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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라보워 수비얀토-또 다시 궁극의 권력을 향하여 본문
쁘라보워 수비얀토 조요하디꾸수모(Prabowo Subianto Djojohadikusumo)는 1951년 10월 17일생 인도네시아 정치인이다. 그는 인도네시아군에서 중장 계급을 달았다가 경제위기와 자카르카 폭동이 벌어졌을 때 BJ 하비비 대통령, 통합군사령관 위란토와 반목하다가 불명예 제대 당했다. 한때 사업가로도 변신했던 그는 원래 인도네시아 경제학자인 수미트로 조요하디꾸수모(Sumitro Djojohadikusumo)와 도라 시가르(Dora Sigar) 사이에서 태어난 훌륭한 집안 출신이었고 군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1983년 수하르토의 둘째 딸 띠띡 수하르토(Titiek Suharto)와 결혼했지만 1998년에 이혼했다.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전에 세 번째 나선 그의 인생경로를 따라가 본다.
먼저 가족관계를 훑어보자. 쁘라보워의 아버지 수미트로 조요하디꾸수모(Sumitro Djojohadikusumo)는 수하르토 정권에서 경제부 장관, 기술연구개발부 장관 등을 역임한 경제학자로 독립전쟁 초창기에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다가 벌어진 렝꽁전투에서 다안 모곳 소령과 함께 전사한 동생 수비안토의 이름을 쁘라보워에게 붙여 주었다. 어머니 로다 시가르는 북부 술라웨시 랑고완(Langowan) 지역의 맹꼼(Maengkom) 가문에서 갈라져 나온 미나하사 후손 개신교도였다.
쁘라보워에겐 빈띠아닝시(Bintianingsih)와 마이라니(Mayrani)라는
두 명의 누나와 하심 조요하디꾸수모(Hashim Djojohadikusumo)라는 남동생이 있다. 하심은 나중에 쁘리부미 그룹을 일구어 인도네시아는 물론 캐나다와 러시아에도 뻗어나가
있다. 쁘라보워는 부모를 따라 1966년에서 1968년까지 영국에 살면서 그곳 미국계 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사관학교에
들어간 것은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쁘라보워가 롤 모델로 삼았던 이는 터키 군인 아타투르크(Ataturk)였다. 친구들이나 주변 인물들에 따르면 쁘라보워는 전략전술에 재능이
있었고 진작부터 전치권력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사진: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 Mustafa Kemal Ataturk)
쁘라보워의 할아버지인 마르고노 조요하디꾸수모(Margono Djojohadikusumo)는 인도네시아 국가은행(Bank Negara Indonesia – BNI)의 창업자이자 임시최고자문위원회(Dewan Pertimbangan Agung Sementara)와 인도네시아 독립준비 조사위원회 – BPUPKI: Badan Penyelidik Usaha Persiapan Kemerdekaan Indonesia)의 첫 위원장이었다. (사진) 쁘라보워(뒷줄 맨 오른쪽)이 12살 때 누나들과 동생 그리고 할아버지 마르고노 조요하디꾸수모(Margono Djojohadikusumo), 할머니 시티 까뚜미 위로디하르조(Siti Katoemi Wirodihardjo)와 함께
쁘라보워는 1983년 띠띡 수하르토라 불리게 되는 수하르토의 딸 시티 헤디아티 하리야디(Siti Hediati Hariyadi)와 결혼하여 디딧 헤디쁘라스티요(Didit Hediprasetyo)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디자인을 전공하는 그는 보스톤에 살다가 나중에 빠리에 정착했다. 완전히 디자이너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 디딧은 아버지 쁘라보워의 길을 따르지 않았고 BMW 자동차 외관 디자인에 참여한 첫 아시아인으로도 기록되었다.
1976년 쁘라보워는 인도네시아 육군 특수부대로서 한국의 특전사 격인 코파수스(Kopassus)에 들어가 동티모르에 주둔한 인도네시아 육군의 낭갈라(Nanggala) 특수전 부대들 중 하나인 산디유다 부대(Kopassandha) 특공대 1그룹 지휘관으로 발령 받았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바로 1년 전인 1975년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동티모르를 침공한 상태였다. 그때 쁘라보워는 25세로 낭갈라 부대의 최연소 지휘관이었다. 그와 동티모르 간 긴 악연의 시작이었다. 그는 프레틸린 반군의 지도자이자 동티모르의 두 번째 대통령인 니콜라우 도스 레이스 로바토를 나포하는 작전을 주도했다. 이때 쁘라보워의 앞잡이가 되어 길을 안내한 이는 니콜라우의 남동생 안토니오 로바토였다. 1978년 12월 31일 쁘라보워의 중대가 딜리 남쪽 50킬로미터 지점의 마우비세(Maubisse)에서 이동하고 있던 니콜라우를 포착하고 총격을 가해 복부에 치명상을 입혔다. 프레틸린은 자카르타 정부에게 눈의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는데 그 수장을 사살한 쁘라보워가 군 지휘관들은 물론 수하르토 대통령에 눈에 든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사신 -위: 전처 띠띡 수하르토와 이혼 전, 아래: 디자이너인 아들 디딧과 함께)
1985년 쁘라보워는 미국 포트 베닝(Fort Benning)의 고급 보병지휘관 코스에서 특수전 심화훈련을 받았다. 1990년대 초에 코파수스 제3그룹의 사령관으로 이제 대령 계급을 단 쁘라보워는 비정규전 부대와 코파수스 지휘관들이 훈련시켜 명령체계 속에 조직한 민병대를 기동시켜 주요 시내와 마을들에서 동티포르 독립운동 세력을 뿌리뽑으려 했다. 그가 별을 단 것은 1990년대 중반의 일로 임관 22년 후 1998년 중장 계급까지의 고속 진급에는 그의 뛰어난 무공뿐 아니라 대통령의 사위라는 특수한 지위에 힘입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부대는 검정색 복장에 두건을 둘러쓰고서 주로 밤에 작전을 벌였다. 그래서 그의 부대엔 ‘닌자 부대’라는 별명이 따라붙었고 이 과정에서 인권침해 논란이 불거졌다.
1996년 쁘라보워는 파푸아의 산악지역에서 마펜두마 작전(Mapenduma Operation)을 지휘했다. 목표는 자유 파푸아 운동(Free Papua Movement) 반군이 인질로 잡은 11명의 과학자들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그 11명은 인도네시아인 5명, 영국인 4명, 네덜란드인 한 명과 그의 임신한 아내였다. 인도네시아인 남자 인질 2명은 구출작전이 시작되기 직전 살해당했다. 영국 대사관 무관이자 SAS 특수부대 출신 아이버 헬버그 대령(Colonel Ivor Helberg)이 이 작전을 은밀히 지원했다. 이 작전에서 파푸아 반군들을 속이기 위해 적집사 마크를 단 흰색 헬리콥터를 사용해 비난을 받았다. 그 헬리콥터가 게셀레마(Geselema)에 착륙하자 아무 것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적십자사 친구들이 온 것이라 생각하고 헬리콥터로 달려갔는데 헬리콥터 기관총 사수와 거기서 뛰어내린 군인들이 그들을 모두 사살해 버렸던 것이다. 인질 두 명이 죽게 된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평화적으로 인질석방 조건을 협상 중이던 파푸아 반군을 격동시켰기 때문이었다. (사진: 코파수스 시절 쁘라보워 수비얀토)
1998년 3월 20일 쁘라보워는 27,000명의 병력을 보유한 육군전략예비사령부(Kostrad)의 사령관으로 임명되는데 그것은 수하르토가 1965년 9.30 쿠데타를 진압하던 시절 가졌던 보직이었다. 당시 쁘라보워는 세 개의 별이 빛나는 중장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가 육군전략예비사령부(KOSTRAD)를 맡은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1998년 5월 폭동이 터지자 쁘라보워는 시외에 있는 자기 부대를 이끌고 자카르타로 진입해 치안을 회복하도록 허락하라며 당시 통합군사령관 위란토 장군을 강권했다. 쁘라보워가 전에 사령관을 맡았던 코파수스 요원들 수백 명이 전세기 편으로 딜리에서 족자로 날아왔고 다시 기차편으로 자카르타에 들어왔다. 이미 보직을 마치고 떠나온 특수부대 병력을 명령계통 밖에서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정도로, 그것도 상관인 위란토 통합군사령관의 지시를 대놓고 위반할 정도로 쁘라보워의 권력은 당시 하늘을 찔렀다. 물론, 그것은 그의 등 뒤를 줄곧 받쳐 주었던 수하르토의 권력이기도 했다. 그 수하르토 정권이 백척간두로 내몰린 그 시절 쁘라보워는 정권보위를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국가 반역자들”에 대항해 함께 싸우자고 국민들을 종용했다. 5월 14일 아침, 코파수스 부대는 남부 수마트라의 람뿡에서 일단의 젊은 양아치들을 싣고 와 자카르타에 풀어놓았다. 이 일로 쁘라보워는 예전 보직 휘하의 지휘관들을 움직여 문제를 키우고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위란토는 이런 상황을 꿰뚫어 보고 쁘라보워가 육군전략예비사령부 병력을 자카르타로 끌고 들어와 상황을 진압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쁘라보워가 혼란을 일으켜 정치적 라이벌을 실각시키거나 정권을 찬탈하려는 자바의 전통적 전술을 쓰는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쁘라보워 휘하의 부대들은 5월 폭동이 있기 몇 개월 전 최소 9명의 민주주의 활동가들을 납치해 고문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납치되었던 사람들 중 한 명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며칠 동안 어딘지 알 수 없는 장소의 군부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눈이 가리운 채 고문을 당했고 주로 그들의 정치활동에 대한 반복된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고 한다. 아이러니컬 한 것은 2009년 그 9명 중 두 명이 쁘라보워의 정당인 그린드라당 후보로 총선에 나섰고 또 다른 한 명은 그의 미디어 고문으로 일했다는 것이다. 변절이었을까? 아니면 스톡홀름 증후군이었을까? 아무튼 쁘라보워는 1997년 2월부터 1998년 5월 사이 또 다른 13명의 인도네시아 활동가들의 납치를 조직, 지휘했다는 혐의도 받았다.
5월 폭동에 대한 조사가 이후 계속되면서 당시 자카르타에서 벌어진 폭력사태는 수하르토의 후계자가 되려 했던 군 엘리트들 간 내부 투쟁의 결과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많은 이들은 장인의 뒤를 이어 후계자가 되려 했던 육군전략예비사령관 쁘라보워가 자신보다 더욱 빈빈히 수하르토의 후계자라고 지목받던 통합군 사령관 위란토를 시기했기 때문이라 믿는다. 쁘라보워는 자카르타 전역 작전사령관 (Panglima Komando Operasi Jakarta Raya-Pangkoops Jaya) 샤프리 샴수딘(Sjafrie Sjamsoeddin)과 함께 위란토가 무정부상태를 수습하지도 못하면서 정부를 겁박하기만 하는 무능한 지휘관임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사진-쁘라보워 곁에 선 샤프리 샴수딘 당시 소장(오른쪽)) 그해 8-9월 기간동안 실사팀이 자카르타 폭동이 일어났을 때 활동 내용에 대해 쁘라보워와 샤프리 및 다른 군지휘관들을 조사했다. 쁘라보워는 당시 수도에서 정확히 어떤 군사활동이 이루어졌는지 모른다고 하며 책임을 샤프리에게 넘겼다. 진실조사팀은 최종보고서에서 5월 14일 밤 쁘라보워가 육군예비전력사령부 본부에서 군과 민간의 여러 유력한 인물들을 만나 폭력사태 조성에 대해 협의한 혐의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러한 혐의는 나중에 당시 회합에 참여했던 인권변호사 아드난 부융 나수티온(Adnan Buyung Nasution), 합동진실조사팀 위원 밤방 위조얀토(Bambang Widjojanto) 등에 의해 반박되었다. 이후 수년간 조사가 진행되면서 쁘라보워 측의 계속된 진술이 진실조사팀의 보고서와 상충되자 오히려 진실조사팀 주장에 대해 의구심이 깊어졌다.
1998년 5월 21일 수하르토는 대통령직 사임을 선언했고 BJ 하비비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하비비의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던 날 오후 쁘라보워 중장은 위란토가 맡고 있는 군사령관 직을 자신에게 달라고 하비비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하비비와 위란토는 오히려 쁘라보워를 육군전략예비사령관 직에서 해임하고 위란토를 국방안보장관 겸 인도네시아 통합군사령관으로 승진시킴을 발표했다. 이에 격분한 쁘라보워는 자기 병력을 트럭에 태워 대통령궁에 도착해 권총을 찬 채로 궁안으로 쇄도했다. 하지만 경비에 가로막혀 하비비의 집무실에 들어가지 못한 쁘라보워는 거기서 물러나와 이번엔 장인 수하르토를 대신 만나러 갔지만 꾸짖음을 당했을 뿐이었다고 알려진다. 자기 권력의 배경이던 수하르토가 무너지자 쁘라보워의 권력 역시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고 자신의 의지가 먹히지 않는 초유의 상황에 쁘라보워는 허둥지둥했다. 주말이던 5월 23-24일 쁘라보워의 자택을 위란토가 방문했고 그후 그는 전투작전보직에서 해임되고 반둥 일반참모대학의 비전투보직으로 발령되었다 .
군 조사결과에 따르면 쁘라보워가 활동가들 납치에 대한 자기 책임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는 그해 8월 군복을 벗게 되는데 그는 물론 위란토도 쁘라보워가 항명했기 때문에 군에서 쫒겨난 것이라는 일반의 관측을 확인해 주지 않았다. 군을 떠난 쁘라보워는 스스로 요르단 망명길에 올랐는데 당시 요르단의 젊은 왕 압둘라를 특수부대 지휘관 시절 동료 지휘관으로 알고 지냈던 인연때문이었다. 2000년 ‘아시아는 지금(Asia Now)’과의 인터뷰에서 쁘라보워는 “나는 하비비를 위협하지 않았다. 폭동의 배후도 아니다. 그건 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난 수하르토 대통령을 단 한번도 배신한 적이 없다. 하비비를 배신한 적도 없다. 난 조국을 배신한 적이 없다… 오히려 자신들이 개입했던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나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던 일단의 그룹이 있다”라고 말했다. (사진: 계급장을 뜯기는 쁘라보워 중장)
인권단체들은 쁘라보워의 대통령 출마자격에 대해 오래동안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는 그가 민주주의 활동가들을 납치한 사건들에서 “명령을 잘못 해석했다”는 이유로 1998년 군에서 불명예제대를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군의 공식 발표를 따른 것이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당시 육군전략예비사령부 수장으로서 쁘라보워가 배후에서 군을 움직여 쿠데타를 시도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2014년 대선 당시에도 쁘라보워에 대한 비난이 다시 점화되어 많은 단체들로부터 후보직 사퇴를 종용받았다. 망각 반대 민간사회연대(Civil Society Coalition Against Forgetting)의 기치 아래 임파샬(Imparsial), 콘트라스(Kontras), 스타라 인스티튜트(the Setara Institute), 인권수호그룹(and the Human Rights Working Group-HRWG)로 구성된 일단의 연대가 2014년 5월 7일 인권에 관한 국가위원회(National Commission on Human Rights-Komnas HAM)를 방문해 쁘라보워 케이스를 다시 조사할 것을 강권했다. 2014년 6월 27일 보도에서는 탐사보도 언론인 앤런 네언(Allan Nairn)이 쁘라보워의 인권침해 사실을 밝힌 것으로 인해 체포위협을 당했다고 지적했다.
군에서 퇴출된 쁘라보워는 동생인 하심 조요하디꾸수모의 사업에 참여하면서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는 우선 동부 자바에 소재한 종이펄프농장회사인 끼아니 꺼르따스(Kiani Kertas)를 매입했다. 그 회사는 원래 수하르토 전 대통령 측근 사업가 봅 하산 소유였고 당시 수하르토가 생존하던 시절이었으니 모종의 특혜나 이면계약이 있었음직하다. 그렇게 사업에 뛰어들어 오늘날 쁘라보워의 누산타라 그룹(Nusantara Group)은 누산타라 에너지(석유, 천연가스, 석탄), 띠다르 끄린찌 아궁(Tidar Kerinci Agung – 팜오일 플랜테이션), 잘라디 누산타리(Jaladi Nusantara-어업) 등 국내외에 27개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쁘라보워는 끼아니 꺼르따스를 꺼르따스 누산타라(Kertas Nusantara)라고 개명했다. 이 회사는 1990년에 설립되어 현재는 누산타라 에너지의 일부가 되어 있으며 전체 3,400헥타르에 이르는 부지에는 제지공장과 직원 숙소는 물론 사립학교 및 다양한 시설들이 건립되어 있다. 끼아니는 ISO900-2005허가를 획득했다. 끼아니 꺼르따스는 2014년 초 자금난을 겪었고 직원들이 길거리에서 5개월간 밀린 급여를 달라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쁘라보워는 2009년 대선 당시 가장 부유한 대통령 후보로서 1조5천억 루피아(약 1억5천만불)과 미회 750만불의 재산신고를 한 바 있다. (사진-꺼르따스 누산타라 전경)
2007년 영국에 본부를 둔 처칠 PLC(Churchill PLC)가 대주주인 리들라타마(PT. Ridlatama)가 동부 깔리만탄에서 석탄채굴을 위한 지질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2개월 후 매장량에 대한 긍정적인 조사결과가 나오자 이스트 꾸타이(East Kutai)의 관리들은 뜬금없이 쁘라보워 수비안토의 가족회사 누산타라 그룹의 자회사 누산타라 에너지에 광산허가를 내주어 리들라타마가 조사한 지역에서 채굴활동을 허락했다. 이건 누가 봐도 처칠이 받아 마땅한 허가를 누산타라가 가로챘다는 심증이 강하게 드는 장면이다. 2010년 리들라타마의 허가증이 반려되면서 누산타라가 처칠의 산업활동을 완전히 넘겨받게 되었다. 처칠은 인도네시아 대법원에 청원을 넣었으나 패소했다. 2012년 처칠은 투자분쟁해결을 위한 국제센터(International Center for Settlement of Investment Disputes)에 인도네시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일으켜 2억불의 배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정부는 투자분쟁해결을 위한 국제센터가 중제권한이 없다며 반발했다. 2014년 ICSID는 자신들이 권한 있음을 확정했고 이 소송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사진: 처칠 PLC 로고)
2014년 이스트 꾸타이의 군수 이스란 노오르(Isran Noor)는 쁘라보워 수비얀토가 대통령 후보임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그는 처칠에게 허가서를 위조했다는 혐의를 걸어 기소하는 방침을 검토하겠다고도 했다. 같은 허가서가 복수의 수혜자들에게 이중 발부될 경우 인도네시아 고위관리들이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기보다는 수혜자들 중 만만한 한 명을 공문서 위조로 엮어 넣는 모습은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사진: 쁘라보워가 2011년 자카르타의 따만미니에서 열린 SEA게임 쁜짝실랏(Pencak Silat) 토너먼트를 개회하고 있다. 그는 인도네시아 쁜짝실랏 협회 회장이다.)
쁘라보워는 현재 몇몇 NGO도 대표하고 있다.
1973년 설립된 인도네시아 농민협회는 농민들의 권리를 주장했다. 쁘라보워는 2004년 HKTI의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2010년 재선에 성공했다.
인도네시아 전통시장상인조합(APPSI)는 비영리조직으로 인도네시아 전통시장 상인들의 복지를 도모하는 곳이다. 쁘라보워는 2008년 APPSI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쁜짝실랏(Pencak Silat)은 인도네시아 전통무술이다. 인도네시아 쁜짝실랏 협회(IPSI)는 인도네시아에서 이 경기규칙을 정하고 선수들을 육성하며 시합을 조직하는 곳인데 쁘라보워는 2004년 IPSI의 회장에 선출되었고 2012년 재선에 성공했다.
군인에서 사업가로 변신했던 그는 이후 정치가가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군시절부터 정치에 이미 깊숙이 간여하고 있었다. 그는 수하르토 대통령과의 관계를 이용해 1990년대 형제와 함께 언론과 정치권의 비난을 잠재우는 일을 했다. 그의 동생 하심은 구나완 모하마드(Gunawan Mohamad)에게 당시 정간당한 상태인 잡지 템포(TEMPO)를 자신에게 팔라고 강요하다 실패했다. 쁘라보워는 중령시절인 1992년 자기 대대본부로 구스두르(Gus Dur)를 초청해 종교에만 전념하고 정치엔 눈을 돌리지 마라, 그렇지 않고 계속 수하르토 대통령을 거스르면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며 위협한 일도 있다. 이후 그는 석학 누르콜리시 마짓(Nurcholish Madjid -짝 누르 Cak Nur)에게 당시 통합군사령관 파이잘 딴중(Feisal Tanjung)이 “명백히 위헌적”이라고 비난한 구나완 모하마드의 선거감시기구 KIPP에서 사퇴하라고 경고했음을 전하기도 했다.
왼쪽부터: 구나완 모하마드, 압둘라흐만 ‘구스 두르’ 와히드 전대통령, 누르콜리시 마짓
2004년 쁘라보워는 골카르당의 대통령 경선후보 5인 중 한 명에 들었는데 가장 적은 39표를 받아 예선에서 탈락했다. 2차 경선에서 위란토가 승리했다. 골카르당에서 그의 미래는 보이지 않아다. 그러자 2008년 파들리 존(Fadli Zon)을 포함한 쁘라보워의 측근들이 그린드라당을 발족시키고 쁘라보워를 2009년 대선 후보로 추대했다. 그러나 560석 국회에서 불과 26석을 차지하며 그린드라 당을 대통령 후보를 내기 위한 의석수를 얻지 못했다. 쁘라보워는 이때 이미 대통령을 꿈꾸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수카르토 대통령의 딸 메가와티 수카르노뿌트리 대통령 후보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뛰어 27%를 득표했다. 당시 선거에서 현직이었던 수실로 밤밤 유도요노 대통령이 경제학자 부디오노(Boediono)를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하여 재선에 성공했다. 육사 동기생이 대통령궁을 지키는 모습을 보며 쁘라보워는 분명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다.
2011년 11월 쁘라보워는 2014년 대선출마의사를 발표했다. 2012년 2월 23일 정책연구 및 전략적 발전센터(Puskaptis)와 인도네시아 조사연구원이 발행한 조사보고서에서는 그의 우세를 점쳤지만 관측통들과 활동가들은 그 조사결과에 의문을 던졌다. 다른 여론조사들은 전혀 반대의 결과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2012년 3월 그린드라당은 쁘라보워를 2014년 대선후보로 공식 지명했다. 그 즈음 당의 슬로건도 ‘그린드라 승리, 쁘라보워 대통령’으로 바뀌었다. 그는 선거에 이기면 투자자 우선의 정부를 운영할 것과 보다 많은 에너지 탐사를 할 것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그간 노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증가일로인 근로자들의 불만은 국가예산을 지혜롭게 운용함으로써 해소할 수 있음을 믿고 있다고 말했다. 만성적 지연되고 있는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군대식으로 강하게 밀어붙이고 농업생산성을 제고하여 일자리를 더욱 창출하겠다고도 공약했다. 그의 중요한 포지션은 그가 세속국가를 지지하여 그의 당이 무슬림 다수의 국가에서 소수 종교그룹들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서로 무슬림들의 마음을 잡는데 모든 공을 쏟고 있는 2019년 대선판도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사진-2012년 3월 12일 름바 함발랑(Lembah Hambalang)에서 쁘라보워가 2014년 그린드라 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고 있다.)
2014년 4월 9일 대선 예비선거에서 그린드라 당은 3등을 차지했지만 쁘라보워는 당시 자카르타 주지자 조코 위도도와 함께 3개월 후인 7월 9일 2차 선거에 진출했다. 이에 따라 2014년 5월 20일 골카르, 통합개발당(PPP), 국민의 명령당(PAN), 번영정의당(PKS), 초승달과 별의 당(PBB)이 쁘라보워 대통령 후보를 지지했다. 이는 전체 표의 48.9%를 점하는 것이었다. 그보다 하루 전 쁘라보워는 전 경제조정장관 하타 라자사(Hatta Rajasa)를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2014년 7월 22일, 선관위가 투표결과를 발표하기로 되어 있던 날, 쁘라보워는 조코 위도도가 과반을 점했음에도 초기 개표결과가 나오기 시작하자 자신의 승리를 주장하며 대선 레이스를 이탈해 버렸다. 예상치 못한 몽니였다. 그는 대규모 부정행위가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민주주의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한 선거라고 대선 이탈의 변을 밝혔고 그와 하타는 대선이 비헌법적이었다고 천명하며 그 결과에 불복했다. 헌법재판소에 청원할 것을 암시하는 그의 연설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2014년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 결과
하지만 자카르타에 근거지를 둔 보워스 아시아 그룹(Bower’s Asia Group)의 더글라즈 래미지(Douglas Ramage)는 그날 쁘라보워의 입장이 1998년 개혁정부가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선거의 합법성을 문제삼은 사건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로서 인도네시아가 ‘전인미답의 지경에 들어서고 있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쁘라보워의 문제제기의 합법성 여부도 논란이 되었다. 대통령 선거법에 따라 쁘라보워는 임의사퇴에 따른 최대 6년 징역과 1천억 루피아(1천만불)의 벌금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그날 저녁 조코 위도도는 대선 승리 공표와 함께 전세계 지도자들의 축하를 받았다.
선거결과발표와 동시에 루피아화 가치는 0.3% 하락했고 자카르타 주식거래지표도 0.9% 빠졌다. 관측통들은 쁘라보워의 부정선거 의혹제기를 수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선거가 대체로 공정하고 자유로웠다고 밝혔다. 인도네시아 대학(UI)의 마스와디 라우프(Maswadi Rauf)는 별 다른 부정선거의 징후를 발견할 수 없었으며 쁘라보워의 사퇴는 패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엘리트들의 전형적인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2014년 8월 21일 인도네시아 헌법재판소는 그의 부정선거의혹을 기각하고 그의 선거패배를 확정했다.
2018년 4월 12일 쁘라보워는 다른 정당들의 충분한 지지를 얻을 경우 2019년 대선에 출마할 것임을 선언했다. 2018년 3월 쁘라보워의 동생 하심은 건강과 자금 등의 문제가 충분히 검토된 후에 당이 대통령 후보를 발표할 것이라 한 바 있었다. 2018년 4월 존 맥베스(John McBeth)는 해양조정장관 루훗 빤자이탄이 쁘라보워와 일련의 회합을 가졌다고 전했다. 이는 쁘라보워-조코 위도도 대선대결구도를 정점으로 끌어올렸다.
2019년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 구도
2018넌 8월 10일 쁘라보워는 2019년 대선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산디아가 우노(Sandiaga Uno)를 선관위에 등록했다. 그는 PKS, PAN, 민주당, 버르까리야 당의 지지를 받았다. 민주당은 유도요노 전 대통령의 장남 아구스 하리무르티 유도요노(Agus Harimurtio Yudhoyono)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겠다는 약속을 쁘라보워가 어겼음에도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쁘라보워는 동티모르에서의 학살과 1998년 민주주의 활동가 납치, 항명, 쿠데타 의혹을 제외하고도 여러가지 구설수에 올라 있다 (사진: 아구스 하리무르티 유도요노는 정계 입문을 위해 소령 계급을 마지막으로 군복을 벗었다)
2017년 11월 탐사저널리즘 국제 콘소시엄이 진행한 조사를 통해 파라다이스 문건(Paradise Papers) 의혹에 거명된 정치인들 명단에 쁘라보워의 이름도 올라 있다고 보도되었다. 파라다이스 문건엔 역외탈세 혐의가 의심되는 이들의 이름이 거론되었는데 인도네시아에서는 수하르토 대통령의 자녀들 일부와 함께 쁘라보워 수비안토도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그의 러닝메이트 산디아가 우노 역시 여기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다.
2017년 9월 18일 쁘라보워는 아버지의 정치경제이론에 대한 책 출판기념회에서 “외국의 연구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2030년에 이르러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경고연설을 했고 그 장면은 2019년 3월 18일 그린드라당 공식 홈페이지에 게시되었다. 어떤 연구결과에 따른 것이냐는 질문에 그린드라 당간부 엘니노 M 후세인 모히(Elnino M. Husein Mohi)는 “쁘라보워가 당대 외국의 다양한 인물들과 관측통들이 쓴 책들을 섭렵했다. 여러분들도 그 책들을 온라인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얼버무렸다. 그 연구라는 것이 사실은 2015년에 발간된 어거스트 콜(August Cole)과 PW 싱어(P.W. Singer)가 쓴 공상과학 소설 고스트 플릿(Ghost Fleet – 유령함대)임이 밝혀졌다. 해당 책의 저자는 저서 시작부분에 “이 이야기는 실제 경향과 테크놀로지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것은 소설일뿐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쁘라보워가 이 책에 대해 언급했음을 안 싱어는 트위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인도네시아 야당 리더가 고스트 플릿을 선거연설에서 열정적으로 인용했다… 이 책 내용에 비해 예상치 않은 많은 반전과 굴곡이 발생했지만 아무튼 정말 대박이 아닐 수 없다.”
2018년 2월 그린드라 당은 쁘라보워의 건강 문제로 그의 가족들이 그의 대통령 후보출마를 반대한다는 추측을 일축했다. 쁘라보워가 심장발작을 일으켜 독일에 치료하러 갔었다는 건강의혹에 대해 그린드라당은 정적들이 만들어낸 가짜뉴스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젊은 시절 쁘라보워의 사진을 통해 그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날렵한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되면 그를 사위로 삼은 수하르토의 마음도 조금 알 것 같다. 게다가 그는 야심만만하고 군인으로서 능력도 출중했다. 그의 군생활 상당부분을 전선이나 다름없는 동티모르에서 가장 힘들다는 특전사 코파수스 정예부대원으로 근무했다.
그의 인간적 파국은 어쩌면 수하르토의 딸과 결혼해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면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다. 매력적인 청년은 인명 경시, 인권침해의 의혹을 받는 고급장교가 되었고 동티모르의 크라라스 학살, 파푸아 마펜두마에서의 민간인 사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민주주의 활동가 납치와 압둘라흐만 와히드 전대통령을 비롯한 옛 재야 유력인사들을 위협하고 회유했다는 부분은 비정하기 짝이 없고 1998년 수하르토의 하야를 전후한 시기에 그가 내린 결정과 대통령, 통합군사령관을 대하던 그의 태도에서는 절박함 속에 내던져진 권력자의 안하무인 인성마저 엿보인다. 하지만 요르단 망명길에서 절치부심했을 마음과 그후 20여년간 다시 권력을 향해 비상하려는 그의 투지가 읽힌다.
그가 이제 먼 길을 돌고 돌아 대통령 후보가 되어 또 다시 인도네시아 국민들 앞에 섰다. 인도네시아는 서민 냄새 물씬 풍기는 조코 위도도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고 궁극의 권력을 누렸던 군 엘리트 출신 쁘라보워의 손을 과연 들어줄 것인가?
2019년 4월 대선을 향해 가는 인도네시아는 다시 뜨거운 열기로 달아오르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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