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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쩨 유혈보복 사건- 이디쭛 사태 본문
아쩨(Aceh) 유혈보복 - 이디쭛 사태 (Tragedi Idi Cut)
이디쭛 사태는 ‘아라꾼도(Arakundo)의 비극’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1999년 2월 4일 아쩨의 이디쭛(Idi Cut)이란 곳에서 벌어졌다. 당시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인도네시아군이 민간인 일곱 명을 살해하고 수백 명을 다치게 한 사건이었다. 당시 범행을 저지른 이들은 아직까지 체포되지도 재판을 받지도 않았다. (사진: 아라꾼도 강의 철교에서 시신 인양작업을 지켜보는 시민들)
때는 바야흐로 외환위기가 맹위를 떨치던 가운데 터진 1998년 5월 자카르타 폭동에 이어 수하르토 대통령이 하야한 후 인도네시아 전국의 종교분쟁과 인종분쟁 등 모든 문제들이 최악의 모습으로 터져 나오던 시기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아쩨, 동티모르, 서파푸아(당시 이리얀자야) 등 분리독립운동이 전개되던 지역은 관련 보도가 적었는데 꼭 그게 다른 곳보다 상황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특히 동티모르는 국제사회의 압력 속에서 실제로 분리독립 수순을 밟는 중이었고 그래서 더욱 치명적 폭력이 난무했다. 동티모르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인도네시아 정부는 당연히 아쩨와 서파푸아를 더욱 옭죄었고 자유아쩨운동(GAM), 파푸아해방기구(OPM)와 전투를 벌여 반군을 사살하는 것 정도는 뉴스거리도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 사건은 그런 혼란기에 벌어졌다.
이 사건은 1998년 12월 29일 록니봉(Lhok Nibong) 지역에서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일단의 사람들이 불심검문을 하던 중 군인 몇 명이 살해당한 일에 대한 군의 보복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당시 군인들의 시체는 강에 버려졌는데 이후 벌어진 이디쭛의 학살현장에서 군인들이 “너희들이 내 친구들을 죽여서 강에 버렸지? 너희들도 한 번 당해 봐!”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주장이 이런 의혹을 강력히 뒷받침했다.
북부 수마트라 아쩨 지역
록니봉에서의 사건이 있은지 한 달이 조금 지난 1999년 2월 2일 동부 아쩨 다룰 아만(darul Aman) 지역 마땅울림 마을(Desa Matang Ulim) 주민들은 이디 쭛의 심빵 꾸알라 광장(Lapangan Simpang Kuala)에서 곧 있을 연설회 행사를 위해 무대를 만들던 중이었다. 오후 4시경 소총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이 나타났는데 이웃에 있는 지역수비대(Koramil) 병사들이었다. 그런데 군인들은 주민들이 만들고 있던 무대를 마구 때려부수더니 거기 나와 있던 주민들에게 폭행을 가했다. 나중에 공식적인 해명은 당시 행사가 독립아쩨운동(GAM)이 주도하는 것으로 의심되어 제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내 부서진 무대를 다시 고쳐 세워 행사준비를 마무리했다. 그날 저녁 8시반에 시작된 행사에는 주민들 약 1만 명이 인근지역으로부터 모여들어 심빵꾸알라 광장을 가득 채우고 메단과 아쩨를 연결하는 간선도로변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행사는 자정을 넘겨 12시 45분경에 끝났고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도보나 오토바이 편으로 귀가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짐칸이 열린 트럭을 타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 이디쭛에 있는 지역수비대 본부 앞을 지나야 했는데 일단의 군중들이 수비대 병영을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도 포착되었다. 점령군 행세를 하며 폭력행사도 마다치 않는 인도네시아군을 드높은 자존심과 독립성을 가진 아쩨인들이 좋아했을 리 없는 일이다. 그러자 갑자기 새벽 1시경 병영 방향으로부터 군중들에게 무차별 총격이 쏟아졌다. 군중은 혼비백산했고 사람들이 힘없이 픽픽 쓰러졌다. 병영 안에서는 트럭 몇 대가 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첫 번째 총격이 마침내 잦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두 번째 총격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주민들이 쓰러진 가운데 피해자 중 한 명은 군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너희들이 우리 전우들을 죽였으니 너희들도 모조리 죽여주마. 너희들이 군인들 목을 베고 강에 버렸지!” 학살에 가담한 이들은 리누드100 대대(Batalon Linud 100) 소속이었다는 증언도 다수 있다. 군인들은 길가에 널브러진 사망자와 부상자들을 마구잡이로 군용트럭에 실렸다. 하지만 총격을 당하고서도 용케 길가 도랑에 숨어 목숨을 건진 이들도 있었다.
새벽 3시경 피격당한 사람들을 실은 군용트럭 세 대가 아라꾼도 강 철교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많은 이들이 목격했다. 당시 피해자들은 트럭에 실리기 전 온몸을 꽁꽁 포박당한 후 군인들 개인 소유였던 것으로 보이는 대형 마대자루에 집어넣어진 상태였는데 마대자루에는 “이스칸다르 중사’ 같이 군인들 이름표도 붙어 있었다. 군인들은 마대자루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모두 강으로 던져버렸다. 당시 그 마대자루 안의 희생자는 대부분 아직 살아있었으므로 산 채로 던져진 이들은 모두 익사하고 말았다. 아라꾼도 철교 근처에 흩뿌려진 희생자들의 피를 군인들이 모래를 뿌려 감추려 했다고 증인들은 전한다. 그 모래는 주민들 중 모래업자가 강에서 퍼 올려 철교 가까이 야적해 놓은 것이었다.
2월 4일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군대가 여전히 이디쭛의 학살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무차별 총격은 그때까지도 간헐적으로 벌어졌다. 그날부터 이후 며칠 동안 주민들은 강에서 수색작업을 하여 시신이 담긴 대형 마대자루 여섯 개를 건져냈다. 일곱 번째 시신은 총상을 입고 사망한 상태로 차량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 외에도 수십 명이 이 사건으로 부상당했다. 민간인 58명이 사건 전개과정에서 체포되어 고문당한 후 투옥되었다가 2월 5일 모두 풀려났다. 심빵꾸알라 행사에서 연사로 나섰던 세 명과 GAM(아쩨반란군) 요원으로 의심되는 이들도 군에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실종된 13명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희생자 수색작업은 군이나 다른 기관이 도움을 거절했으므로 민간 재래장비들을 이용해 이루졌다. 군이 돌을 매달아 던진 시신들 대부분은 결코 수면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철교 주변에서는 탄흔과 함께 삔닷(Pindad) 로고가 새겨진 탄피들이 발견되었다. 희생자들을 강으로 던져 넣는 과정에서도 총격이 있었다는 정황증거였다. 삔닷은 인도네시아군에 무기를 공급하는 반둥 소재 방산업체 이름이다.
이디쭛 사태 희생자 집계는 군과 주민들이 각각 다른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주민들은 강에서 건져 올린 시신 여섯 구와 철교 근처에서 사살된 시신 한 명 등 총 일곱 명의 사망이 확인되었다고 했고 와스빠다(Waspada)지 보도에 따르면 2월 6일 버스 다섯 대를 임대한 주민 수십 명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그중 버스 한 대는 운전사와 승객 모두 버스 째로 실종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죠니 와합 대령(kolonel Johnny Wahab)은 이 모든 것이 근거 없는 소문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이 사태로 목숨을 잃은 주민은 많아야 2-3명이며 당시 행사에 모인 5천여 명은 모두 자유아쩨운동(Gerakan Aceh Merdeka-GAM) 지지자들이었다고 주장했다. 만약 죽은 사람이 있더라도 죽어 마땅한 자들이란 뉘앙스였다.
아쩨 주지사 샴수딘 마흐무드(Syamsudin Mahmud)는 이를 비인간적이고 경악스러운 사건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쓰레기를 강에 버리는 관행을 잘 알고 있지만 이번에 저들은 사람 시체를 강에 버렸다”고 비난했다.
이디쭛 사태는 국제사면위원회가 아쩨 폭력진압 규명 독립위원회(KPTKA)에게 조속한 조치를 요구한 다섯 개 사안 중 하나였다. 대검찰청이 1999년 11월 조사를 시작했으나 아직까지도 당시 학살에 가담한 군인은 단 한 명도 체포되거나 재판에 넘겨지지 않았다.
1999년 2월 7일 이디쭛 사태 조사에 참가한 FP HAM의 자원봉사자 안와르 유숩(Anwar Yusuf)은 이디 라육 지역(Kecamatan Idi Rayeuk) 대대사령부 요원들이라 밝힌 일단의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 그는 아라꾼도 강을 방문한 것에 대해 네 명의 군인들에게 연거푸 조사를 받은 후 GAM 반군 요원이라는 혐의를 뒤집어썼다. 지역수비대 본부에서 조사가 진행될 때 유숩은 반복된 고문과 각목, 빗자루, 의자 등을 이용한 구타, 뜨거운 커피를 끼얹고 각목을 끼고 무릎꿇고 앉는 등의 고문은 물론 쏴 죽이겠다는 협박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1999년 2월 10일 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지기 직전 그는 동부 아쩨 군지역사령부로 이송되었다가 뜬금없이 당일 모든 혐의를 벗고 풀려났다. 군이 그에게 GAM 반군 혐의를 입히는 것은 더 이상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언론이 아쩨 주민들에게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간지 스람비 인도네시아(Serambi Indoensia)는 당시 아디쭛 주민들이 행한 행사가 “자유 아쩨 연설회”였다고 보도하면서 참석자들이 모두 GAM 구성원들이라는 견해를 시사하여 주민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조직위원회는 당시 강연내용들은 아쩨인들의 저항역사에 대한 것이었고 아쩨 주민들이 시시때때로 갖는 여느 행사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2019년은 이 사건의 20주년으로 몇몇 관련기사들이 일부 신문에 올라왔지만 진상규명활동은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동티모르의 인권탄압혐의와 마찬가지로 당시 지휘관들이 아직도 권력층 중심에 있고, 특히 아쩨나 서파푸아의 문제를 느슨하게 푸는 것은 인도네시아의 국가해체를 초래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상존하므로 절대 쉽게 규명되어 사법처리될 성질의 사안이 아니라 보인다. 그래서 희생자들의 억울함과 울분은 아직도 풀 길이 없다.
과거 이승만 정권시절 제주도 양민들을 공권력과 서북청년단이 마구잡이로 학살했던 4.3사태 70주년을 맞아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졌던 학살장면 하나를 가져와 보았다. 하지만 한국의 4.3사태와 그 과정에서 발생한 양민학살은 그 규모와 악랄함에서 본문의 이디쭛 사태와 비할 바 아닐 것이다. (끝)
참고자료
https://id.wikipedia.org/wiki/Tragedi_Idi_Cut
https://kabaracehnews.com/20-tahun-sudah-peristiwa-berdarah-tragedi-araku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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