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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 -(5) 본문

동티모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 -(5)

beautician 2019. 2. 18. 10:00



5. 인도네시아의 우세


그해 1217일 인도네시아는 아포데티의 아르날도 도스 레이스 아라우요(Arnaldo dos Reis Araújo)를 대통령으로 하고 유디티의 로페즈 다 크루즈(Lopez da Cruz)가 함께 국정에 참여하는 동티모르 임시정부(PGET-Provisional Government of East Timor)를 구성했다. 이 조직은 인도네시아군의 창작품이나 다름없었다. PGET가 한 첫 번째 일은 선출된 대의원들과 동티모르의 다양한 생활군 지도자들로 일반의회’(Popular Assembly)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PGET와 마찬가지로 일반의회 역시 대체로 인도네시아군이 생산한 프로파간다를 홍보하는 도구였다. 19765월 이 조직의 회합에 국제 언론인들이 초청되어 취재했지만 그들은 행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의회는 인도네시아와의 공식합병 요청서를 초안했는데 자카르타는 이를 동티모르의 자결권 행동이라고 묘사했다. (사진: 동티모르 초대 주지사 아르날로 도스 레이스 아라우요)


 이제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의 인민들 대부분이 합병에 찬성한다고 주장하면서 동티모르를 나머지 전세계로부터 완전히 차단시켰다. 조금 개방이 이루어진 것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의 몇 년간뿐이었다. 인도네시아의 매체들도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와의 합병을 받아들인 것은 인도네시아인들로서는 당연한 일일 뿐 아니라 얘기거리도 되지 못한다는 식으로 받아쓰며 인도네시아 정부입장에 호응했다. 동티모르에 인도네시아의 강력한 군사력이 주둔하면서 이제 아쩨와 파푸아 진압부대의 전술 훈련장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1) 인도네시아군의 저항진압작전


수하르토에게 영향을 끼칠 위치의 인도네시아 고위 정보직들은 초창기엔 침공과 프레틸린 저항의 진압, 그리고 인도네시아와의 합병이 신속하면서도 상대적으로 큰 문제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1976년까지를 관통하는 인도네시아의 후속 전투 전개는 동티모르인들에게 더없이 파괴적이었을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에게도 밑빠진 독에 물붓는 식으로 엄청난 자원을 소모하며 오히려 인도네시아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손상시켰고 궁극적으로 대실패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려갔다. 침공 초창기에 인도네시아군은 해안지역에서 무턱대고 대량의 살인을 저지르면서 동티모르 인구의 상당수와 팔린틸 부대 대부분을 중앙지역으로 밀어 넣었다. (사진-동티모르 합병기념비: 인도네시아 정부가 딜리에 기증한 동상으로 식민주의로부터의 해방을 묘사했다)


하지만 이는 인도네시아 부대들이 잘 무장되고 농작물과 전투원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상태의 적과 맞서 싸워야 하는 전혀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 민간인들은 팔린틸 부대를 인도네시아군의 폭주를 막아줄 방패로 인식하고 저항역량을 결집시켰다. 1975년부터 1977년 사이 프레틸린은 황폐한 해안지역으로 피신해 전열을 정비하면서도 그들에게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 민간인들의 최소 40%를 보호해냈다. 슈와르츠(Schwarz)는 인도네시아군의 세력기반이 1970년대 중반의 정보 계산착오와 계속되는 실책에도 불구하고 거의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인도네시아군이 얼마나 강력한 우세를 점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주장했다.


1976년 말까지 팔린틸과 인도네시아군 사이의 전세는 소강상태를 보였다.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면서도 강력한 저항을 무너뜨리지 못한 인도네시아군은 화력을 보강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해군은 미국과 호주, 네덜란드, 한국, 대만 등에 미사일 발사가 가능한 경비정들을 주문했고 서독에는 잠수함들을 발주했다. (사진: OV-10 브롱코 정찰전폭기) 19772월 인도네시아는 미국의 공식적인 외국군비 외상판매 프로그램을 통해 로크웰(Rockwell International Corporatino)사로부터 OV-10 브롱코(Bronco) 공격용 정찰기 13기를 넘겨받기도 했다. 브롱코는 산악지형에서 진압작전에 특화해 고안된 기종으로 동티모르 작전에 가장 이상적인 전투기였다 19772월 초까지 이들 13기 중 최소 6기가 동티모르에서 활동하면서 인도네시아군이 프레틸린의 위치확인을 도왔다. OV-10 브롱코는 정찰뿐 아니라 재래무기는 물론 소련에서 공급한 오팜’(Opalm)이라는 이름의 네이팜판을 프레틸린 진영에 떨어뜨려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이들 신무기들과 함께 인도네시아군은 1만 명의 병력을 증원해 새로이 전투를 시작했는데 이 전투는 훗날 최후의 해결책’(Final Solutio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인도네시아군의 전략가들은 19779월초부터 마모(Attrition) 작전이라는 전략으로 팔린틸 부대와 싸웠다. 이는 네이팜탄 공격, 화학전, 농작물 파괴 등을 통해 동티모르의 중앙지역을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불모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우선 그곳 민간인들이 인도네시아군에게 항복하고 나오도록 할 목적이었고 궁극적으로 팔린틸의 식량과 병력을 고갈시키려는 것이었다. (사진: 팔린틸 깃발) 동티모르의 카톨릭 사제들은 이를 포위섬멸작전(encirclement and annihilation campaign)이라 불렀다. 35,000명의 인도네시아군이 프레틸린 지역을 포위, 공격하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공습과 함포사격이 있은 후 육상부대가 밀고 들어가 마을과 농경지를 철저히 파괴했는데 이 시기에 수천 명이 살해되었다. 1978년 초 인도네시아 국경 인근의 아르사이바이(Arsaibai) 마을은 프레틸린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주민 전원이 폭격과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다. ‘포위섬멸작전이 성공하자 인도네시아군은 최종청소작전’(final cleansing campaign)으로 돌입했는데 이 과정에서 프레틸린 조직원들을 색출하려는 인도네시아군은 그들 앞에 민간인들을 세워놓고 그들 중의 프레틸린 조직원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고 직접 그들을 사살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인도네시아군이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포격이 있은 후 작물 위로 구더기들이 창궐했다는 마을사람들의 보고가 있었던 것이다. 프레틸린 라디오는 인도네시아군 항공기가 화학약품을 투하했다고 방송했고 딜리의 주교를 비롯한 많은 목격자들이 교외에서 네이팜탄 폭격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유엔의 동티모르의 포용, 진실, 화해 위원회는 8천 명이 넘는 증인들과의 인터뷰, 인도네시아 군문서 확보, 해외 소식통으로부터 정보 등을 통해 인도네시아군이 포위섬멸작전을 수행하던 시기에 프레틸린 점령지의 식량과 물을 오염시키기 위해 화학무기와 네이팜탄을 사용했음을 확인했다.


1977-1978년 사이에 벌어진 인도네시아군의 포위섬멸작전은 잔혹하면서도 효과적이어서 결과적으로 프레틸린 민병대에 대한 지지를 효과적으로 분쇄할 수 있었다. 동티모르의 프레틸린 정부의 대통령이자 군사령관으로 능력을 발휘했던 니콜라우 로바토(Nicolau Lobato)19781231일 인도네시아군의 공격을 받아 사살되었다. (사진: 니콜라우 로바토)


니콜라우 도스 레이스 로바토는 동티모르의 정치인이자 국가영웅으로 포르투갈령 티모르의 소이바다(Soibada)에서 1946 5 24일 태어났다. 1966년 포르투갈 육군에 입대한 그는 상사 계급까지 올랐으나 딜리에 돌아온 후 군복을 벗고 농림부와 재무부에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74년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이 벌어지며 동티모르 독립의 희망이 부풀어 오르자 그는 프레틸린의 전신 동티모르 사회민주주의 연합(ASDT)의 설립에 주도적으로 간여했고 1975 11 28일부터 12 7일까지 동티모르의 초대 총리를 역임했다. 로바토는 다른 프레틸린 지도자들과 함께 인도네시아의 침공으로 오지로 밀려났지만 저항을 계속했다. 1978년의 마지막 날, 그를 강습한 부대는쁘라보워 수비안토가 이끄는 인도네시아 특수부대였고 이 전투에서 의 매복공격을 받아 복부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딜리로 옮겨져 부검되면서 언론에 공개되었는데 인도네시아 당국이 그의 시신에 어떤 짓을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아 훗날 동티모르 정부가 이 문제를 인도네시아에 줄기차게 제기해 왔는데, 아무튼 당시 동티모르인들은 그의 시신을 어렵사리 돌려받아 마침내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그는 훗날 인도네시아의 국가영웅으로 추대되었고 동티모르 국제공항 니콜라우 로바토 대통령 국제공항(Presidente Nicolau Lobato International Airport)은 그의 이름을 따 붙여졌다.


 그는 사망 당시 동티모르의 대통령이자 팔린틸의 총사령관이었다. 자나나 구스마오가 그의 뒤를 이어 팔린틸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2) 재정착과 강요된 기아

작물들이 파괴됨에 따라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민간인들 상당수가 어쩔 수 없이 산에서 내려와 인도네시아군에 항복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군이 그들을 즉결 처형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처형당하지 않은 투항자들을 인도네시아군은 해당 지역 기지 가까이에 미리 준비해 둔 교화시설로 보냈다. 그들은 거기 입소한 후 심문당했고 저항세력의 조직원이라고 의심되면 즉각 처형되었다.


이러한 시설들은 대개 이엉을 엮어 만든 초가집이었고 화장실도 따로 달려있지 않았다. 인도네시아군은 인도주의적 도움을 주려는 적십자사의 접근을 금지했고 수용자들에게는 어떠한 의료행위도 제공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기아로 인해 이미 병약한 상태에서 찔끔 던져주는 몇 톨 안되는 음식으로 연명하던 동티모르인들 상당수가 영양실조, 콜레라, 이질 및 폐렴으로 목숨을 잃었다. 1979년 말까지 30만에서 37만 명의 동티모르인들이 이러한 수용시설을 거쳐 나갔다. 3개월 후 수용자들은 전략 마을이라는 곳에 정착했지만 그곳에서도 감금과 굶주림이 그들을 기다렸다. 이 캠프에 수용된 이들에겐 여행과 경작이 금지되었고 야간통행금지도 실시되었다. 유엔 진실위원회는 인도네시아군이 의도적으로 기아를 발생시켜 동티모르 민간인들을 멸절시킬 무기로 삼았으며 같은 맥락에서 음식제공을 의도적으로 제한했음도 확인했다. 이 보고서는 음식공급을 받지 못했던 이들의 증언을 담았고 인도네시아군이 어떻게 곡물과 가축들을 파괴했는지 그 구체적 방식도 기록했다. 결과적으로 이 기아정책은 84,200명에서 183,000명 사이 동티모르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 교회 직원은 한 지역에서 매월 500명의 동티모르인들이 죽어 갔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197810월 동티모르를 방문한 월드비젼 인도네시아는 7만 명의 동티모르인들이 기아선상에 내몰려 있다고 주장했다. 적십자 국제위원회(ICRC)의 사절단도 1979년 보고서에서 한 캠프 인구의 80%가 영양실조에 걸렸고 비아프라(Biafra-나이지리아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던 아프리카 국가)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고 기록했다. ICRC는 당시 기아로 고통받는 동티모르인들이 수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도네시아는 국가가 자체 운영하는 인도네시아 적십자를 통해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 밝혔으나 세계개발을 위한 NGO 운동’(NGO Action for World Development)은 담당 기관이 구호품들을 시장에서 팔아먹고 있다고 비난했다.

 


3) 여성에 대한 성노예화 및 체계적 폭력

동티모르 여성에 대해 인도네시아가 가한 폭력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그 실체적 범위는 강점기 당시 군이 해당정보의 유출을 강력히 통제한 탓에 그 실체를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그나마 비교적 잘 기록된 문서 일부가 남아 있어 이를 통해 피해자들이 느낀 굴욕감을 공감할 수 있다. 1995년 국제사면위원회 미국지부는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에서의 여성 대상 폭력을 다룬 보고서에서 여성들은 강간과 성폭력 사실에 대해 NGO에게 해당 정보를 말하기 꺼렸다. 그런 그들이 하물며 그런 피해를 군이나 경찰당국에도 신고했을 리 없다고 말하고 있다.


성노예 문제는 인도네시아군이 제도적으로 허용하고 지원하여 동티모르 여성들이 군인들의 성노리개로 불려나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믿을 만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강간 및 성폭력을 대상이 될 만한 동티모르 여성들의 파일을 인도네시아군이 만들어 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 명단이 대대본부에 전해지면 군은 해당 여성들을 잡아와 윤간의 희생물로 삼았다.


강제결혼 역시 인도네시아군이 동티모르에서 시행한 정책 중 하나였다. 국제사면위원회 보고서에는 바우카우(Baucau)에서 한 여성이 강제로 부대 지휘관과 살다가 나중에 그 지위를 잃자 부대원들에게 매일 성폭력에 시달려야 했던 사례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유사 결혼은 점령기간 내내 줄곧 발생했다.


인도네시아가 산아제한을 통해 동티모르의 인구를 감소시키려 한 정황도 엿보인다. 인도네시아군 주둔지의 여성들은 불임수술을 강요당했고 어떤 여성들은 피임제 데포 프로버라(Depo Provera)를 강제로 주사맞기도 했다. 마을 지도자들은 인도네시아군의 이러한 정책에 협조하라고 강요당했고 시골에도 피임제 주사를 놓는 클리닉들이 인도네시아군의 감독 아래 세워졌다. 일단의 여고생들이 자기도 모르게 피임제 주사를 맞은 경우도 보고되었다. 또 다른 형태의 산아제한조치가 이루어졌는데 그 조치 중엔 프레틸린 조직원 사이에서 낳았다고 의심되는 신생아들을 살해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명백히 동티모르인들을 말살시키거나, 최소한 미래의 저항세력으로 커갈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동티모르인들의 개체수를 줄이겠다는 시도로 보인다.



 동티모르 여성들은 이러한 체계화된 성노예 관행, 불임수술 강요, 강제결혼, 고문, 재판을 거치지 않은 간이처형 등을 겪어야 했을 뿐 아니라 심문 중에도 인도네시아 당국으로부터 강간과 성폭력을 감수해야 했다. 피해자들은 주로 저항군 조직원의 부인들, 저항조직 요원, 프레틸린에 협력한 것으로 의심되는 여성들을 모두 망라했다. 프레틸린으로 의심되는 남성 가족 구성원이 출두하지 않을 경우 그 집안의 여성들이 잡혀와 고문당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일상화되었다. 1999년 조사원이었던 레베카 윈터스(Rebecca Winters)는 부이베레: 동티모르 여성들의 목소리(Buibere: Voice of East Timorese Women)이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인도네시아군 점령 초창기부터 개인들이 당한 수없는 폭력과 학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진: 부이베레 표지) 그중 한 여성은 몇 주 동안 심문받으면서 반쯤 발가벗겨져 고문당하고 구타당하며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경험을 증언했다. 프레틸린 게릴라에게 음식을 공급했던 한 여인은 담배꽁초를 살을 지지고 전기고문을 받은 후 발가벗겨진 채 군인들 앞을 걸어 분뇨로 가득 찬 탱크 안에 들어가도록 강요당하기도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