의 매체인 화폐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만약 가족이나 친인척을 제물로 삼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인간성이라도 제물로 바쳐야 해요. 예외나 면제는 없습니다. 그래서 시전자는 그 주술로 부자가 되겠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시전자의 영혼은 돼지요괴의 권속이 되어 영원히 복무해야 합니다.
조건이 충족되어 특정조건과 시점에 의뢰자를 멧돼지로 변하게 만드는 주술이 발동합니다. 돼지로 변한 시전자는 곧바로 재물을 찾아 돌아다니는데 사전에 반드시 다른 한 명을 섭외해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시전자가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리 검은 망토로 온 몸을 덮고 주술에 의해 돼지로 변하면 다른 한 사람은 대야 같이 물이 담긴 컨테이너에 꽃잎들을 흩뿌려 놓고 그 한 가운데에 초를 띄워 그 촛불을 지켜야 합니다.
이제 주술시전자는 돼지로 변해 온마을을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벽이나 문 또는 집안의 가구들에 몸을 비비며 긁어 댑니다. 그렇게 몸을 긁어대는 것만로 주술이 발휘되어 그 집안의 돈, 금붙이, 패물들이 망토 안의 주머니 속으로 옮겨온다는 것입니다. 족자국립대학교 수와르디 엔드라스와교수는 ‘자바인의 귀신세계’(Dunia Hantu Orang Jawa)라는 저서에서, 타켓으로 삼은 집 뒤쪽 벽에 도둑돼지가 엉덩이를 문질러대면 그 집안 사람들이 모두 잠에 빠져 도둑돼지가 손쉽게 그 집안의 돈과 패물을 훔쳐간다고도 기술하고 있습니다.
도둑돼지의 도둑질은 그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사람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성공적으로 완료됩니다. 하지만 돼지가 되어 도둑질을 하는 동안 덫에 걸릴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포획될 수도 있는데 그런 위험요소를 관리하고 방지하여 돼지의 안전을 담보하는 것이 촛불을 지키는 조수의 일입니다.
조수의 임무는 촛불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인데 만약 촛불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도둑돼지가 위험에 처했다는 신호이므로 즉시 촛불을 불어 꺼야 합니다. 촛불을 끄는 순간시전자가 변한 돼지는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져 다른 안전한 장소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촛불이 흔들리는 것뿐만 아니라 촛불의 색깔이 흐려지거나 어두워지는 것, 또한 불꽃이 크게 올라오는 것 역시 돼지에게 위험이 닥친 신호입니다.
촛불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시전자가 마을사람들에게 잡혀 맞아죽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촛불을 지키는 조수가 잠이 들거나 화장실을 다녀오는 등 자기 임무를 태만히 하면 자칫 최악의 경우를 맞을 수 있어집중력과 참을성이 요구됩니다. 귀신과 계약을 통한 행위는 언제든 예상 밖의 파국을 맞아 큰 대가를 치르곤 합니다.
이렇게 돼지가 되어 행동에 돌입하는 역할은 보통 남자가 담당하고 그의 아내나 형제가 촛불을 지키지만 간혹 배짱 좋은 여자가 돼지 역할을 감당하기도 합니다. 익숙해지면 나중엔 두꾼의 도움 없이도 시전자가 검은 망토로 자기 온 몸을 덮으면 자동적으로 돼지의 형상으로 둔갑할 수 있고 망토를 벗으면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오는데 검은 망토를 벗을 때 그 망토 안에 달린 크고 작은 주머니들이 도둑질한 물건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입니다.
도둑돼지를 잡았다는 소식이 최근까지도 심심찮게 보도되곤 합니다. 마을에 내려온 멧돼지들이 늘상 도둑돼지 혐의를 뒤집어 쓰곤 하죠. 그런데 일각에 따르면 도둑돼지들은 일반 돼지들과 분명히 다른 성격과 행동을 보인다고 하는군요. 관련 기사를 몇 개 찾아보았습니다.
Polisi Amankan Babi Ngepet yang Resahkan Warga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한 도둑돼지 검거
끄락사안면 파또깐마을에서 도둑돼지가 잡혀 마을 사람들이 구경하려 몰려들었다. 주민들은 재물주술의 결과물이라 지목된 멧돼지가 코의 모양, 눈동자 색깔이 보통 돼지와 다르다고 한다. 몸통에 줄무늬가 들어가 있었다. 돼지를 잡은 그곳 주민 헤리(50)는 매일 밤 마을을 돌아다니는 돼지가 의심스러워 이웃들과 힘을 합쳐 지난 토요일(2015년 6월 27일) 저녁 그물로 포획했다.
“사실 이 도둑돼지가 한달 전부터 우리 마을에 출몰하면서 피해를 줬어요. 집에 두었던 돈을 잃어버린 주민들이 적지 않았다고요” 헤리는 이렇게 말했다.
마을을 방문한 방문객 수천 명도 이 돼지가 사람의 둔갑이라고 확신했다. “눈이 빨간 것이나 털 색깔이 검정과 고동색이 섞여 있는 걸 보면 재물주술 돼지가 분명해요. 보통 돼지들과는 전혀 다르다고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한 주민도 그렇게 말했다. 이 도둑돼지를 보겠다고 몰려드는 군중들이 점점 더 많아지자 끄락사안의 파출소는 부득이 이 돼지를 끄락사안 경찰서로 옮겨올 수밖에 없었다.
“몰려드는 방문객들때문에 주민불편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우리가 데려왔어요. 이게 정말 재물주술의 도둑돼지인지 아니면 먹을 것을 찾아 마을로 내려온 보통 멧돼지인지는 조사하면 알게 되겠죠.” 끄락사안의 파출소장 수바다르의 말이다.
(출처 – 마디운뽀스닷컴, 2015년 6월 29일자)
Fenomena Babi Ngepet Dalam Mitologi Jawa
자바전설속의 재물주술 도둑돼지
솔로- 재물주술의 기제로 알려진 바비응예뻿이 지난 월요일 (2015년 5월 18일) 솔로의 깔랑안 지역에서 목격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솔로주민들의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주민들은 떼를 지어 이 돼지의 모습을 한 요물을 뒤쫒았지만 그 시전자는 민첩한 조수를 두고 있는 듯했다. (후략)
(출처 -반둥비지니스 닷컴 2015년 5월 21일자)
사전지식이 없었다면 무슨 얘기인지 이해되지 않았을 내용들이 쏙쏙 들어오지 않나요?
도둑돼지 주술문화는 인도네시아인들의 생활 속에 대체로 일상화되어 있는 듯 합니다. 물론 직접 주술을 시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접하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현지 청년들이나 사무실 직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간혹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촛불을 지킬 테니 네가 응예뻿 역할을 해.”
절대 몰랐을 이 말까지도 이제 완벽히 이해됩니다. 네가 나가서 열심히 일하면 내가 뒤에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게. 대충 이런 말이 되는 거죠.
인도네시아 사회가 표면적으로 나날이 이슬람근본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그 저변에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토착무속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겁니다. 뻐수기한, 재물주술에 대한 내용들을 따라가다 보면 매주 금요일마다 숄랏줌앗을 하려고 경건한 복장과 정결의식을 갖추고 머스짓을 향하는 인도네시아인들의 머리 속 깊은 곳을 살짝 들여다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이 가짜 이슬람이란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조상들의 시대로부터 내려온 오랜 민속은 국적과 종교를 불문하고 누구나의 마음 속에 어떤 식으로든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결코 숨길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모든 인도네시아인들이 미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속을 어리석다고 여기는 청년들이 적지 않은 것 역시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인도네시아 청년이 인터넷에 올려놓은 패러디 광고문구를 첨부하면서 이번 챕터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Lilin ngepet anti mati.(꺼짐방지 응예뻿 촛불 판매)
응예뻿주술을 할 때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장비가 있습니다. 이 꺼짐방지 응예뻿 촛불만
있으면 촛불을 지키는 사람이 졸거나 바람이 불어 촛불이 흔들려도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우리가 제작한 장비는 WNO(세계 응예뻿 기구)의 기준을 통과했고 인도네시아 두꾼연맹으로부터 A 등급 판정을 받은 제품입니다.
달랑 99,999루피아(약 9천원)로 이 꺼짐방지 응예뻿 촛불을 장만할 수 있습니다. 즉시 긴급전화번호로 연락 주세요. 주저하지 마시고 아직 스톡이 남아 있을 때 어서 연락주세요. 또한 보너스로 첫 돼지 반마리에겐 돼지울음소리를 차단해주는 소음마스크를 증정합니다.
주의 : 정품은 오직 저희들에게서만
구매할 수 있습니다. 부작용 발생시 즉시 인근 정신병원에 연락하세요. (출처 : 요기위라완닷컴)
(끝)
'인니 민속과 주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술과 관련된 동물들 (0) | 2019.06.05 |
---|---|
동부자바 돼지요괴 주술 – 쩰렝끄레섹 (0) | 2019.06.04 |
귀신 통해 돈버는 법 – 재물주술: 근드루어 편 (0) | 2019.05.31 |
우리가 잘 모르는 인도네시아 대표귀신 – 근드루어 (Genderuwo) (0) | 2019.05.30 |
초혼술의 세계 (0) | 2019.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