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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현대사

보로부두르 사원

beautician 2019. 1. 18. 10:00

 


보로부두르
사원(Candi Borobudur) 

 

 

 

 

1. 기초 정보

- 위치: 끄짜마딴 보로부두르(Kecamatan Borobudur- 중부자바 마글랑(Magelang) 군청 소재지인 뭉낏(Mungkid) 으로부터 3킬로미터 거리)

- 건설시기: 서기 770-825 사일렌드라(Sailendra) 왕조 시절

- 복원 : 1911

- 구조 규모: 이음새를 맞추는 방식의 피라미드 형태, 기저 부분은 123미터 x 123미터. 높이 35미터 (중앙탑 포함 42미터 높이)

- 구나다르마(Gunadharma)라는 사일렌드라 왕조시대의 전설적인 건축가가 지은 것으로 알려짐.

 

2. 개요

 

보로부드르 사원 9세기에 세워진 불교사원으로 문띨란(Muntilan)에서 멀지 않은 마글랑군(Kabupaten Magelang)에 위치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사원으로 아홉 개의 플랫폼은 여섯 개의 사각형 층, 세 개의 원형 층으로 되어 있고 맨 꼭대기엔 중앙 돔(Dome)이 있다. 사원 전체에 2,672개의 부조물과 504개의 불상이 있는데 중앙 돔은 72개의 불상에 둘러쌓여 있고 각각의 불상들은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종 같은 형태의 스투파(Stupa) 안에 들어앉아 있다.

 

 

 

 

 

9세기 사일렌드라 왕조에 건축된 이 사원은 인도네시아 고대신앙과 니르바나(Nirvana)를 포함한 불교적 요소들이 혼합된 자바 불교건축 디자인을 따랐다.

 

이 사원에서는 굽타 예술양식의 영향이 엿보이는데 이는 당시 이 지역까지 뻗은 인도의 영향력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에 인도네시아의 토착적 요소들이 담뿍 응축되고 녹아들어 보로부두르를 더욱 인도네시아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 기념비적 사원은 부처에게 바쳐진 신전이며 불교도들의 순례지이기도 하다, 순례자들은 이 사원의 기저에서부터 시작해 사원을 감싸도는 통로를 따라 3개 층을 돌아서 정상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불교의 우주관인 카마다투(Kāmadhātu욕정의 세계), 루파다투(Rupadhatu형상의 세계), 그리고 아루파다투(Arupadhatu-무형의 세계) 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사원은 순례자들을 다양한 계단식 통로과 1,460개의 서술적 부조판들이 벽과 난간들을 장식하고 있는 통로들로 이끈다. 보로부두르 사원은 전 세계에서 불교 부조물들이 멋진 조화를 이룬 가장 거대하고 완벽한 건축물이다.

 

보로부두르가 9세기에 건축되었다가 그후 14세기 자바 힌두왕국들이 몰락하고 이슬람이 전파되면서 방치되고 말았다는 증거들이 존재한다. 이 사원의 존재를 전세계에 알린 것은 1814년 당시 자바 총독대행이었던 토마스 스탬포트 래플스 경(Sir Thomas Stamford Raffles)에 의해서였다. 현지인들이 이 사원에 대해 그에게 속삭인 것이 사원 발굴의 계기가 되었다. 그후 보로부두르는 여러 차례의 복원작업을 거치며 보존노력이 이루어졌다. 가장 대대적인 복원작업은 1975년과 1982년에 인도네시아 정부와 유네스코에 의해 각각 진행되었고 보로부두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보로부두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불교사원으로 미얀마의 바간(Bagan),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와 함께 동남아에서 가장 위대한 고고학적 유적의 하나로 손꼽힌다. 먾은 인도네시아의 불교도들이 이 사원에 모여 부처님 오신날을 기념하곤 한다. 인도네시아 관광산업 측면에서도 보로부두르는 인도네시아의 모든 단일 관광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3. 어원

 

 

 

북서쪽에서 바라본 보로부두르 사원. 사원은 까랑떵아(Karangtengah ) 뜨리 뜨뿌산 비문 (Tri Tepusan inscriptions) 등에도 등장한다.

 

 

 

인도네시아어로는 오래된 사원들을 짠디(Candi) 부른다. 그래서 보로부두르 사원은 짠디 보로부두르라고 한다. 짠디라는 단어는 관문이나 온천과 같은 고대 구조물들을 지칭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보로부두르라는 단어 자체가 어디서 기원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의 다른 고대 사원들 대부분은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보로부두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래플스가 자바의 역사’(Book of Javan History)라는 책에서였다. 래플스는 보로부두르라고 불리는 구조물에 대해 글을 썼다. 그보다 이전의 문서들에서 정확히 같은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고대 자바 문서들 중에 성스러운 불교 성역으로서 부두르(Budur)라고 불리는 구조물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1365 마자빠힛 왕국의 불교학자 음뿌 쁘라빤짜(Mpu Prapanca) 나가라끄레타가마(Nagarakretagama) 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원들은 인근 마을의 이름을 따는 것이 보통이다. 만약 자바어 전통에 따랐다면 인근 보어(Bore)마을의 이름을 부두르보로(Budurboro)라고 불렸을 것이다. 래플스는 부두르라는 말이 아마도 현대 자바어의 부다(Buda-‘고대의라는 의미) 관련있을 것이라 여겼던 같다. 보로부두르란 고대의 보로라는 뜻이라 해석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보로라는 말이 위대한또는 경애하는정도의 뜻이라 여겼고 부두르는 붓다, 부처를 뜻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다른 고고학자들은 산을 뜻하는 자바어 부다라(Bhudhara)에서 부두르라는 말이 기원했다고도 한다.

 

네덜란드 고고학자인 A.J. 버넷 켐퍼스(A.J. Bernet Kempers) 제시한 바에 따르면 보로부두르는 산스크리트어로 Vihara Buddha Uhr라고 쓰는 비아라 베두후르(Biara Beduhur)라는 자바어 발음을 왜곡하여 단순화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다우르(Buddha Uhr)라는 말은 부처의 도시라는 의미라고도 한다. 베드후르라는 단어는 높은 장소 뜻하는 현대의 발리어 단어장에도 아직 남아 있는 자바어로 두후르(dhuhur) 또는 루후르(Luhur-높다)라는 어간에서 발생한 단어다. 이를 종합해 보면 보로부두르란 고지대나 언던 위에 위치한 불교 수도원을 뜻한다고도 있다.

 

 

 

보로부두르로 대변되는 신성한 불교 건축물의 건설과 추인은 뜨망궁(Temanggung)군에서 발견된 두 개의 비문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까랑뜽아의 비문은 서기824년의 것으로 지날라야(Jinalaya)라 불리는 성스러운 건물을 언급하고 있다. 지날라야는 세상의 욕망을 이겨내고 깨달음에 이른 이들이 다다른 지경이란 뜻을 지닌다. 완공을 선포한 것은 사마라뚱가(samaratungga)의 딸 쁘라모다와르다니(Pramodhawardhani)였다고 한다. 842년의 것으로 알려진 뜨리뜨뿌산 비문(Ptrasasti Tru Tepusan)에 부미삼바라(Bhūmisambhāra)라고 불리는 까물란(Kamūlān) 유지보수의 자금조달를 위해 쁘라모다와르다니 공주를 뜻하는 쯔리 까훌루난(Çrī Kahulunnan)이 하사한 시마’(sima)라는 비과세 토지들이 언급되어 있다. 까물란은 원천이란 의미의 물라(mula)애서 온 것으로 조상들, 아마도 사일렌드라 왕조의 것이라 여겨지는 조상들의 명예를 기리는 성스러운 건물을 뜻한다. 캐스패리스는 산스크리트어로 보디삿바훗(Boddhisattvahood)의 열 단계 덕목을 모두 합친 산이라는 부미 삼바라 부다라(Bhūmi Sambhāra Bhudhāra)가 보로부두르라는 이름의 진정한 기원이라 말한 바도 있다.

 

 

 

 

 

 

 

4. 위치

 

 

 

보로부두르 사원은 쌍둥이 화산에 둘러쌓여 있는데 머르바부 (Gunung Merbabu) 머라삐 화산(Gunung Merapi) 포함한다

 

 

 

 

 보로부두르와 빠원(Pawon), 먼둣(Mendut) 사원들은 모두 일직선 상에 건설되었다.

 

 

 

1) 세 개의 사원

 

족자로부터 북서쪽으로 약 40킬로미터, 수라카르타로부터는 서쪽으로 86킬로미터에 위치한 보로부두르는 두 쌍의 쌍둥이 화산인 순도로-숨빙 (Sundoro-Sumbing) 화산과 머르바부-머리삐(Merbabu-Merapi) 화산 사이, 그리고 쁘로고(Progo) 강과 엘로(Elo)강 사이 고지대에 있다. 이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구전에 따르면 꺼두 평원(Kedu Plain)이라 불리는 이 지역은 농지가 매우 비옥해 자바의 정원이라 불리며 자바 성지로도 통한다. 20세기 초 보로부두르가 복원되면서 보로부두르, 빠원(Pawon), 먼둣(Mendut) 등 세 개의 사원이 모두 일직선 상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세 개의 사원 사이의 뭔가 의식(儀式)적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게 분명히 어떤 의식을 따른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2) 고대 호수의 가설

 

이 사원을 감싼 호수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가설에 대해 20세기 고고학자들 사이게 매우 열띤 토의가 이루어진 바 있었다. 1931년 네덜란드 예술인이자 힌두 및 불교건축을 연구한 학자 니유벤깜프(W.O.J. Nieuwenkamp)는 꺼두 평원이 예전에는 하나의 호수였고 보로부두르는 그 호수 한 가운데에 떠 있는 연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로부두르는 해발 265미터 암반 위, 과거 호수였다가 말라버린 평원으로부터 15미터 높이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두마쉐이(Dumarçay)는 타니카이모니(Thanikaimoni) 교수와 함께 1974년과 1977년 언덕을 파들어간 초기 구덩이들과 바로 연한 남쪽 평원에서 토양 샘플을 각각 채취해 분석했다. 타니카이모니 교수는 그 토양에서 나온 꽃가루와 포자 등 내용물 조사를 거쳐 보로부두르 사원이 건설되던 당시 그 지역에서 어떤 종류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는지를 연구했다. 하지만 그 결과 호수나 연못 또는 습지 등 수중환경에서 자라날 만한 식물들로 특정할 만한 어떠한 포자나 꽃가루도 발견하지 못했다.

 

보로부두르를 둘러싼 지역은 지금도 그렇듯 사원 건설 당시에도 농지와 야자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시저 보테(Caesar Voûte)와 지형학자인 노씬 박사(Dr J.J. Nossin) 1985-1986년에 걸친 현장조사를 통해 보로부두르의 호수가설을 검증하려 했고 그 결과 건설 당시 보로부두르를 둘러싼 호수가 없었다는 사실과 이곳이 성지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이러한 발견을 담은 보로부두르와 관련된 일부 오래된 질문에 대한 새로운 시각’(A New Perspective on Some Old Questions Pertaining to Borobudur) 이라는 논문이 2005년 유네스코에서 발간된 보로부두르의 복원’("The Restoration of Borobudur")이라는 책자에 담겨 발표되었다.

 

 

 

5. 역사

 

1) 건설

 

보로부두르의 건설목적이나 건축과정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그 건축기간에 대해서는 사원 기저 숨겨진 곳에 있는 부조물들의 비교 및 8~9세기 사이 왕실 기록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각인들을 통해 그 대강을 추정할 수 있다. 보로부두르의 건축은 서기 800년경 전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사일렌드라 왕조가 그 절정에 이르러 중부자바의 마타람 왕국을 다스리던 시기인 서기 760년에서 830년 사이가 유력하다. 사일렌드라 왕조의 위력이 스리위자야 왕국은 물론 태국의 남부지역, 인디아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필리핀의 왕국들, 북부 말라야 지역(끄다 Kedah, 인디아어로는 고대 힌두왕국인 까다람 Kadaram이라고도 알려짐), 캄보디아의 크메르(Khmer) 지역까지 미치던 시기였다. 75년 걸려 건축되어 사마라뚱가(Samaratungga) 왕의 치세인 서기 825년경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자바를 다스리던 힌두 또는 불교 통치자들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부분들이 남아 있다. 사일렌드라인들은 강고한 불교신자들로 알려져 있으나 소요메르토(Sojomerto)에서 발견된 돌판 비문에서는 그들이 힌두교도였다는 뉘앙스를 비추기 때문이다. 당시 수많은 불교 및 힌두교 유적들이 꺼두 평원지역을 중심으로 한 평지와 산속에 지어졌다. 보로부두르를 포함한 불교유적들이 당시 힌두교 시바 쁘람바난(Hindu Shiva Prambanan) 사원과 같은 시기에 건축되었다. 서기 732년에는 시바신을 섬기는 산자야(Sanjaya)왕이 보로부두르로부터 10km 동쪽에 시바링가 성역(Shibalinga Sactuary)을 만들게 했다.

 

보로부두르를 비롯한 불교사원들의 건축이 당시 가능했던 것은 산자야 왕의 바로 다음 후계자인 라까이 빠낭까란(Rakai Panangkaran)이 불교신도들에게 해당 사원들의 건축을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빠낭까란 왕이 깔라산(Kalasan)의 마을을 불교 공동체에게 기증하는 성의를 보였다는 사실도 서기 778년에 만들어진 깔라산 헌장 비문에 적혀있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고고학자들은 당시 힌두 왕이 불교 기념탑들의 건설을 후원하고 불교 왕들도 마찬가지로 행동했으므로 사실상 힌두교와 불교 사이에 심각한 종교적 갈등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불교도인 사일렌드라 왕조와 시바신을 섬기는 산자야 왕조가 서로 라이벌 관계였던 것 만은 분명해 보인다. 산자야 왕조는 서기 856년 라뚜바카 고원 (Ratubaka Plateau)의 전투에서 사일렌드라 왕조를 멸망시킨다. 유사한 혼선이 쁘람바난 지구의 라라 종그랑 사원(Lara Jonggrang temple- 이에 대한 보조설명을 뒤에 첨부함(역주))에서도 발견된다. 라라 종그랑 사원은 산자야 왕조의 정복자 라까이 빠끼딴(Rakai Pakitan)이 보로부두르 사원에 대해 반응하여 건설한 것이라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일부 다른 학자들은 라라 종그랑 사원에서도 사일렌드라 왕조의 채취가 느껴지므로 실제로는 이 두 왕조가 평화롭게 공존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2) 방치

 

보로부두르 사원은 수 세기 동안 여러 겹의 화산재와 밀림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이 사원이 그렇게 방치된 사연은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언제부터 이 사원이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불교도들의 순례가 멈추었는지 역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서기 928년에서 1006년 사이 음뿌 신독 왕(King Mpu Sindok)은 몇 차례의 화산폭발을 겪은 후 메당 왕국(Medang Kingdom)의 수도를 동부 자바 지역으로 옮겼다. 이 천도 사건이 보로부두르 사원의 방치를 불러온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대략 그 시기가 방치시기와 맞물린다는 주장이 많다. 이 사원에 대해 1365년 마자빠힛 왕조 시대의 문학가 음뿌 쁘라빤짜(Mpu Prapanca)가 나가라끄레타가마(Nagarakretagama)라는 문서에서 부두르의 사원이라고 애매하게 언급한 바 있다. 1976년 수끄모노(Soekmono) 역시 이 지역 사람들이 15세기 들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 사원이 해체되었다고 민간에서 믿고 있다는 언급을 남긴 바 있다.

 

이 사원의 과거의 영광에 대한 민간의 이야기는 이후 악운, 절망 등과 결합된 토속적 미신으로 변모해 갔지만 사원 자체가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18세기에 쓰여진 두 개의 자바 역사서(Babad)들이 이 사원과 관련해 악운이 찾아왔던 여러 경우들을 언급하고 있다. 자바 땅의 이야기(자바 역사서 – Babad tanah Jawi)에서는 이 사원이 1709년 마타람의 수수후난 빠꾸부워노 1세에 항거해 반란을 일으킨 마스 다나(Mas Dana)의 치명적 지점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역사서에 따르면 반란군은 레디 보로부두르(Redi Borobudur) 언덕이 포위되었다가 진압된 후 국왕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또한 마타람 왕국의 역사서(Babad Mataram)에서는 족자 술탄국의 태자 몬쪼나고로(Pangeran Monconagoro)1757년에 당한 악운이 이 사원과 연관 있다고 시사하고 있다. 이 사원을 방문하는 것이 악운을 가져온다는 금기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에 갇힌 기사(knight who was captured in a cage )를 가져왔다라고 기록된 것을 가져왔다라고 하는데 이는 구멍이 뚫린 수투파(Stupa) 안에 앉은 불상을 뜻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그런 후 그는 궁전에 돌아와 곧 병으로 쓰러진 후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다.

 

 

 

3) 재발견

 

자바섬은 1811년부터 1816년 사이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곳을 다스릴 인물로 지명된 것은 총독대행 토마스 스탬포트 래플스(Thomas Stamford Raffles)였는데 그는 원래 자바 역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자바 전역을 여행하는 동안 유물들을 수집하고 지역주민들과의 접촉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1814년 스마랑 지역에 시찰여행을 나갔을 때 그는 깊은 정글 속 부미스고로(Bumisegoro)라는 마을 가까이에 거대한 유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는 그곳을 직접 찾아가는 대신 헤르만 코르넬리우스(Hermann Cornelius)라는 네덜란드인 기사를 보내 답사하도록 했는데 헤르만은 1806-1807년 사이에 있었던 다른 유적탐사를 통해 스마랑의 세우(Sewu) 유적지대를 발견한 인물이기도 했다. 코르넬리우스는 두 달 동안 200명의 탐사대원들을 지휘해 정글의 나무들을 베어내고 수목들을 불사르며 발굴을 시도해 유적의 모습을 드러나게 했다. 유적은 붕괴 위험이 있었으므로 전체를 한꺼번에 발굴해 내지는 않았다. 코르넬리우스는 자신이 발견한 바를 여러 장의 그림과 함께 래플스에게 보고했다. 실제로 래플스는 코르넬리우스와 탐사대의 놀라운 발견과 노고에 대해 몇 마디 치하의 말을 한 것뿐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이 유적을 세상에 소개한 발견자로서 이름을 올리게 된다.

 

 

 


 

크리스티안 로더베익 하르트만(Christiaan Lodewijk Hartmann)은 꺼두 지역을 담당하던 부지사로 코르넬리우스가 시작한 일을 이어받아 발굴을 계속한 끝에 1835년 마침내 전체 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하르트만은 공식적이기보다는 좀 더 개인적 관심으로 보로부두르를 대했다. 그는 거기서 한 자신의 활동을 모두 보고하지 않았는데 특히 중앙 스투파에서 거대한 불상을 발견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의 보고서에는 그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 1842년 하르트만은 중앙 돔을 조사했지만 그가 무엇을 발견했는지는 전해지지 않으며 현재도 중앙 돔은 그 내부가 비어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부는 네덜란드 기사인 프란스 카렐 빌센(Frans Carel Wilsen)과 얀 프레더릭 게릿 브루문트(Jan Frederik Gerrit Brumund)에게 유적의 조사를 맡겼는데 빌센은 사원을 조사하면서 부조 조각품들을 수 백장의 스케치로 옮겨 그렸고 브루문트는 세부조사를 진행하여 1859년에 작업을 완료했다. 총독부는 부르문트의 조사를 바탕으로한 기사를 빌센의 그림들과 함께 출판하려 했으나 브루문트가 협조를 거부했다. 총독부는 별 수 없이 콘라두스 레이만스(Contradus Leemans)라는 또 다른 학자에게 의뢰해 브루문트와 빌센의 자료들을 토대로 한 권의 학술저서를 발간하게 했다. 1873년 마침내 보로부두르의 세부조사 내용을 수록한 첫 학술서가 발간되었고 이듬해 불어 번역본도 출간되었다. 보로부두르의 첫 사진촬영을 한 사람은 네덜란드령 플레미시(Dutch-Flemish) 지역 출신 세김방식 조각사 이시도어 판 킨스버르겐(Isidor van Kinsbergen)이었다.

 

이 유적에 대한 이야기가 서서히 전파되면서 유적사냥꾼들과 도굴범들에게 유물발굴과 수입의 터전이 되었다. 1882년 문화부 조사국장은 유적의 불안정한 상태로 인해 보로부두르를 완전히 해체하고 부조 조각품들을 모주 박물관으로 옮기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결과 총독부는 바타비아 예술 과학 협회의 고고학작 유물 큐레이터 빌렘 삐에터 그로에네벨트(Willem Pieter Groeneveldt)에게 부지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유적 지대의 실제상황을 조사하도록 명했다. 그는 조사보고서를 통해 그러한 우려들이 근거 없다고 지적했고 이로서 유적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보로부두르는 기념품 수집장소로 인식했으므로 많은 조각품들의 일부가 약탈당했고 네덜란드 총독부는 이를 승인하기까지 했다. 1896년 샴 왕국의 출라롱콘 국왕(King Chulalongkorn)이 자바를 방문했을 때 8개 마차분의 조각품들을 실어가도록 총독부가 승인해 주었던 것이다. 이때 부조 조각패널 30장이 포함되었는데 다섯 개의 불상, 두 개의 사자상, 한 개의 석상, 계단과 관문에서 떼어낸 여러 개의 문양들, 그리고 드바라팔라(Dvarapala)라 부르는 관문 수호신 석상 등이다. 이들 중 여러 개의 유물들, 특히 사자상, 드바라빨라, 깔라(kala), 마카라(makara), 거대한 물방울 모양 등은 방콕 소재 국립박물관 내 자바 아트 룸(Java Art Room)에 지금도 전시되어 있다.

 

 

 

4) 복원

 

 

 

 

(왼쪽)1911 에릅(Van Erp) 복원 직후 모습. 사진에는 중앙 스투파의 차트라 첨탑(chattra pinnacle) 복구되어 있는데 지금은 철거되었다.  (오른쪽) 카르마비방가 박물관(Karmawibhangga Museum)에는 보로부두르의 중앙 스투파에서 가져온 미완성 불상이 있어 불교도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고 뒤에는 중앙 스투파에 설치했던 차트라 첨탑이 놓여 있다.

 

 

 

보로부두르는 1885년 네덜란드 기술자이자 족자 고고학 협회 회장이던 얀 빌렘 에이저만(Jan Willem Ijzerman)이 사원의 숨겨진 기저부분을 찾아 내면서 다시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이 기저 부분을 드러낸 사진들은 1890-1891년 기간에 찍힌 것들이다. 이 발견을 접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부는 이 사원을 보존하기 위한 절차에 착수했다. 1900년 총독부는 예술 역사가인 얀 라우렌스 안드리에스 브란데스(Jan Lourens Andires Brandes), 네덜란드군 공병장교 테오도어 판 에릅(Theodoor van Erp), 공공사업부 건축기사인 벤야민 빌렘 반더 카머(Benjamin Willem van de Kamer) 등 세 명의 공무원들로 구성된 특임단을 구성했다.

 

1902년 이 특임대가 제출한 제안서는 세 단계의 계획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 계획은 이러했다. 첫째, 각 모서리들의 재정립, 근접한 부분들을 위협하는 바위들 제거, 첫 번째 난간의 보강, 여러 틈새와 아치형 관문, 스투파들과 중앙 돔 등을 복원한다. 둘째, 안쪽 뜰을 막은 후 적절한 보수공사를 진행해야 하며 바닥과 배수시설을 복원해 배수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셋째, 헐거운 돌들을 모두 제거하고 사원 전체를 첫 번째 난간 부분까지 철저히 세척, 마모되어 형태가 바뀐 돌들을 제거하고 중앙 돔을 복원한다. 이를 위한 전체 비용은 당시 기준 48,800 네덜란드 길더로 추정되었다.

 

  복원작업은 테오도어 판 에릅의 지휘 아래 아나스틸로시스(Anastylosis- 원형대로 재건: · 사라진 유산을 원래의 재료와 기법으로 새로 세운다는 뜻의 고고학 전문용어-역주) 원칙에 의거해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진행되었다. 7개월은 사원 주변의 땅을 파헤치면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부처상들의 잘린 머리나 부조 조각판들의 존재여부를 확인했다. 판 에릅은 상층부의 원형 플랫폼들과 스투파들을 분해한 후 재조립했다. 이 과정에서 판 에릅은 사원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 이상의 것들을 발견했다. 그는 또 다른 제안서를 제출해 34,600 길더의 추가 비용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외견상 보로부두르는 이제 과거의 영광을 거의 재현해 내는 듯했다. 판 에릅은 더 나아가 중앙 스투파 꼭대기에 3단 우산 같은 모습을 한 차트라(Chattra) 첨탐을 조심스럽게 재건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첨탑 재건을 위한 원래의 돌들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를 대며 그 차트라를 오히려 분리해 내렸다. 그것은 보로부두르 첨탑의 원래 디자인이 사실상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제거된 차트라는 보로부두르 사원에서 수백 미터 북쪽에 위치한 카르마비방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제한된 예산 때문에 복원 작업은 우선 조각품들의 세척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므로 판 에릅은 배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내지 못했다. 그 후 15년간 부조물들이 붙은 벽면은 부풀어 오르고 부조물들에 새로운 금이 가는 등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판 에릅이 사용한 콘크리트에서 침출되어 나온 알칼리염과 수산화칼슘은 구조물의 다른 부분으로 침투되면서 또 다른 문제들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보다 철저하고도 긴급한 보수작업이 필요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왼쪽그림) 1973년 복원작업에서 콘크리트와 PVC 파이프를 넣어 보로부두르 사원의 배수시스템을 개선시켰다.

 

 

 

그후 자잘한 복원작업들이 계속 이루어졌으나 사원의 보존을 담보하기엔 충분치 못했다. 더욱이 제2차 세계대전과 1945년부터 1949년에 걸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중에는 보로부두르 복원 작업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사원은 기후와 배수문제로 더욱 상태가 나빠졌는데 습기로 인해 구조물 내의 토양 부분이 팽창하면서 석재 구조물들을 바깥으로 밀어냈고 벽이 기울어지기에 이르렀다. 1950년대에는 보로부두르의 일부가 금방이라도 붕괴할 위험에 처했다. 이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1965년 보로부두르를 비롯한 다른 기념비들의 노후문제에 대처할 방법들에 대해 유네스코에 조언을 구했다. 1968, 당시 인도네시아 고고학 지원재단의 수장이 되어 있던 수크모노 교수는 보로부두르를 살리자라는 캠패인을 시작해 대대적인 복원 프로젝트를 조직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1960년대 말 인도네시아 정부는 사원 보존을 위한 대규모 보수작업에 국제사회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1973년 보로부두르 복원을 위한 마스터플랜이 만들어졌다. “보로부두르 보존 프로젝트 수행을 위한 자발적 기부에 관한 협약”(Agreement concerning the Voluntary Contributions to be Given for the Execution of the Project to Preserve Borobudur)1973129일 파리에서 서명되었고 다섯 개 국가가 이 보수작업에 참여했다. 호주는 20만 호주달러, 벨기에는 25만 벨기에 프랑, 사이프러스는 10만 사이프러스 파운드, 프랑스는 미화 77,500, 그리고 독일은 2백만 도이치 마르크를 출연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와 유네스코는 1975년부터 1982년에 걸친 대대적인 복원 프로젝트를 통해 사원을 완전히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일을 맡아 실질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이 복원작업을 통해 백만 개가 넘는 돌들을 들어내 별도의 장소에서 조각 맞추기 직소 퍼즐처럼 각각의 돌들에 번호를 매기고 카탈로그에 담고 세척 및 보존처리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보로부두르는 마치 새로운 보존 기법의 시험장처럼 되었고 돌들을 약화시키는 미세유기물들을 억제하는 새로운 기법들도 시도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원의 기초를 보강해 안정시켰고 1,460개의 돌판들이 세척과정을 거쳤다.  이 복원작업은 다섯 개의 사각형 플랫폼을 들어내고 배수관을 구조물 안에 설치해 배수시스템을 개선하는 것도 포함했다. 방수처리와 필터 막들도 추가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600명 가량이 복원작업에 동원되었고 미화 약 690만불(USD6,901,243)의 비용이 소요되었다.

 

복구작업이 끝난 후 유네스코는 1991년 보로부두르 사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그 해당 문화항목은 다음과 같았다. (1) 인류의 창조적 천재성을 보여주는 마스터피스, (2)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여 세계의 문화적 영역 안에서 건축과 기술의 발전, 기념비적 예술품, 도시계획 또는 조경에 있어 인문학적 가치의 중요한 변곡점을 보여줌, (6) 주목받아 마땅할 세계적 중요성을 띈 괄목할 만한 사건이나 생활전통, 이상, 신념, 예술적 또는 문학적 작품 등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것.

 

201712월에 보로부두르 중앙 스투파의 야스티(yashthi)에 차트라를 설치하자는 의견이 다시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우산 형태의 첨탑을 복원하는 데에는 철저한 연구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는 전문가의 의견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2018녀 초까지도 차트라의 복원작업은 재개되지 않았다.

 

 

 

5) 현재

 

 

 

(1) 종교행사

 

 

1973년 유네스코가 자금을 지원한 대규모 복구작업 이후 다시 순례자들이 보로부두르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 매년 한번 5월이나 6월의 보름날 인도네시아의 불교도들은 싯다르타 가우타마(Siddhārtha Gautama)의 탄생과 죽음 및 그가 깨달음을 얻어 석가모니불이 된 날을 기념하는 와이삭(Waisak)을 지키는데 불교도들은 먼둣(Mendut)에서 빠원(Pawon)에 이르는 세 개의 사찰을 중심으로 행사가 갖고 보로부두르에서 모든 행사가 마무리된다. (왼쪽) 상층부 플렛품에서 기도하는 불교 순례자들)

 

 

 

(2) 관광

 

보로부두르 사원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많이 방문자들이 찾는 관광지이기도 하다. 1974년 통계에 따르면 당시 26만명의 관광객들 중 36천명이 외국인이었다. 그 숫자는 매년 증가해 1900년대 중반 동남아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 250만 명에 이르렀고 이중 80%가 내국인 관광객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광개발에 소외된 지역사회는 맹비난을 쏟아 내기도 했다.

 

2003년에는 보로부두르 인근의 주민들과 영세 상인들이 여러 번 자체 회의를 거듭하며 데모를 통해 지방정부가 자바월드라는 이름으로 지으려 하는 3층짜리 상가 단지의 건설계획을 반대하고 나섰다.

 

2004PATA 최우수상, 2011PATA 금상, 2012PATA 금상을 시상하며 국제 관광업계의 영예가 보로부두르 고고학 공원에 주어졌다. 또한 2012년 보로부두르 사원은 세계에서 가장 큰 불교 고고학 부지로서 세계기록 기네스북에 실렸다.

 

(왼쪽) 보로부두르에서 열린 와이삭 행사

 

 

 

(3) 보존

 

유네스코는 현재 보존상태에 대한 세 가지의 우려영역을 특정해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방문자들에게 의한 훼손, (2) 부지 남동쪽 지역의 토양부식, (3) 망실된 부분들에 대한 분석과 복원.  부드러운 토양과 잦은 지진 및 폭우는 구조물의 안정성을 저해하는 요소다. 이중 지진은 가장 중대한 위협이 된다. 지진은 석조 구조물들이 떨어져 내리게 하고 아치형 다리들을 붕괴시킬 뿐 아니라 토지 자체가 물결치며 움직여 구조물에 더욱 심각한 파괴력을 미친다.

 

스투파가 점차 유명해지면서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오게 되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인도네시아인들이다. 거의 전체 층에 걸쳐 만지지 말라는 경고판이 붙어있고 확성기를 통해 정기적으로 경고방송도 나가고 심지어 경비원들까지 배치되어 있지만 부조 조각물이나 석상들에 가해지는 훼손은 늘상 일어나는 일로 사원 보존상태를 크게 악화시키는 중대한 문제가 되고 있다. 2009년 이후 하루 허용 방문객 인원을 한정하는 시스템이나 반드시 관광가이드가 동행하도록 하는 강제 방침은 사실상 실행되지 않고 있다.

 

20148월 보로부두르 사원 보존당국은 방문객들의 신발과 마찰하여 돌계단들이 심각하게 마모되었다는 보고서를 냈다. 보존당국은 앙코르와트 사원의 경우처럼 기존의 돌계단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 계단을 덧대 설치하는 것을 계획했다.

 

 

 

(4) 치유작업

 

 

 

보로부두르 사원은 201010월과 11월 머라삐 화산 분출로 인해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113일에서 5일 사이에 화산재가 분화구로부터 28킬로미터 남서쪽에 위치한 사원 지구 일대에 떨어져 사원 석상들 위에 2.5센티미터 두께로 쌓였다. 이 화산재는 인근의 초목들을 고사시킬 정도의 산성을 띄고 있었으므로 산성 화산재가 이 역사적 유적에 피해를 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우려했다. 사원 지구는 화산재 세척을 위해 115일부터 9일까지 문을 닫았다. (왼쪽: 머리삐 화산과 족자로부터 보로부두르의 위치)

 

유네스코는 2010년 머리피 화산 분화 이후 보로부두르 사원의 회복작업 비용의 일부로서 미화 300만 달러를 기부했다. 사원의 구조물을 구성하는 돌 55천개 이상이 그해 11월 폭우가 온 후 진흙으로 막혀버린 배수시설 복구를 위해 분해되기도 했다.

 

20121월 독일인 암석보존 전문가 두 명이 사원에서 열흘을 보내며 상태를 분석한 후 장기 보존을 담보할 몇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해 6월 독일은 사원의 상태회복을 휘한 두 번째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비용으로 미화 13만 달러를 유네스코에 기부했다. 이에 따라 암석보존, 미생물학, 구조역학, 화학기술학 전문가 여섯 명이 6월의 한 주를 보로부두르에서 보낸 후 9월과 10월에 재방문하였다. 이는 그해 1월 보고서에서 제안된 보존조치를 실행하기 위한 일환으로 정부 공무원들과 젊은 보존 전문가들의 역량을 함양하는 활동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2014214일 족자로부터 200킬로미터 떨어진 동부자바의 껄룻 화산(Kelud volcano) 분화로 인한 화산재 영향을 심하게 받은 족자와 중부자바의 주요 관광지 보로부두르, 쁘람바난, 라뚜보꼬(Ratu Boko) 등이 관광객들에게 문을 닫았다. 인부들을 보로부두르의 주요 스투파들에 덮개를 씌워 화잔재로부터 구조물들을 보호하려 했다. 껄룻 화산은 2014213일 대폭발했고 그 폭발음이 족자까지 들려왔다.

 

 

 

(5) 위협요소들

 

1985121일 아홉 개의 폭탄이 터져 스투파 아홉 개를 크게 훼손했다. 이 테러를 포함해 1980년대 중반 일련의 폭탄 테러를 배후 조종한 맹인 무슬림 설교자 휴세닝 알리 알 하브시에(Husein Ali Al Habsyie)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실제로 폭탄을 설치했던 두 명의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원들은 각각 20년형을 받았고 또 다른 연루자 한 명도 13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2006527일 강도 6.2의 지진이 중부자바의 남쪽 해안을 강타했다. 이로 인한 족자와 인근지역에 심대한 손실과 인명피해가 발생했지만 보로부두르는 건재했다.

 

20148월엔 자신들이 IS의 인도네시아 지부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보로부두르와 인도네시아 내의 다른 석상 유물들을 파괴공격할 것이라는 SNS상의 위협에 따라 예방차원에서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군경이 보로부두르의 안팎 경계를 강화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CCTV 카메라 보수와 추가설치가 이루어졌고 사원지구 안팎의 야간순찰도 시작되었다. 이슬람 극단 지하드주의자들은 이슬람의 가르침을 엄격히 해석해 의인화된 형상의 조각품들을 우상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6) 관광객 포화문제

 

보로부두르의 좁은 계단을 엄청난 숫자의 방문객들이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돌계단이 심각하게 마모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돌의 표면이 부식되면서 점점 얇아지고 약해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로부두르는 2,033개의 돌계단들이 주로 동서남북 네 방향의 통로에 설치되어 있다. 그중 1,028개의 계단, 즉 전체의 49.15%가 심하게 마모된 것으로 밝혀졌다.

 

더 이상의 마모를 방지하기 위해 201411월 보로부두르 사원 동쪽의 올라가는 통로와 북쪽의 내려가는 통로 두 군데의 주요 통로들에 나무 구조물이 덧대어졌다. 이와 유사한 기법이 캄보디아의 앙코로와트 사원과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도 사용된 바 있었다. 20153월 보로부두르 보존센터는 계단에 고무를 덧대는 추가적인 조치를 제안한 바 있고 사원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샌들을 지급하는 방법도 검토되었다.

 

 

 

6. 건축구조

 

보로부두르 재건 중에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힌두신앙이나 인디아 이전시대의 신앙을 추종하던 이들이 이 부지를 불교도들이 사용되기 이전부터 보로부두르의 언덕에 거대한 구조물을 건축하기 시작했다는 시사점들을 발견했다. 이 구조물의 기반은 어떤 힌두 또는 불교 사원의 구조와도 다른 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최초의 구조물은 힌두나 불교보다 오히려 좀더 자바의 토착적인 것이었다고 추정된다.

 

 

 

1) 설계

 

 

 

  보로부두르는 한 개의 거대한 스투파 형태로 지어졌다. 구조물을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거대한 불교식 탄트라인 만달라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는 불교의 우주관과 관념의 속성을 동시에 상징하는 것이다. 원래의 기반은 가로세로 약 118미터의 정사각형을 하고 있다. 구조물은 아홉 개의 플래폼으로 구성되는데 이중 아래쪽 여섯 개는 사각형, 위쪽 세 개는 원형으로 되어 있다. 위쪽 플랫폼에는 72개의 작은 스투파들이 중앙의 큰 스투파를 감싸고 있는 형태다. 각각의 스투파는 기본적으로 종 모양을 하고 있고 장식문양처럼 계산된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으며 그 안에 앉아있는 불상을 볼 수 있다 (왼쪽) 보로부두르 기단계획은 만달라 형태를 하고 있다.

 

보로부두르의 설계는 기본적으로 계단식 피라미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 이전에 인도네시아 선사시대인 오스트로네시안 거석문화(prehistoric Austronesian megalithic culture)시대에 뿐덴버룬닥(Punden Berundak)이라 불리는 흙무덤과 바위 계단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식 구조물이 건설된 바 있는데 이는 찌솔록(Cisolok) 인근의 빵구양안(Pangguyangan), 꾸닝안(Kuningan) 인근의 찌빠리(Cipari) 등지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바위 피라미드의 건설은 산이나 고지대에 선조들의 혼령 또는 향(hyang-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적 존재)이 머무른다는 토속신앙을 기반하고 있다. 뿐덴버룬닥의 계단식 피라미드가 보로부두르 사원의 기본 디자인으로 보로부두르는 토속 거석문화의 연장선에서 마하야나 불교(Mahayana Buddhism)의 사상과 상징성에 결합한 결과물이다. 마하야나 불교는 테라바다 불교(Theravada Buddhism)과 함께 불교의 2대 본류를 형성한다.

 

 

 


 

 사원은 불교 세계관의 세 개의 왕국을 형상화한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이는 카마다투(kamadhatu-욕정의 세계), 루파다투(Rupadhatu-형상의 세계), 아루파다투(Arupadhatu -무형의 세계)가 그들이다. 일반 중생들은 그들의 삶을 가장 낮은 단계인 욕정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모든 욕정을 불사른 이들은 다음 생에서는 욕정의 세계를 떠나 형상의 세계로 한 단계 올라가게 된다. 그들은 형상들을 볼 수 있지만 가까이 갈 수는 없다.

 

이제 완전한 부처의 지경에 이르면 형상과 경험적 현실을 뛰어 넘어 가장 순수하고 가장 궁극적 단계인 무형의 대양(大洋), 즉 열반(니르바나 Nirvana)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영혼은 더 이상 세속적인 형태에 묶이지 않고 윤회(삼사라-Sasāra)의 굴레를 떠나 수냐타(Śūnyatā,) 즉 무아지경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카마다투는 기저 부분에서 상징화되어 있고 루파다투는 몸통부분 다섯 개의 플랫폼에서, 아루파다투는 맨 위의 세 개의 원형 스투파와 중앙 가장 크고 높은 스투파로 표현된다. 이들 세 단계 사이의 건축학적 특징들도 은유적인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들어 루파다투 단계의 사각형의 세밀한 장식들은 아루파다투 단계에 이르면 모두 사라지고 평범하고 둥근 플랫폼들을 형성하는데 이는 인간들이 아직 형상과 이름에 얽매여 살고 있는 형상의 세계에서 무형의 세계로 변화해 감을 상징한다.

 

보로부두르에서는 순례자들의 군중예배가 진행되기도 한다. 순례자들은 계단과 복도들을 통해 가장 위쪽의 플랫폼으로 안내된다. 각 플랫폼은 깨달음의 각 단계를 표현하고 있다. 순례자들을 인도하는 이 통로들은 애당초 불교 세계관을 상징하도록 디자인되었다.

 

1885년 사원 기저에 숨겨진 구조물이 발견되었다. 숨겨진 기저는 여러 부조 조각품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중 160개가 카마다투를 표현한 서사였다. 나머지 부조물들은 짧은 문장들이 각인되어 있었는데 이는 당시 조각가들에게 어떤 장면들을 조각해야 하는지 지시하는 내용들이었다. 이 기저 부분은 상자 안에 넣은 듯 감추어져 있었다. 왜 그리 했는지는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우선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사원 구조물이 언덕 속으로 침하되는 치명적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그렇게 덧씌워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건축과 도시계획에 대한 인도 고대문서인 바스투 샤스트라(Vastu Shastra)에 따르자면 숨겨진 기저부분이 잘못 디자인되어 있어 이를 감추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이 외곽기반은 심미적이고도 종교적인 배려를 담고 매우 구체적으로 세심하게 만들어져 있다.

 

 

 

2) 건물구조

 

55 입방미터의 안산암 바위들이 인근 채석장에서 사원으로 운반되었다. 바위들은 규격에 맞게 잘려 해당 부지로 옮겨와 모르타르를 사용하지 않고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쌓아올려졌다. 바위 이음새를 짜맞추기 위해서 노브(knob), 인덴테이션(indentation), 도브테일(dovetail) 등이 사용되었다(주로 목재건물 지을 나오는 용어들-역주). 스투파들의 지붕과 틈새들, 아치형 관문들은 코르벨링 방식(Corbelling method) 만들어졌다. 부조 조각품들은 구조물이 완성된 이후 만들어진 것들이다. (왼쪽) 단면도를 보면 기저와 몸통, 꼭대기의 높이는 4:6:9 비율로 되어 있다.

 

사원은 이제 폭우를 견딜 양호한 배수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구조물 내 물의 범람을 막기 위해 100개의 배수꼭지가 각 모서리마다 거인이나 힌두교 전설의 물속 괴물 마카라(makara)의 형상을 한 낙수홈에 설치되었다.

 

 

 

 

 

 

 

보로부두르는 같은 목적으로 지어진 다른 건축물들과는 그 설계 측면에서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평평한 지반이 아니라 자연 언덕 위에 지어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건축기법 자체는 자바의 다른 사원들과 대동소이하다. 다른 사원들에서 보이곤 하는 안쪽 공간이 없지만 전반적인 디자인은 피라미드와 비슷하다는 측면에서 보로부두르는 사원이라기보다는 스투파로서의 역할이라 보는 이들도 있다. 스투파는 불상을 모신 제단이라는 의미가 크다. 때때로 스투파는 불교에 대한 헌신의 상징이란 의미만을 가지고 지어지기도 했다. 한편 사원은 기본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장소다. 구조물의 설계의 세밀한 복합성을 따져보면 보로부두르는 사실상 사원이 맞다. (사진: 보로부두르 사원에 설치된 아치형 깔라(Kala) 관문과 부조판이 이어진 좁은 통로)

 

이 콤플렉스를 지은 건축가 구나다르마(Gunadharma)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이름은 특정 비문에서가 아니라 자바의 민화에 등장한다.

 

건축이 진행될 당시 사용되었던 측정단위는 탈라(tala)였다. 이는 인간의 얼굴에서 이마로부터 턱끝까지의 길이 또는 손가락을 각 방향으로 힘껏 벌렸을 때 엄지손가락 끝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를 뜻한다. (우리의 한 뼘개념에 가까움-역주). 그래서 이 단위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법한데 보로부두르의 구조물은 한 치의 오차도 없다. 1977년에 진행된 측량을 통해 사원 구조물 전반에서 4:6:9의 비율이 종종 발견되었다. 보로부두르의 설계자는 전체 용적의 정확한 입체면과 대칭 기하학을 망라하는 공식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이 비율은 보로부두르 인근의 빠원과 먼둣 사원의 디자인에서도 발견된다. 고고학자들은 4:6:9의 비율과 탈라 단위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의 경우와 같이 태양력적, 천문학적, 우주학적 의미를 띄고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주 구조물은 기저, 몸통, 상층부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기저는 123m x 123m 사이즈에 4미터 높이의 벽을 가지고 있다. 몸통은 다섯 개의 사각형 플랫폼을 가지고 있으며 높이는 점점 낮아진다. 첫 테라스는 기저 모서리로부터 7미터이지만 나머지 테라스들은 2미터 높이로 각 층마다 좁은 복도만큼만을 남겨 놓았다. 상층부는 세 개의 원형 플랫폼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층마다 동심원을 그리며 구멍 뚫린 스투파들의 열을 만들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는 중앙 돔이 사원의 가장 높은 지점이다. 지상으로부터 35미터 높이다. 네 군데 측면에서 중앙 최상층부로 이르는 계단이 각각 만들어져 있고 아치형 관문들 위에선 32개의 사자석상들이 내려다보고 있다. 각 관문들 위에는 칼라(Kala-힌두 세계관의 악마)의 머리가 새겨져 있고 각면에서는 마카라(Makara-힌두 세계관의 해양 괴물. 대체로 물고기 모양)이 돌출되어 있다. 칼라와 마카라가 조합된 문양은 자바 사원들의 관문에서 흔히 발견된다. 동쪽 통로가 주 통로이며 부조 조각품들의 서사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언덕 경사면에 설치된 계단들은 사원 구조물과 더 아래쪽의 평지를 연결해 준다.

 

 

 

7. 부조 조각품들

 

보로부두르 사원은 여러 층의 테라스들이 얕은 돋을세김(양각) 부조물들로 빽빽하게 장식된 모습과 아루파다투의 원형 테라스들에서 보여주는 단순함도 보여주는 복잡미묘한 건축물이다. 첫 네 개의 테라스 벽면은 양각 부조 조각품의 갤러리다. 이들은 매우 섬세할 뿐 아니라 고대 불교사회에서 만들어진 가장 품위있고 격조높은 작품이라 할 것이다. (왼쪽)보로부두르 벽면 서사

 

부조물들의 위치

 

보로부두르의 양각 부조물(bas-relief)들은 고귀한 궁전생활과 숲속의 수행자부터 마을의 평민들 모습에 이르기까지 8세기 고대 자바 일상의 여러 장면들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사원, 시장, 다양한 꽃, 동물, 토착 실제 건축물 등도 함께 보여준다. 사람들 역시 왕, 여왕, 귀족, 대신, 군인, 시종, 평민 성직자, 수행자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묘사했다. 또한 아수라와 다양한 신들, 보디삿바스(bodhisattvas), 키나라스(kinnaras), 간다르바스(gandharvas), 압사라스(apsaras) 같은 신화 속의 영적 존재들도 포함했다. 이 양각 부조물로 표현된 형상들은 역사가들에게는 8세기 동남아시아 해양시대의 건축, 무기, 경제, 패션, 운송수단 등 어떤 목적물을 찾아내고자 하는 연구의 참고가 되기도 한다. 8세기 동남아시아의 더블 아우트리거 선박(횡하중을 견디기 위해 선박 몸통의 양옆으로 긴 지지막대 구조물을 설치한 보트-역주)을 표현한 가장 유명한 것들 중 하나가 보로부두르 선박(Borobudur ship)이다. 2004년 인도네시아를 출발해 아프리카까지 항해했던 실물크기의 보로부두르 선박 복제품이 오늘날 보로부두르로부터 수백 미터 북쪽에 위치한 사무드라 락사 박물관(Samudra Raksa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

 

 

 

 

 

 

(왼쪽)보로부두르 선박 양각 부조물 (오른쪽)고대의 더블 아우트리거 보트

 

보로부두르 사원의 부조품들은 특정 의미와 예술적 가치를 담은 자세나 행동 같은 인디아의 심미적 기준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 귀족 남성과 여성, 왕들, 압사라스나 타라스, 보디삿바스 같은 신적 존재들에 대한 부조작품들은 대개 목과 엉덩이 무릎의 세 부분을

 

굴절시키고 한쪽 다리에만 체중을 실은 뜨리방아(tribhanga - 사진참조)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자세는 연꽃을 든 수라순다리(Surasundari – 천상의 아름다움이라는 의미-역주)의 형상과 같이 가장 우아한 자세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보로부두르 사원을 발굴하는 동안 고고학자들은 청색, 적색, 녹색, 흑색 등의 염료들과 약간의 금박도 발견했다. 오늘날엔 아무 색도 없는 화산암의 무더기처럼 보이지만 이 사원은 한때 바르잘레파(varjalepa) 흰 점토로 바른 후 밝은 색상으로 채색되어 부처의 가르침이 봉화처럼 타오르는 상징적 장소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그들은 결론지었다. 같은 바르잘레파 점토는 사리(Sari), 깔라산(Kalasan), 세우(Sewu)사원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래서 보로부두르 사원의 양각 부조물들은 원래 매우 화려하게 채색되었다가 수 세기에 걸친 열대폭우로 인해 염료들이 모두 벗겨져 나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사 부조판 분포

부분

위치

내용

판의 숫자

숨겨진 기저부분

벽면

카르마비방가 (Karmavibhangga-카르마의 법칙)

160

첫 갤러리

주 벽면

랄리타비스타라 (Lalitavistara- 부처의 가르침)

120

자타카(Jataka-부처의 전생)/아바다나(Avadana-부처가 비유로 가르친 이야기들)

120

난간

자카타/아바다나

372

자카타/아바다나

128

두 번째 갤러리

난간

자카타/아바다나

100

주 벽면

간다브유하(Gandavyuha – 불교의 마하야나 경전)

128

 세 번째 갤러리

주 벽면

간다브유하

88

난간

간다브유하

88

네 번째 갤러리

주 벽면

간다브유하

84

난간

간다브유하

72

1,460

 

 

 

보로부두는 약 2,670개의 양각 부조물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중 1,460개가 서사를 담고 있고 1,212개는 장식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은 구조물의 벽면과 난간들을 뒤덮고 있다. 이들 부조물들의 면을 모두 합하면 약 2,500 제곱미터에 달하고 숨겨진 기저부분(카마다투)로부터 다섯 개의 플랫폼(루파다투)에 분포되어 있다.

 

수다나(Sudhana)와 마노하라(Manohara)의 이야기를 담은 서사 부조판들은 11개의 시리즈로 나뉘어 사원을 감도는데 그 총연장이 3,000미터에 달한다. 숨겨진 기저에는 그 첫 번째 시리즈 160개의 서사 부조판이 설치되어 있고 나머지 10개의 시리즈는 동쪽 계단 입구에서 시작해 그 왼쪽으로 이어지는 4개 갤러리 벽면과 난간들을 장식하며 분포되어 있다. 벽면의 부조물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며 난간의 것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된다. 이는 불교 순례자들이 행하는 순행의식(巡行儀式)인 프라닥시나(Pradaksina- 사진참조)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순례자들은 성지를 오른쪽에 끼고 시계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숨겨진 기저의 부조물들은 카르마의 법칙을 조명한다. 첫 번째 갤러리에서는 두 개의 시리즈가 겹쳐져 부조물로 표현되어 있다. 각각 120개씩의 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윗 부분들은 부처의 일생을 그리고 있는 한편 벽의 아래쪽과 첫 번째, 두 번째 갤러리의 난간 부분은 부처의 전생을 그리고 있다. 나머지 부분들은 수나다의 방황과 구도, 그리고 완벽한 깨달음으로 귀결되는 내용들을 담았다.

 

 

 

1) 카르마의 법칙(Karmavibhangga-카르마비방가)

 

보로부두르 사원 숨겨진 기저의 카르마비방가의 이 부조물은 오른쪽엔 거북이를 잡아 요리하여 업보를 지은 이들과 왼쪽엔 동물을 죽여 생계를 잇는 이들이 나중에 지옥에서 산채로 요리되고 절단되고 불타는 풀무 속에 던져지는 등 고문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진 참조)

 

 

 

 

숨겨져 있던 160개의 부조판들이 모두 연결된 스토리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각각의 부조판들은 인과(因果)를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부조물들은 소문을 옮기는 것부터 살인까지 망라하는 부정한 행위들을 응분의 처벌과 함께 그리고 있다. 또한 자선행위로부터 성지순례까지 이르는 칭찬받아 마땅한 행위들과 이를 따르는 상급들도 보여준다. 지옥의 고통과 천국의 기쁨이 각각 그려져 있는 것이다. 

 

매일의 일상과 윤회(samsara)의 모든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890년 보로부두르 사원 기저의 상자처럼 덧댄 외곽부분이 분해되면서 숨겨졌던 부분들이 드러나자 카시얀 체파스(Casijan Chepas)라는 이가 그 부조물들의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들은 앞서 몇 차례 언급된 사원으로부터 몇 백미터 북쪽에 있는 보로부두르 박물관이라고도 불리는 카르마비방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복원이 진행되면서 기저의 덧댄 부분도 다시 설치되어 카르마비방가 부조물들을 가리게 되었고 오직 남동쪽 모서리의 부조물만이 드러나 관광객들이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2) 싯다르타 왕자와 붓다의 탄생

 

 

 

 

(왼쪽) 싯다르타 가우타마 왕자가 고행수행자가 된 모습, (오른쪽) 룸비니로 돌아가던 마차 안에서 마야 왕후가 싯다르타 가우타마 왕자를 출산하는 장면

 

 

이 서사는 투시타 천국(Tushita Heaven)에서 부처가 강림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버나레스(Benares)의 사슴공원에서 첫 설법을 하는 장면에서 끝난다. 부조물들은 네팔의 까필라바스투(Kapulavastu) 왕국 수도다나(Suddhodana)왕과 마야 왕비 사이에서 싯다르타 왕자로 태어나는 부처의 탄생을 보여준다.

 

이 서사가 시작되기 전 27장의 부조물들은 천상과 지상에서 보디삿트바(Bodhisattva-보살)의 마지막 환생을 환영하는 다양한 준비들을 보여준다. 투시타 천국에서 강림하기 전 보디사트바는 자신의 왕관을 후계자이자 훗날 부처가 될 마이트레야(Maitreya)에게 물려준다. 그는 마야 왕후의 꿈 속에서 여섯 개의 상아 어금니를 가진 흰 코끼리의 형상으로 강림해 왕후의 오른쪽 자궁을 파고 들었다. 마야 왕후는 그 꿈을 꾸고서 자기 아들이 장차 강력한 통치자가 되거나 부처가 될 것임을 예감하게 된다.

 

마야 왕후는 출산이 임박했다는 것을 느끼고 카필라바스투 바깥의 룸비니 공원으로 길을 나섰다. 그녀는 플락사(Plaksa) 나무 밑에서 오른 손에 가지를 하나 들고 서서 아들 싯다르타 왕자를 낳았다. 이 부조판의 이야기는 왕자가 부처가 될 때까지의 장면들을 그린다.

 

 

 

3) 부처의 전생(자타카-Jataka)와 또 다른 전설적 인물들(아바다나-Avadana)

 

자카르타는 부처가 싯다르타 왕자로 태어나기 이전의 이야기들을 담았다. 인간으로도, 동물으로도 태어났던 부처의 전생을 조명하는 것이다. 미래의 부처는 왕이나 추방당한 사람, 신 또는 코끼리 등으로 나타나지만 그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떄에도 이 이야기가 가르치려 하는 미덕을 보여준다. 아바다나(avadana)에서의 이야기는 자카타와 유사하지만 그 중심인물은 보디사트바(보살, 부처) 그 자신이 아니다. 그가 아바다나에서 행하는 성스러운 행위는 다른 전설적 인물들과 인과관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카타와 아바다나는 보로부두르의 부조물에서는 하나의 같은 시리즈로 취급된다.

 

첫 번째 갤러리의 벽면 아랫쪽의 첫 20개 부조판들은 수다나쿠마라바다나 (Sudhanakumaravadana), 즉 수다나의 성스러운 업적을 보여주며 같은 갤러리의 난간 부분 위쪽의 첫 135개의 부조판들은 자타카말라(Jatakamala-부처의 전생 이야기)34개 전설들을 보여준다. 나머지 237개의 부조판들은 다른 출처의 이야기들을 그리며 두 번째 갤러리의 아랫쪽 부조판으로 스토리가 이어진다. 라마(Rama)의 조상 십히 왕(King Sibhi)의 이야기 같이 두 번씩 등장하는 자타카들도 있다.

 

 

 

4) 궁극의 진리를 찾아나선 수다나 (간다브유하-Gandavyuha)

 

간다브유하는 해탈을 향한 수다나의 끝없는 방황을 그린 아바탐사카 경전(Avatamsaka Sutra)의 마지막 장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세 번째와 네 번째의 두 개 갤러리를 차지하며 460개의 부조판으로 이루어진다. 이 서사의 주인공은 매우 부유한 상인의 아들인 젊은 수다나로 16번째 부조판에 등장한다. 그 앞의 15개의 부조판들은 스라바스티(Sravasti)의 제타 정원(Garden of Jeta)에서 부처가 사마디(samathi-요가수행)을 하는 동안 벌어지는 기적의 이야기들로 들어가는 도입부분이다.

 

수다나는 구도하는 과정에서 30명 넘는 스승들을 찾아다녔으나 누구도 그가 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는 만주스리(Manjusri)의 말을 듣고 수도승 메가스리(Megasri)를 찾아가 첫 번째 교의(敎義)를 받는다. 수다나는 여행을 계속해 수프라티스티타(Supratisthita), 의사 메가(Megha – 지식을 추구하는 마음), 부유한 묵타카(Muktaka), 수도승 사랏바야(Saradhvaja), 최고 계몽의 정신을 가진  우파시카(Upasika) 수도자 아사(Asa), 비스모타라닝이르고사 (Bhismottaranirghosa), 브라만 자요마얏나(Jayosmayatna), 마이트라야니 왕자(Princess Maitrayani), 수도승 수다르사나(the monk Sudarsana), ‘인드리예스바라라는 이름의 소년, 우파시카 수도자 쁘랍후타(upasika Prabhuta), 돈 많은 랏나츄다(Ratnachuda), 아날라 왕(King Anala), 시바 다하데바 여신Siva Mahadeva), 마야 왕후(Queen Maya), 마이트레야 보살(Bodhisattva Maitreya) 등을 각각 순서대로 만난 후 다시 만주스리로 돌아가는 구조다. 각각의 만남은 수다나에게 구체적인 교의이자 지식, 지혜가 되어 다가왔다. 이와 같은 만남은 세 번째 갤러리서도 일부 이어진다.

 

만주스리와 마지막으로 만난 수다나가 사만타바드리(Samatabhadra) 보살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네 번째 갤러리에서 묘사된다. 네 번째 갤러리 전체가 사만타바드라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 부조판들의 서사는 수다나가 마침내 궁극의 진리를 깨달으면서 막을 내린다.

 

 

 

8. 불상들

 


 

돌에 세겨진 불교세계관 이야기들과는 별도로 보로부두르에는 다양한 불상들을 많이 있다. 다리를 교차해 가부좌를 튼 불상들은 루파다투 층 다섯 개 플랫폼과 아루파다투 층 상층부 플랫폼에 모두 분포하고 있다. (왼쪽 사진)다르마차르카 무르다 손모양(dharmachakra mudra)을 한 불상

 

루파다투 층의 각 틈새에 배치된 불상들은 난간들 바깥 측면을 따라 열을 이루고 있는데 윗 층으로 올라갈 수록 플랫폼 면적이 점차적으로 작아짐에 따라 불상의 숫자도 감소한다. 첫 번째 난간에는 104, 두 번째 난간에도 104좌의 불상이 있고 세 번째에는 88, 네 번째에는 72, 다섯 번째에는 64좌가 배치되어 총 432개의 불상들이 루파다투 층에 분포되어 있다. 아루파다투 층 (상층부 세 개의 원형 플랫폼)에는 불상들이 구멍이 뚫린 종모양 스투파 안에 들어앉아 있다. 첫 번째 원형 플랫폼에는 32, 두 번째에는 24, 세 번째에는 16개의 스투파들이 있어 모두 72개가 된다. 원래 불상들을 총 504개가 있어야하는데 이중 300개 이상이 훼손되었고(주로 목이 잘림), 43개는 망실된 상태다. 사원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부터 불상의 머리는 호사가들의 수집품목이었고 주로 서구 박물관들의 손에 들어가 있다. 이들 중 몇몇 불상 머리들이 암스테르담의 트로펜무세움(Tropenmuseum), 파리의 무세주멧(Musee Giumet), 런던의 대영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다.

 

불상들은 일견 모두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손모양을 나타내는 무드라(Mudra)에 따라 각각 미묘한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다. 마하야나(Mahayana) 세계관에 따라 무드라는 중요한 방위를 상징하는 북방, 동방, 남방, 서방 그리고 상방(上方-zenith) 등 다섯 개의 그룹으로 나뉜다. 첫 네 개의 난간들은 동, , , 북을 가리키는 무드라를 하고 있는데 각 불상들은 해당 방위를 바라보며 해당 무드라의 손동작을 하고 있다. 한편 다섯 번째 난간과 상층부 플랫폼 72개 스투파에 들어앉은 불상들은 모두 상방을 뜻하는 무드라를 하고 있다. 각각의 무드라는 오선불(五禪佛)을 뜻하며 각각의 상징성을 내포한다.

 

 

 

동쪽에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순행하는 프라닥시나(pradakshina)의 순서에 따라 보로부두르 불상들이 하고 있는 무드라는 다음과 같다.

 

불상

무드라(Mudra-손동작)

상징적 의미

좌선불

방위

불상 위치

 


Bhumisparsa mudra 부미스파르사 무드라

땅을 증인으로 소환함

Aksobhya 악소브야 여래

(아촉불)

동방

루파다투 층 첫 네 개 동쪽 난간의 틈새

 


Vara mudra  

바라 무드라

자비와 자선

Ratnasambhava 랏나삼바바 (보생여래)

남방

루파다투 층 첫 네 개 남쪽 난간의 틈새

 


Dhyana mudra 

디야나 무드라

집중과 명상

Amitabha 아미타파 (아미타불)

서방

루파다투 층 첫 네 개 서쪽 난간의 틈새

 


Abhaya mudra 

아바야 무드라

두려움 없는 용기

Amoghasiddhi 아모가시디  (불공성취여래)

북방

루파다투 층 첫 네 개 북쪽 난간의 틈새

 


Vitarka mudra 비타르카 무드라

이성과 미덕

Vairochana 바이로차나 (비로자나불, 변조광여래)

상방

루파다투 층 맨 위 다섯 째 모든 방향 난간의 틈새

 


Dharmachakra mudra 다르마차크라 무드라

법륜(法輪)을 돌림

Vairochana

바이로차나 (비로자나불, 변조광여래)

상방

아루파다투 층 세 개 플랫폼의 72개 스투파

 

 

 

 

 

9. 유산

 

 

 

 

 

1950 수카르노 대통령이 인디아 네루수상을 보로부두르로 안내했다.

 

보로부두르 사원의 심미학적, 기술적 수준과 그 엄청난 규모는 인도네시아인들의 자긍심을 북돋았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과 마찬가지로 보로부두르 사원은 인도네시아 과거의 영광을 증명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리하여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은 외국 사절들을 이 사원으로 즐겨 안내했고 수하르토 정권은 그 상징적, 경제적 의미의 중대함을 인식해 유네스코의 도움을 받아 대대적인 사원 본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인도네시아의 수많은 박물관들이 보로부두르 사원의 축소 레플리카를 가지고 있다. 이 사원은 와양(Wayang) 그림자극, 가믈란(Gamelan) 음악과 함께 인도네시아인들이 자바의 과거 희미한 고전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새삼 각성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보로부두르에서 가져온 여러 고고학적 유물들이나 그 복제본들이 인도네시아 국내외의 박물관들에 전시되어 있다. 보로부두르 사원 부지 안에 있는 카르마비방가 박물관 외에도 자카르타의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Indonesian National Museum), 암스테르담의 트로펜무세움, 런던의 대영박물관, 방콕의 타이 국립박물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쿠알라룸푸르의 말레이시아 국립박물관, 타이페이에 소재한 세계 종교 박물관(Museum of World Religions) 등에도 보로부두르의 복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보로부두르 사원을 통해 전세계가 고대 자바의 고전불교문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왼족 그림)보로부두르 이미지가 들어간 중부자바 주정부의 문양

 

보로부두르의 재발견과 재건은 인도네시아 불교부흥의 징조로서 인도네시아 불교도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1934년 스리랑카의 사절단으로 온 승려 나라다 테라(Narada Thera)는 동남아 지역에 불법(佛法)을 선포하기 위한 선교여행의 일환으로 처음 인도네시아를 찾았다. 몇몇 인도네시아의 불교도들은 이를 불교 부흥의 기회로 삼았다. 1934 3 10일 보로부두르 사원 남동쪽에서 나라다 테라의 축복 속에 보리수 나무 심기 행사가 진행되었고 거기서 몇몇 도제(종자-Upasaka)들이 승려가 되어 출가했다. 매년 한 차례씩 인도네시아와 인근 국가의 불교도들이 와이삭(Vesak)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보로부두르로 몰려들고 있다.

 

중부 자바와 마글랑군(Kabupaten Magelang)의 엠블렘은 보로부두르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보로부두르는 중부자바의 상징일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상징이 되어 있다. 보로부두르 대학, 중부 자카르타의 보로부두르 호텔 같이 그 이름이 여러 건물이나 단체에 붙었고 해외에 문을 연 인도네시아 식당들 중에서도 이 이름을 사용하는 곳이 있다. 뿐만 아니라 보로부두르의 이미지는 지폐, 우표, 서적들, 유인물, 도큐멘터리 및 인도네시아 여행홍보자료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보로부두르 사원은 현재 인도네시아 여행지의 핵심 중 한 곳이며 사원 가까이의 현지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인근 족자에 많은 여행객들이 몰려드는 것은 보로부두르 사원 및 쁘람바난 사원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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