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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

목장의 왕따

beautician 2019. 3. 25. 10:00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목장모임 '을 합니다. 물론 목장에 젖소 젖 짜러 가자는 건 절대 아닙니다.

옛날엔 구역예배라는 게 있었습니다.

교회 밖에서도 성도들을 조직해 예배모임을 갖는 건데 보통 금요일에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도 언젠가부터 유행의 바람이 불어와 보수적이기 이를 데 없던 교회행사와 관행들을 하나 둘 바꿔 놓기 시작했는데 그게 구역예배에도 불어왔습니다. 그래서 '구역 '이라는 단어가 '순'이니 '지역'이니 여러 번 바뀌더니 최근까지만 해도 속회' 또는 '속모임' 이라 불렀는데 바로 얼마전 '목장'으로 다시 바뀐 것입니다. 목장모임의 목장이란 바로 그 목장인 겁니다.

그런데 이 목장모임을 주일예배 끝나자마자 갖는다는 건 어느 정도 강제적 성격을 갖습니다. 금요일의 구역예배는 바쁘다든가 출장 등의 이뮤을 대면서 빠질 수 있지만 일단 일요일 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이 모임을 빠지기 매우 곤란하게 되는 겁니다. 눈치가 보이는 거죠. 물론 그 모임을 그렇게 갖는 것엔 눈치보라는 의도가 어느 정도 포함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번엔 내가 왜 그 구역예배나 목장모임에 가지 않으려 하는지를 얘기할 차례입니다.

 

난 교회에서 누군가를 만나 교제의 지평을 넓히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교회 커뮤니티라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식적인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성스러울 수 없는 사람들이 마치 성스러운 집단처럼 스스로를 포장하고 그 성스러움의 정도를 집사, 권사, 안수집사, 장로 등으로 등급을 매기는 사회이니까요. 그렇게 만난 사람들을 교회 밖에서 개인적으로 또는 일 때문에 다시 만나게 될 때 드는 괴리감은 매우 좋지 않은 선입감을 남깁니다. 그건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머리에 난 뿔은 사탄의 뿔인데 마치 그게 소나 양의 뿔인 것처럼 포장하고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어차피 사회에서 만나면 나를 나로 볼 터이고 내 뿔의 속성도 저절로 알 텐데 말입니다.

 

그러니 난 사람들이 처음 보는 나를 집사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부담스럽습니다. 한때는 사람들 오해를 피하기 위해 교회 갈 때마다 굳이 와이셔츠 가슴 주머니에 말보로 담배곽을 넣고 다니곤 했습니다. 교회에서 비흡연자 연기를 하고 다니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담배를 끊기 전까지는 늘 그랬습니다.

 

물론 이미 사회에서 알게 된 사람들을 교회에서 만나는 것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관계의 근원이 교회에서 시작되지만 않으면 된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난 교회 사람들과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피합니다. 그러니 목장모임에 나가지 않는 것은 내가 소나 양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오셨다는데 교회는 왜 사람들을 더욱 조직 속으로 엮어 넣어 꼼짝 못하게 하려는지 늘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가대에 서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는 좀 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조직에서도 사회에서도 목이 위태로운데 그분한테까지 잘못 보이면 좀 곤란하거든요. 성가대 사람들과 굳이 교류하려는 목적은 분명 아니었죠. 이미 성가대 재합류 한 지 2년차이니 딱히 그분들과 교류를 피하는 건 아니지만 그간 행동으로 드러났을 내 생각을 다들 느꼈는지 (아님 텔레파시가 먹혔든지) 이젠 거의 말을 거는 사람이 없거든요.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왕따 아니라고요.

 

 

2019.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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