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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펜두마 인질사태와 파푸아해방기구 본문
마펜두마(Mapenduma) 인질사태
마펜두마 인질사태는 1996년 1월 8일 파푸아 해방기구(Organisasi Papua Merdeka-OPM)가 외국인들을 포함한 민간인 26명을 이리안자야(지금의 인도네시아 서파푸아) 자야위자야의 한 마을에서 인질로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날 자야위자야(jayawijaya) 분견소에 한 통의 보고가 날아들었는데 와메나(Wamena) 비행동지회(Aviation Fellowship)에서 보내온 이 전문은 세계야생기금 생태 다양성 조사단인 로렌츠’95 탐사대 전원이 자야위자야 군(郡) 띠옴 지역(Kecamatan Tiom)의 마펜두마 마을에서 파푸아 해방기구 켈리 크왈릭(Kelly Kwalik) 부대에게 인질로 사로잡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것은 그로부터 5월 15일까지 무려 129일간 파푸아의 울창한 정글 속에서 펼쳐지는 기나긴 인질극의 서막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인질 26명 중엔 생후 6개월 된 아기를 포함해 영국인 4명, 네덜란드인 2명, 독일인 1명도 있었다. 이들 중 인도네시아인들은 비교적 일찍 석방되기 시작했지만 인질가치가 높은 외국인들 대부분은 마지막까지 풀려나지 못했다. (사진: 로렌츠'95 탐사대)
자야위자야 분견대는 이 보고를 즉시 뜨리꼬라 지역사령부로 전송했다. 뜨리꼬라 지역본부는 연합부대를 편성해 인질극이 벌어진 장소로 급파했고 뒤늦게 도착한 특전사 코파수스(Kopassus) 부대가 뒤따랐다. 사건 발생 5일 후인 1996년 1월 13일 9명의 인질이 띠옴 지역 지기 마을(Desa Jigi)에서 풀려났다. 그들은 네 명의 보건소 직원과 세 명의 마펜두마 마을 공무원, 두 명의 초등학교 교사들이었다.
이들 9명의 인질들을 석방한 날 반군들은 라디오 통신(SSB)을 시작해 자야뿌라 교구의 무닝호프(Uskup Munninghoff) 신부를 불러냈다. OPM은 헬리콥터 한 대와 네 명의 성직자 또는 선교사들과의 접견을 요구했다. 그 요구를 전달받은 인도네시아군(ABRI)은 그 답변으로써 두 대의 헬리콥터에 약품과 성직자들을 실어 보냈다. 성직자들은 선교사 최고책임자 폴 부르캇(Paul Bourkat)과 안드레아스 반더불(Andreas van der Boel), 우후와누스 고바이(Uhuwanus Gobay) 등 이었다. 그들은 반군과 인도네시아 당국 사이를 중재하려 노력했다.
중재 결과로서 세계야생기금(World Wildlife Fund-WWF) 회원인 독일인 프랑크 몸베르크(Frank Momberg)가 조기에 풀려났다. 반군들이 이례적으로 외국인 몸베르크를 풀어준 것은 그들의 요구를 더욱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한 민간 소식통에 따르면 모든 외국인 인질들이 각자의 모국 대사관에 편지를 보냈는데 봉투를 봉하지 않은 그 편지들을 가지고 나온 이가 몸베르크였다. 편지 내용은 모두 인도네시아군이 무분별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또한 인도네시아 당국은 그를 통해 인질들 중 한 명인 유네스코 분석가 마르타 클라인(Martha Klein)이 임신 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사진: 몸베르크)
또 다른 날 반군들은 올라 야코부스 민디파(Ola Yakobus Mindipa)와 아기를 풀어 주었다. 올라는 마펜두마 조사원들 전부를 보살피던 야코부스씨의 부인이었다. 반군들은 그 두 명을 석방한 댓가로 음식과 약품을 요구했다. 협상은 지지부진했지만 인도네시아군은 계속 반군들을 설득하려 노력했고 올라와 아기가 풀려난 후엔 열 장의 담요에 라면, 담배 등을 싸서 올려 보내는 성의를 보이기도 했다. 인도네시아군은 반군들을 격동시키지 않기 위해 무장접촉을 피하며 중재를 계속했다.
1996년 1월 19일엔 유엔이 개입했다. 파푸아해방기구의 인질극이 마침내 국제사회 최고위 기관의 관심을 끈 것이다. 당시 유엔사무총장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Boutros Boutros Ghali)는 모든 인질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했다. 같은 날 인도네시아군도 폴 부르캇(Paul Bourkat)과 안드리안 판더불(Andrian van der Boel)을 다시 보내 중재를 계속했다.
중재를 진행하던 중 폴과 안드리안은 켈리 크왈릭 부대의 작전사령관 다니엘 코요가(Daniel Koyoga)와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날 밤 10시 중재자를 통해 인질들을 평화적으로 석방토록 할 예정이란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사태가 그렇게 간단히 끝날 리 없었다. 계획은 번복되었고 협상은 중단되었다.
당시 자국 국민이 인질이 된 영국, 네덜란드, 독일은 모두 인질구출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로이터 통신은 스코틀랜드 야드 경시청에서 나온 세 명의 형사가 이리안자야에 들어와 있다고 보도했다. 인도네시아군 공보처에서는 이 세 명의 형사에 대해 아는 바 없다고 밝히면서도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존중하는 한도 내에서 영국인들이 자국 인질 구출을 위해 협조하는 것은 문제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정부뿐 아니라 영국인 인질들의 가족도 목소리를 높였다. 런던의 BBC 인도네시아를 통해 그들은 그들의 가족들을 풀어달라고 반군들에게 호소했다. 이와 관련해 뜨리꼬라 지역본부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대중매체에 정보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사태수습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고 강변했다.
주교 헤르만 페르난두스 마리아 무닝호프(Herman Ferdinandus Maria Münninghoff)가 협상을 위해 크왈릭을 만난 것은 1월 25일의 일이었다. 크왈릭은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OPM과 인도네시아 당국 사이의 중재자가 되어 줄 것을 요구했다. ICRC는 그 역할을 수락하기 전 영국,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정부의 자문을 구했다. 다섯 명으로 구성된 협상단이 2월 7일 현장에 도착했으나 악천후와 울창한 정글, 보급문제 등으로 인해 반군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가 그들이 게셀라마(Geselama)로 옮긴 2월 25일에야 첫 접촉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코요가와 크왈릭이 1996년 1월 25일 인도네시아군과의 마지막 접촉 후 첫 만남이었다. 중재의 청신호가 다시 켜진 것이다. (사진: 무닝호프 주교)
1996년 2월 26일 모든 인질들이 ‘박쥐동굴’이란 이름의 한 동굴로 옮겨졌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정보에 따르면 박쥐동굴은 작은 계단을 따라 7미터 높이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정보와 달리 1996년 2월 29일 ICRC는 게셀라마 마을의 한 오두막집에서 OPM 대원들의 감시 속에서 인질들 전원을 접견할 수 있었다.
그 만남에서 ICRC는 평화적인 인질석방을 요구했으나 코요가는 파푸아 뉴기니에 있는 파푸아해방기구(OPM) 수장의 허락없이는 인질들을 석방할 수 없다며 유보적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며칠 지난 후 코요가와 크왈릭은 더욱 강경한 입장으로 선회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서파푸아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인질들을 석방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ICRC와 반군들간 밀고 당기는 지루한 협상이 계속되었다. ICRC 팀은 3월 26-27일, 4월 17일, 5월 8일 등 네 번 추가로 방문하면서 매번 인질들을 접견했다.
일견 희망적인 사인이 엿보이기도 했다. 코요가가 인질들 상태를 보여주는 사진이 담긴 필름을 롤 채로 맡기기도 했고 나중에 인질들이 석방될 때 각국 대표들이 참석한 것을 촬영해 역사에 남기도록 해달라는 요구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금방 이루어질 것 같던 인질석방은 하염없이 지체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재노력도 점차 그 활력을 잃어갔다. ICRC 팀은 인질들 중 임신 중인 네덜란드 여인 마르타 클라인을 포함한 세 명의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된 것에 우려를 표하며 비타민 보충제와 인질들의 가족들과 연락할 수 있는 통신기기를 전달하려 했다. 한편 인도네시아 당국은 크왈릭이 즉각적인 서부 뉴기니의 독립 요구를 철회하지 않아 협상에 전혀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ICRC는 협상 지속을 주장하며 5월초까지 반군들의 무사귀환과 이리안자야에 의료 및 농업 프로젝트 실시를 조건으로 내걸며 인질석방을 위한 협의를 계속했다. (사진: 켈리 크왈릭)
그후 1996년 3월 4일 OPM 혁명위원회 위원장인 모세스 웨러르(Moses Weror)는 전세계 카톨릭신도들의 수장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켈리 크왈릭에게 서한을 보내왔다고 발표했다. 교황은 인질들의 석방을 촉구하고 있었다. 다음날 모세스는 인도네시아 정부와 협상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모세스는 협상 상대방으로서 몇 명의 이름들을 나열했는데 그중에는 메가와티 수까르토뿌뜨리, 국회의장, 와호노(Wahono), 알리 알라타스 외무상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세스는 거명된 이들이 이후 협상에 참석해 줄 것을 요구했다. 모세스는 인질들의 석방시한을 유엔총회가 열리는 1996년 9월로 지정하면서 이번 협상이 모든 인질들의 운명을 결정할 최종 협상이 될 것이라 말했다.
파푸아 뉴기니의 포트 모레스비(Port Moresby)에서 이틀간의 회합을 가진 모세스는 협상결과에 만족하며 크왈릭과 코요가에게 모든 인질들을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모세스는 그동안 계속된 인질극을 통해 목적했던 세계의 이목을 충분히 집중시켰다고 생각했고 ICRC가 이리안자야에 대표부를 설치하기로 한 약속에도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그러나 코요가와 크왈릭은 대변인인 시몬 알롬(Simon Allom)을 통해 모세스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그들은 인도네시아가 서파푸아의 독립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여전히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앞서 지명된 네 명의 회담대표들을 포함한 인도네시아 당국이 그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든 인질들을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사진: 모세스 웨러르) 하지만 그러면서도 1996년 3월 16일 인질 중 한 명인 아브라함 왕가이(Abraham Wanggai)를 석방하면서 협상의 여지를 남겨 두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996년 4월 15일 마펜두마에서 인질구출작전에 투입되었던 사누립 소위가 인도네시아군을 포함해 16명을 사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코파수스 장교 3명, 육군전략예비사령부대원 8명, 그리고 민간인 5명이 사누립 소위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것이다. 코파수스 소속의 사누립 소위가 왜 그런 사건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가설들이 있지만 분명한 이유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사누립 소위는 1997년 4월 23일 처형당했다.
길고긴 협상 끝에 OPM과 ICRC는 마침내 인질석방을 위한 합의에 도달했다. 5월 8일 여러 지역의 부족장들이 모여 석방행사를 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그 준비가 분주했다. 하지만 ICRC가 인질들의 출발을 준비하던 마지막 순간 크왈릭은 마음을 바꿔 서부 뉴기니의 독립을 재차 요구하며 석방을 무산시켰다. ICRC는 OPM이 막판에 모든 합의를 깼으므로 더 이상 중재를 계속할 수 없음을 양측에 통보했다. 인도네시아군도 반군들과 교전하지 않겠다는 당초의 합의에 더 이상 묶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갑자기 마펜두마와 게셀라마에 전운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OPM 내에서도 이견이 있어 일부 대원들은 인질들을 5월 9일엔 석방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크왈릭은 이를 묵살했다. 다음날 다시 돌아온 ICRC 대표들은 인질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크왈릭의 자신의 요구에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을 뿐이다. 인도네시아 당국은 강경 대응으로 선회하기로 마음먹고 자카르타 최고위층은 물론 협상과정에 개입되어 있던 영국, 네덜란드, 독일 등의 허락과 동의도 얻었다.
인도네시아 육군 특수부대 코파수스의 구출작전은 쁘라보워 수비안토 사령관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다. 붉은 베레 타격부대를 진두지휘한 쁘라보워 수비안토 준장은 특전사 코파수스(Kopassus) 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수하르토 대통령의 사위이기도 한 그는 C-130 수송기에 실어 온 두 대의 벨 (Bell) 412 헬리콥터와 볼코(Bolco) 105형 등 다수의 헬리콥터를 이용해 5월 9일 게셀라마로 진입해 들어갔다. 그러나 마을에선 반군들이 다 빠져나가 이미 텅 빈 상태였으므로 소수의 관측팀만 남기고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철수 과정에서 헬리콥터 한 대가 나무와 충돌해 추락하면서 타고 있던 대원 다섯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사진: 마펜두마 현장으로 출동한 쁘라보워)
그건 인과응보였는지도 모른다. 첫 번째 공격에서 쁘라보워는 적집사 마크를 단 흰색 헬리콥터를 사용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반군들이 떠나간 텅 빈 게셀라마에 헬리콥터를 착륙시킬 때 아무 것도 모르던 마을 사람들은 적십자사 마크를 보고 중재팀들이 다시 온 것이라 생각하며 반갑게 헬리콥터로 달려갔는데 헬리콥터의 백인 기관총 사수와 거기서 뛰어내린 군인들이 그들을 사살했다는 것이다.
ICRC에 대한 비난도 거셌다. 구출작전에 인도네시아군이 헬리콥터에 적십자사 마크를 사용하도록 용인했다는 혐의가 걸렸다. 물론 ICRC는 이를 부인했고 자체조사 결과 협의가 사실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나중에 인도네시아군은 ICRC 헬리콥터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이전에 ICRC 대표들이 사용했던 흰색 민간 헬리콥터로 공격을 주도했다고 시인했다. 이 헬리콥터는 적십자사 마크를 달고 있지도 않았고 인도네시아 육군 엠블렘이 그려진 아에로스파시알레 SA330 퓨마(Aérospatiale SA 330 Puma) 두 대의 호위를 받고 있었으니 적십자사로 위장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눈에 익은 친숙한 헬리콥터를 사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OPM이 착각과 혼선을 빚었을 것이란 점에는 동의했다.
영국 SAS가 용병들과 함께 적십자 마크가 있는 헬리콥터를 이용한 작전 기획에 참여했다는 의혹을 호주 ABC 방송의 포코너스 프로그램( Four Corners program)도 전했다. ABC 방송은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탄 적십자사 마크의 헬리콥터가 1996년 5월 이리얀자야 고지대에서 마을 사람들을 사살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작전의 진면목은 은폐되고 이 구출작전이 영웅적인 모험담으로 미화되면서 이를 기점으로 인도네시아군은 수많은 파푸아인들에 대해 학살, 강간, 고문, 수탈을 자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의 증빙자료나 증언들은 현재 대부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이 오인사격으로 인한 학살은 대체로 한낱 소문처럼 떠돌고 있다.
이 첫 번째 공격 며칠 후인 5월 15일 코파수스의 관측팀은 OPM과 인질들이 다시 게셀라마 마을로 돌아왔음을 확인해 보고했다. 쁘라보워는 쩬더라와시(Cenderawasih-‘천국의 새’라는 의미)라는 작전명으로 또 다시 헬리콥터 강습을 감행해 11명의 인질 중 아홉 명을 구해냈다. 그러나 작전 중 인질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보도되었다. OPM 측은 여덟 명이 사살당하고 두 명이 체포되었다. 5월 15일 작전에 100명의 코파수스 대원들이 동원되었고 감시용 드론과 탐지견들도 사용되었다.
이 작전을 위한 헬리콥터가 뜨기로 되어 있던 공군기지가 수천 명의 현지인들이 헬리콥터들을 불태우려 공격해 오는 사건도 있었다. 이로 인해 거의 작전취소 직전까지 몰렸지만 폭도들에게 고무탄을 사격해 물리칠 수 있었다. 왜 갑자기 현지 주민들이 공군기지를 공격했을까 생각해 보면 게셀라마에서 5월 9일 발생한 오인학살때문일 것이란 심증이 크다. 물론 이를 증빙할 증거는 매우 부족하다..
코파수스가 헬리콥터로 현지에 진입해 반군들을 추적한 끝에 129일간의 인질극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인질들 중 나비 빠너끄난(Navy Panekenan)과 요시아스 마티아스 라스무후(Yosias Mathias Lasamuhu) 등 2명의 인질은 OPM 대원의 대검에 목숨을 잃었고 임산부 마르타 클라인은 창에 찔렸지만 다행히 경미한 부상에 그쳤다. OPM 측에서는 근접전을 통해 8명이 사살당하고 다른 두 명이 사로잡혔다. (사진: 마르타 클라인)
영화에서처럼 특수부대가 반군 본거지를 치고 들어가 인질들을 단번에 구출해 나온 것은 아니었다. 전투가 벌어지면서 간신히 몸을 피한 생존자들은 구출될 때까지 밤새도록 산악 비탈면에서 악천후를 견뎌야 했던 것이다. 수색작업을 통해 그들을 발견한 코파수스 대원들은 응급처치 후 자카르타의 가톳 수브로토 육군병원까지 신속하게 이송했다. 인질들 중 세 명은 중환자실 신세를 져야 했지만 나머지는 대체로 건강상태가 양호했다.
하지만 죽은 두 명의 인질에 대해서는 이런 증언도 있다. 영국팀 리더였던 다니엘 스타트(Daniel Start)는 그들 두 명이 구출작전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OPM에게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이미 며칠 전 살해당한 민간인 친구들과 친척들의 보복 차원에서 죽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사진: 살해된 인질 나비 빠너끄난의 입관)
한 보고서에 따르면 인도네시아는 이 지역을 기근이 휩쓰는 동안 그 충성도가 의심되는 곳을 폭격하거나 기총소사를 했다고 한다. ABC 보도에 따르면 인질사태가 벌어질 당시까지 수년 간 1,000명에서 5,000명 사이의 주민들이 살해당한 상태였다. 현지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 직전인 상황에서 인질극이 시작된 것이었다
“다른 이들은 숲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최소한 정부가 통제하는 지역엔 발길을 끊고 만 거죠.”
오지의 마을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은 인도네시아군과 맞닥뜨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우려하던 사건이 바로 게살라마에서 또다시 벌어졌다. 스타트는 5월 9일 현지 주민들이 게셀라마에 착륙하는 헬리콥터의 적십자마크를 보고 방심한 동안 이규제큐티브 아웃컴스나 SAS 용병일 것으로 추정되는 4-5명의 백인들과 그들 뒤의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총격을 가해 여덟 명이 죽고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고 말했다. 반군은 이 게셀라마 첫 번째 공격에서 오인사격으로 사망한 이들 주민들에 대한 보복으로 인질 두 명을 구출작전 훨씬 이전에 보복처형했다는 것이다.
1999년 7월 앞서 언급한 호주 매체의 보도는 SAS의 직접적 간여를 주장하진 않지만 이 인질구출작전에서 최소한 SAS 인원이 자문이나 기획 단계에 참여했음을 시사했다. OPM 지도자 켈리 크왈릭은 인도네시아군이 인질구출작전에 국제적십자사를 ‘이용’했다고 말했다.
영국은 대사관 무관이자 전 SAS 대령 출신 아이버 헬버그를 시켜 코파수스 사령관 쁘라보워 준장에게 특별한 도움과 자문을 주도록 했다. 헬버그는 작전을 위해 영국이 첨단 감시장비를 인도네시아군에게 공급한 것은 사실이나 영국군 그 누구도 구출작전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남아프리카의 민간군사기업 이그제큐티브 아웃컴(Executive Outcomes)의 전 CEO 닉 판덴버그(Nick Van Den Bergh)는 그가 다섯 명의 용병들을 이끌고 이리안자야의 인질사태 중 자문과 헬리콥터 강습훈련을 제공하긴 했지만 그나 그의 요원들이 직접 구출작전에 참전하진 않았다고 부인했다.
성공적인 인질구출작전으로 평가되는 마펜두마 인질사태는 그렇게 끝나며 쁘라보워 수비안토에게 또 하나의 무공을 더해 주었고 서파푸아인들과 반군들의 마음에는 몇 십 번째일지 모를 커다란 대못을 또 하나 박았다. 물론 당시 인질이 되었던 이들과 그 가족들에겐 정글 속의 그 지옥같았던 기간이 평생 트라우마가 되어 따라 다녔을 것이다. (끝)
인질구출작전 협의
게셀라마에서 소개되는 영국인 인질들
죽은 파푸아 반군의 시체와 함께 사진을 찍는 인도네시아 군인들
이그제큐티브 아웃컴스 용병들
참고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Mapenduma_hostage_crisis
https://www.icrc.org/en/doc/resources/documents/misc/57jpz2.htm
http://www.pireport.org/articles/1999/07/14/britains-sas-implicated-massacre-during-irian-jaya-rescue
http://malanesia.blogspot.com/2014/06/prabowo-ajudan-dan-setetes-airmata-d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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