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인도네시아 대학살 (1965-66) -(2) 본문
1965–66년 인도네시아 대학살
5. 학살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동조자들, 그리고 그 가족들이 매일 수천 명 단위로 몰살당하고 있다. 지방 군부대들이 벽지의 감옥에서 수천 명의 공산주의자들을 간단한 심문 끝에 곧바로 처형했다는 보도도 들려오고 있다. ‘빠랑’(Parang)이라 불리는 날이 넓은 정글도(刀)로 무장한 일단의 무슬림들이 한 밤중에 공산주의자들의 집에 난입해 온 가족을 죽이고 그들의 시신을 대충 파묻었다고도 한다. 이러한 대대적 살인행위는 동부자바의 농촌에서 더욱 대담하게 벌어지는데 무슬림 무리들은 피살된 이들의 머리를 죽창에 꿰어 들고 마을을 행진하기도 했다. 동부자바와 북부 수마트라에서 자행된 학살의 광기는 그 시신처리가 심각한 환경문제를 일으킬 정도이며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도 시신 썪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그 지역을 여행하고 온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강과 개천들이 문자 그대로 시신 더미에 막혀 흐르지 못할 지경이라고 한다.
- 1965년 12월 17일자 타임지(Time)
1965년 10월 자카르타에서 시작된 이러한 살인행위는 중부자바와 동부자바를 거쳐 발리까지 번졌고 수마트라 등 다른 도서지역에서도 이보다는 작은 규모이지만 예외없이 학살행위가 자행되었다. 군이 공산주의자들을 악당으로 규정하자 이를 자신들이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면죄부로 받아들인 일반시민들이 그간 쌓인 사회적 긴장과 증오를 분출하면서 이 학살행위의 한 축을 이루었다. PKI를 공고히 지지했던 중부와 동부자바에서 특히 처참한 대량살인행위가 줄을 이었다.
군이 여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아직까지 충분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육군은 대체로 시민들의 무리나 지방 민병대를 조직하고, 지원하고 훈련시키고 물자를 공급해 주기까지 한 것은 대체로 사실인 듯하다. 대개의 경우 민간인에 의한 학살이 시작되기 전 군이 폭력을 조장하거나 시범을 보였는데 어떤 지역에서는 군보다 앞서 지역 자경단이 먼저 총칼을 들고 공산주의자들의 목을 따는 경우도 있었다. 초기에는 군이 직접 PKI와 충돌하면서 살인행위가 벌어졌지만 10월 말경에 이르러 공산당 숙청에 강경 이슬람단체들이 가담했고 이들은 인도네시아에서 무신론자들을 몰아내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목소리를 높였으므로 살인행위는 그 처참함의 정도와 규모가 점입가경으로 커졌다.
어떤 지역에서는 민병대가 공산주의자들이나 그 동조자들의 은신처를 밀고했고 또 어떤 곳에서는 군이 촌장에게서 공산주의자들의 명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PKI 당원들은 딱히 신원을 숨기고 행동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지역사회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검거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미국 대사관 측이 5천 여명의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이들의 명단을 인도네시아군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일부 PKI 지부들이 저항행동을 조직해 복수살인극을 벌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들 모두가 PKI 당원들이었던 것은 아니다. 인도네시아 국민당(PNI)보다 조금이라도 왼편에 치우친 이들에게 예외없이 PKI의 꼬리표가 달리곤 했다. 어떤 피해자들은 단순히 공산주의자와 친분이 있거나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냥 그렇다고 의심되는 이들이었고 심지어 정치적 동기도 없는 이들이 개인적 복수극을 벌이기 위해 그런 구실을 삼았다. 공산당 숙청은 육군의 협조를 받은 청년단들에 의해 행해졌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정치적 중요인물들이 아니라 농부나 농장노동자, 공장노동자, 학생, 교사, 예술인, 공무원 등과 같이 사회의 하층구조를 이루는 빈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학살극의 제물이 된 것은 그들의 친구나 식구들 중 누군가 PKI에 가담했거나 관련 조직에 몸을 담았다는 이유때문이었다. 법적 근거도 없는 연좌제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파괴했던 것이다.
1965년 좌익분자로 의심되는 자들을 대거 체포한 인도네시아군.
트럭에 탄 저들은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매우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이 학살행위는 충동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고도의 조직적 계획을 기반으로 수행되었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인도네시아군에 체포된 상태에서 ‘간이처형’되었다. 처형방식은 나치 독일이 자행한 ‘가스실’같은 기계적 방식에 의한 학살이 아니라 르완다나 캄보디아에서 자행된 것과 같이 집행자와 희생자가 살인의 순간에 서로 얼굴을 대면하는 방식이었다. 처형방식은 ‘중구난방식의 폭행과 살해’라 표현할만 했는데 총격, 산채로 신체를 절단, 칼로 찌르기, 할복, 거세, 꿰뚫기, 목매달기, 일본도를 사용한 참수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소총이나 자동화기를 사용한 처형은 매우 국한되어 주로 단검, 낫, 대검, 장검, 얼음꼬챙이, 죽창, 철근 및 임시방편으로 급조한 다양한 무기들이 사용되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잘린 머리를 창끝에 꽂아들고 행진했고 시신들은 아무렇게나 강에 던져졌는데 공무원들이 수라바야 시내로 흘러들어오는 하천이 시신들로 인해 막혔다며 군에 항의할 정도였다. 동부자바의 끄디리(Kediri) 같은 곳에서는 나들라툴 울라마 이슬람단체의 청년단(Ansor Youth Movement) 회원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나란히 앉혀놓고 차례로 목을 딴 후 그들의 시신을 강에 버리기도 했다. 그들이 있던 자리엔 남성들의 거세된 성기들이 널브러져 있어 다른 이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러한 학살행위로 한 마을의 일부분이 완전히 씨가 말랐고 희생자가 소유했던 집은 약탈당하거나 군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공산당 당수 D.N 아이딧의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중국과 결탁했다는 프로파간다가 나돌며 민중들 사이엔 반중국 인종주의도 발호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일부 지역에서는 죄없는 화교들도 사냥당하고 학살당했으며 그들의 재산은 약탈과 방화로 유린당했다. 또한 기독교인 인구가 많은 누사 떵가라(Nusa Tenggara) 지역에서는 무슬림 청년단들이 기독교 성직자들이나 교사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간 심화되어 있던 모든 종류의 갈등이 실제로는 9.30쿠데타와 아무 상관없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적으로 마구 터져 나온 것이다.
이러한 난동들이 1969년까지도 심심찮게 벌어졌지만 학살 자체는 1966년 3월을 기해 대체로 진정되는 분위기였다. 그 이상 지속하려 해도 이미 혐의자들이 씨가 말랐고 당국도 더 이상 부추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솔로(Solo) 주민들은 1966년 3월에 닥친 유례없는 수준의 솔로 강 범람을, 더 이상의 살인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신비주의적 계시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사진) 슬레만(Sleman)의 군수가 PKI 소탕협조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금전적 지원을 하겠다는 감사장
이러한 살인행위에 적극 나서는 것은 자바에서 사회적 충성도를 나타내는 척도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군은 자바인들 중 강성 근본주의 무슬림인 산트리(Santri)들을 동원해 신심이 좀 부족한 아방안(abangan)들 사이에서 PKI 당원들을 색출해 내도록 했다.
무슬림 정당인 나둘라툴 울라마(NU)와 PKI 사이에서 1963년 촉발된 갈등은 1965년 10월 둘째 주에 폭발했다. 또 다른 이슬람단체인 무함마디야(Muhammadiyah)는 1965년 11월 초에 천명하기를 PKI와 게스따뿌(Gestapu-9월 30일 쿠데타를 군이 지칭하는 용어)를 절멸시키는 것은 성전이라고 했는데 이는 자바와 수마트라 이슬람 그룹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리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죽이는 것은 당시 젊은이들에겐 종교적 의무처럼 비쳐졌다. 공산당 본거지였던 중부와 동부 자바에서 무슬림 집단들은 자신들을 1948년 공산당이 일으킨 마디운 사태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학살행위를 그에 대한 응분의 보복인 것처럼 포장해 정당화하려 했다. 족자 지역의 카톨릭 학생들조차 체포된 수 트럭 분의 공산주의자들의 처형에 참여하기 위해 밤에 기숙사를 빠져나오기도 했다.
마침내 1966년 초 전국적으로 살인행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부자바 일부에서는 그후 수년동안 이러한 살인행위가 줄을 이었다. 블리타르 지역에서는 살아남은 PKI 당원들이 게릴라를 조직해 활동했지만 1967년과 1968년에 모두 진압되었다. 바 수로(Mbah Suro – 수로 영감)라는 신비주의자는 공산주의와 토착 신비주의를 혼합해 만든 사이비 종교 추종자들로 군대를 조직했으나 수로를 비롯한 80인의 추종자들은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6. 발리와 수마트라에서의 대량살인
1950년대와 1960년대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사회집단들 사이의 갈등이 첨예했던 것과 같이 발리에서도 발리의 전통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자는 이들과 이러한 전통적 가치를 반대하는 이들, 특히 PKI 사이에서 치열한 갈등이 벌어졌다. 공산주의자들은 발리의 문화, 종교 및 성품의 파괴를 획책한다는 공개적 비난을 받았고 이를 막기 위해 발리인들도 자바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PKI를 분쇄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수카르노 임기의 마지막 몇 년간 공무원직, 기금, 사업적 이점 등 수많은 혜택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돌아간 것을 시기했던 측면도 분명 있었다.
토지와 임차인의 권리에 있어 당시 위세를 떨치던 PKI가 일방적으로 토지압류를 시도하면서 살인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이젠 처절한 반격이 벌어질 판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유일하게 힌두교도가 인구의 과반을 차지하는 발리에서 자바와 같은 이슬람 세력의 개입은 없었지만 카스트 신분제도 상위에 속한 PNI 당 소속 지주들이 PKI 당원들의 제거를 주도했다. 힌두교 고위사제들은 과거의 불경스러움과 사회분열로 인해 분노한 영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발리의 힌두교 지도자 이다 바구스 오까(Ida Bagus Oka)는 힌두교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혁명의 적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종교에 대해 가장 잔혹한 공산주의자들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들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며 그 뿌리까지 완전히 파괴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재집결하면서 동부자바 일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발리 역시 내전과 다름없는 혼란한 상황을 겪어야만 했다.
세력의 균형은 자바에서의 작전을 마친 육군 특수전연대와 제5지역군 브리위자야 사단이 발리에 상륙한 1965년 12월을 기점으로 반공세력쪽으로 기울었다. 수하르토의 해결사인 사르워 에디 위보워는 특수전연대 사령관으로서 발리 치안이 회복될 때까지 휘하 부대들의 살인행위를 허용했다. 군이 사람들을 부추겨 ‘게스타뿌’들을 제거한 중부자바의 경우와는 반대로 발리인들의 살인의지는 매우 적극적, 자발적이어서 처음 물자를 보급해 준 육군은 이후 결과적으로 사태에 개입해 광기와 혼란을 잠재우는 데에 전력을 다해야 했다.
수테자(Sutedja)는 발리 주지사 임명은 취소되었고 오히려 공산당 봉기를 준비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친인척들도 추적,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수테자 본인도 납치당해 실종되었다.(사진: 수테자 발리 주지사) 중부와 동부 자바에서 벌어진 것과 유사한 살인행위가 검은 셔츠를 입은 PNI당 청년들로 인해 자행되었다. 수개월동안 민병대 공격부대들이 마을들을 휩쓸며 혐의자들을 체포해 어딘가로 데려갔다. 공산주의자들 및 그들 친인척 소유의 주택 수백 채가 숙청작업 개시 1주일 만에 불타 전소했고 집을 탈출해 달아나던 이들은 붙잡혀 무참히 살해당했다. 초기의 집계에 따르면 부녀자와 아이들을 포함해 약 5만 명이 숙청작업으로 목숨을 잃었다. 1965년의 마지막 몇 달동안 발리의 몇몇 마을 주민 수가 절반 이하로 줄기도 했다. 싱아라자와 덴빠사르 도심의 중국인 상점들은 모두 파괴되었고 상점 주인들은 약식 심판을 거쳐 ‘게스타뿌’들에게 자금지원을 했다는 혐의를 걸어 살해했다. 1965년 12월부터 1966년 초까지 약 8만 명의 발리 주민들이 살해되었는데 당시 발리 전체인구의 5% 정도에 해당하는 숫자였으며 인구비율로만 따지면 인도네시아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 되었다.
외국기업들이 투자한 수마트라 소재 농장들을 대상으로 그동안 PKI가 조직한 시위와 캠패인이 줄을 이었는데 쿠데타 실패 이후 공산당은 신속한 보복을 당했다. 수마트라 전역에서 20만명 가량 살해되었는데 아쩨에서만 4만 명이 살해되었다. 1950년대 말의 지역반란이 협상을 통해 타결되면서 당시 반군에 가담했던 이들이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에 편입되어 이젠 그들의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친 수카르노 진영의 공산당과 일부러 손을 잡았던 것인데 그 행보가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목을 찌르는 비수가 된 것이다.
1950년대의 반란진압과 1965년의 학살은 수마트라인들이 보기엔 똑같이 “자바인들의 침략’에 다름 아니었다. 람뿡에서 벌어진 학살은 자바인들의 이주민 유입에 기인한 바가 크다. 서부 깔리만탄에서는 자바에서의 학살사건이 있은지 18개월 쯤 후 이슬람을 믿지 않는 토착 무신론자인 다약족이 농촌지역에서 45,000명의 중국인들을 추방하는 과정에서 약 5,000명 정도를 살해했다. 한편 화교들은 스스로를 교역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땅에 들어온 손님’이라 여기고 있었으므로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7. 종교적, 인종적 요소들
자바의 이슬람은 힌두교나 토착신앙적 관습과 섞인 이슬람을 믿는 아방안(Abangan)들과 정통 이슬람 근본주의를 따르는 산뜨리(Santri)의 두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아방안들은 주로 공산당 지지자들이었으므로 공산당 역시 그들 편에 서서 이해문제에 간여하곤 했다. 그 결과 그들 대부분이 학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아방안들은 인도네시아군을 등에 업은 안소르(Ansor)라고 하는 나들라툴 울라마 청년조직과 산트리들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아방안 무슬림들은 무신론자나 공산주의자로 찍히지 않기 위해 학살이 난무하던 와중에 인도네시아 정부에 신청해 힌두교도나 기독교인으로 개종해야 했다.
북부 수마트라에서는 PKI 당원이 된 자바인 농장노동자들이 학살당했다.
수마트라와 깔리만탄에서의 학살에서 화교들을 그 대상으로 삼은 것이 특징적인데 이로 인해 이를 제노사이드라 부르려는 일단의 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찰스 A 초플(Charles A. Coppel)같은 사람은 이러한 성격규정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이러한 용어의 선택에는 서구 언론과 학자들이, 자신들이 승인한 바와 다름없는 반공 이슈의 참담한 결과를 바로 보지 않고 오히려 인도네시아인들의 인종차별문제로 프레임을 바꿔 수십, 수백만의 중국인들이 이 사건으로 학살당한 것처럼 포장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찰스 초플은 “존재하지 않는 제노사이드: 1956-66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반중국 학살사건들의 비밀을 설명한다”(A genocide that never was: explaining the myth of anti-Chinese massacres in Indonesia, 1965–66)라는 기사를 통해 왜곡된 보도들에 대한 비판의견을 담았다. 초플은 인권을 위한 자원봉사팀이 당시 비중국인 약탈자들이 피살당한 이들의 대부분을 차지함을 인지했다는1998년 5월 자카르타 폭동기사에서도 같은 종류의 왜곡을 발견했다. 그의 주장은 논쟁에 불을 붙였다. (사진: 찰스 A 초플)
50만 명에서 3백만 명 사이로 추정되는 학살 희생자들 중 화교들은 불과 2,000명 정도로 추정되며 그들에 대한 학살이 벌어진 곳은 마카사르, 메단, 롬복 등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 화교 희생자 숫자가 너무 축소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로버트 크립(Robert Cribb)과 찰스 초플에 따르면 학살당한 중국인들은 상대적으로 이주해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이며 전체 사망자의 대부분은 토착 인도네시아인이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수십만 명 이상의 전체 희생자들 중 중국인들은 불과 수천 명 선이었다는 것이다. 사망자들의 대부분이 토착 발리인들과 자바인들이었다.
8. 사망자와 투옥자들
이 사건의 개요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학살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해 사망자 숫자는 정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제대로 검증될 수도 없으리라 보인다. 당시 인도네시아에는 서구 언론인이나 학자들이 한줌 있을동말동 했고 여행은 자유롭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매우 위험한 모험이었으며 유일한 정보출처는 인도네시아 군이었는데 당시 학살을 승인하고 감독한 정권이 그 후 30년 넘게 권력을 유지했으니 관련
정보수집의 한계는 어쩌면 당연한 상황일 수도 있다.
1966년 10월 신질서 정부가 들어섰을 당시 인도네시아 매체들이 교도민주주의에 의해 거의 무너진 상태였다. 냉전 상태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서구권의 두려움이 큰 시점에 벌어진 이 학살사건들은 당시 PKI와 구질서 정권에 대한 연민을 유발하고 수하르토의 신질서 정권에 대한 서구권의 호감을 무너뜨릴 위험이 있어 실제로 국제적 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살사건 이후 20년이 지나는 동안 39번의 본격적인 사망자 조사가 시도되었다. 사건이 종료되기 전 인도네시아 육군은 78,500명이 죽었다고 발표한 반면 PKI는 사망자 수를 2백만 명이라고 발표했다. 인도네시아 군은 이후 사망자 수를 1백만 명이라고 고쳐 발표했고 1966년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사망자수를 20만명이라 말했다. 그러나 1985년 그는 그 숫자를 50만명에서 1백만 명 사이라고 정정했다.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당시 최소한 50 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음에 동의하는 추세이고 인도네시아 역사상 이보다 대규모로 전개된 학살의 전례는 없었다. 한편 1976년의 군 안보사령부는 45만명에서 50만 명 사이라고 집계한 바 있다. (사진: 베네딕트 앤더스, 아일랜드 국적의 사학자이자 코넬대 교수를 역임했다)
이 사건과 연관된 체포와 투옥은 실제로 그 후 1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1977년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의 보고서에 따르면 약 1백만 명의 PKI 간부들 및 PKI에 간여한 것으로 확인되었거나 의심되는 이들이 당시 아직 투옥되어 있다고 전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1981년에서 1990년 사이에160만 명에서 180만 명에 달하는 이들이 석방되어 사회로 돌아간 것으로 집계했다. 1970년대 중반 약 10만 명정도가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여전히 투옥되어 있었으리라는 추정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150만 명 정도가 일괄적, 또는 순차적으로 투옥되었으리라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살해되거나 투옥되지 않은 PKI 당원들은 숨어살거나 과거를 숨기려 노력했다. 체포된 자들은 정치가, 예술가, 쁘라무디야 아난타 뚜르같은 작가, 농부, 군인 등을 망라했다.
곳곳에 흩어진 감옥과 수용소에 수감된 이들은 혹독한 반인권적 상황을 견뎌내야 했다. 많은 이들이 수감 초기에 영양실조과 구타로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은 고문당한 끝에 공산당 지하조직원들의 이름을 불었으므로 1966-1968년의 기간 중 수감자의 숫자는 증가일로였다. 전선같은 것으로 아무렇게나 만든 채찍, 커다란 나무 몽둥이를 사용한 구타뿐 아니라 손가락을 부러뜨리거나 발가락이나 발을 책상 다리나 의자로 밟아 으깨거나 손톱을 뽑거나 전기고문, 녹은 고무나 담배꽁초로 피부를 지지는 등 다양한 고문수법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수감자들은 지인들이나 배우자, 심지어 자식들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억지로 보거나 듣도록 강요당하기도 했다. 남녀 수감자 모두 강간이나 성기에 가하는 전기고문 등 성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수감생활에서 풀려난 후에도 가택연금을 당하기 일쑤였고 정기적으로 군에 소재지를 보고해야 했으며 그들은 물론 자녀들까지도 공직진출이 금지되었다.
(계속)
'인도네시아 현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로부두르 사원 (2) | 2019.01.18 |
---|---|
인도네시아 대학살(1965-66) -(3) (0) | 2019.01.17 |
인도네시아 대학살 (1965–66년) - (1) (0) | 2019.01.15 |
사르워 에디 위보워 (Sarwo Edhie Wibowo) - 수하르토의 오른팔, 유도요도의 장인 (0) | 2019.01.14 |
인도네시아 경제해결사 - 버클리 마피아 (0) | 2019.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