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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벨로 주교 본문
카를로스 필리페 지메니스 벨로 주교
(Carlos Filipe Ximenes Belo)
카를로스 필리페 지메네스 벨로 주교는 1948년 2월 3일 동티모르 북부 해안가 베나세(Venasse) 지역 인근 와일라카마(Wailakama)라는 마을에서 도밍고스 바즈 필리페(Domingos Vaz)와 에르멜린다 밥티스타 필리페(FilipeErmelinda Baptista Filipe)의 다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교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2년 후 세상을 떠났고 그는 어린 시절을 바우카우(Baucau)와 오수(Ossu)의 카톨릭계 학교에서 보낸 후 딜리 외곽의 다레 준신학대학(Dare minor seminary)으로 진학하여 1968년 졸업했다. 1974-1976년 기간 도이모르와 마카오에서 지낸 견습사제 기간을 제외하고는 1969년부터 1981년까지 그는 포르투갈과 로마에서 살레시안 소사이어티(Salesian Society-SDB)의 회원이 되어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1980년 신부 서품을 받았다. (사진: 벨로 주교)
1981년 7월 동티모르로 돌아오는 그는 20개월간 교사로 근무했고 파투마카(Fatumaca)의 살레시안 대학에서 두 달간 학장으로도 일했다.
1983년 마르친뉴 다 코스타 로페스 주교가 사임하자 카를로스 필리페 지메네스 벨로는 교황 직속의 동티모르 교회 전체의 수장인 딜리 교구의 사도행정관으로 임명되었고 1989년 2월 6일에는 로리움(Lorium)의 명목 주교로 서품받았다.
벨로 신부는 그가 복종적 인물일 것이라 생각했던 바티칸의 자카르타 프로 눈시오(Pro Nuncio)와 인도네시아 지도층의 선택이었으므로 그를 지지하지 않았던 티모르 성직자들은 그의 선임에 대한 불만으로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취임 후 5개월 만에 성당에서 설교를 톨해 크라라스 학살(the Kraras massacre-1983년)의 잔혹성을 가열차게 비판했고 인도네시아인들이 벌이고 있던 막무가내식 체포행위를 비난했다. 크라라스 학살은 동티므로 비크크(Viqueque) 지역 크라라스에서 1983년 8월과 9월 사이에 인도네시아군과 티모르 한십(Hansip) 조직원들이 저지른 대량학살 행위를 말한다. 한십(Hansip)은 시민자경단원을 뜻하는 Pertahanan Sipil의 약자로 1972년 대통령령으로 조직되어 각 마을의 치안조직으로 활동하다가 2014년 폐지되었다. 이 사건으로 주로 성인 민간인 남성들 200여명이 살해되었고 이 지역은 지금도 ‘과부들의 계곡’이라 불린다.
영화 <베이트리즈의 전쟁 (A Guerra da Beatriz)>에 등장하는 크라라스 학살장면
당시 교회는 동티모르에서 외부 세계와 소통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통로였으므로 이를 잘 알고 있던 신임 사도행정관 벨로 주교는 인도네시아측의 압박과 대부분 세계의 무관심으로 야기된 철저한 고립상황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외국에 편지를 보내며 동티모르의 소식을 전하는 데에 애썼다.
1989년 2월 그는 포르투갈 대통령과 교황, 유엔사무총장에게 편지를 써 유엔이 동티므로의 미래를 결정할 국민투표를 열어줄 것과 “국민으로서, 또한 국가 자체로서 죽어가고 있는” 동티므로에 대한 국제적 도움을 촉구했다. 그런데 유엔에 보낸 편지가 그해 4월 일반에 공개되면서 그는 더욱 더 인도네시아측의 요주의 대상이 되었다. 1991년 산타크루즈 학살이 벌어졌을 때에는 도망쳐 온 젊은이들을 위해 자기 집을 피난처로 제공한 것이 셀 수도 없으며 살해된 희생자 숫자를 세계에 알리려 지난한 노력을 경주했다.
동티모르인들을 대신한 노력과 평화와 화합을 위한 헌신으로 그는 1996년 12월 호세 라모스-호르타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과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과의 만남을 통해 노벨평화상 수상을 영예롭게 생각함을 전했다. 그는 1995년 캐나다 인권단체인 ‘권리와 민주주의’(Rights & Democracy)로부터 존 험프리 자유상(John Humphrey Freedom Award)를 수상하기도 했다. (사진: 라모스-호르타와 함께 노벨평화상 수상)
2002년 5월 20일 동티모르가 막 독립하여 혼란스럽던 와중에 그간 그가 견뎌온 일들로 인한 스트레스가 건강의 적신호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요한 바로오 2세 교황은 2002년 12월 26일 벨로 주교의 사도행정관직 사퇴를 수리했다.
그후 그는 치료를 위해 프로투갈에 갔다. 2004년 초까지 어서 돌아와 대통령직에 도전해 달라는 동티모르로부터의 요구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2004년 5월 그는 포르투갈 국영 TV 방송국 RTP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이름이 대통령 후보로 오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정치는 정치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 제 결심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2004년 6월 7일 살레시안 소사이어티의 수장 파스쿠알 차베즈(Pascuál Chavez)는 벨로 주교의 건강이 회복되어 곧 다른 직책을 맡게 될 것이라고 로마에서 발표했다. 그는 홀리씨(Holy See)의 요청에 동의해 모잠비크에 선교사로 나갔고 그곳 살레시안 소사이어티 회원으로 살았다. 벨로 주교는 6월 8일의 성명을 통해 2003년과 2004년 ‘전도를 위한 회중’ 측과의 두 번의 회합결과에 따라 자신은 어릴 적부터의 희망해던 바에 따라 모잠비크의 마부토 교구로 임무를 받아 떠난다고 밝혔다. (사진: 살레시안 소사이어티 로고)
그는 2004년 7월에 출발했는데 같은 해 CEU 카디널 헤라라 유니버시티의 명예박사학위도 수여했고 2011년 2월 국제 루소포노 운동(MIL: Movimento Internacional Lusófono)으로부터 올해의 루소포닉 인물상(Prize for Lusophonic Personality of the Year)을 수상하기도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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