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살아 가기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 -(4) 본문
4. 침공
1975년 12월 7일 오전 3시 두 척의 포르투갈 코르벳함인 NRP 조아오 로비(NRP João Roby ) 호와 NRP 아폰소 쎄르퀘이라 호가 아타루오에 정박해 있던 중 해상과 공중에서 다수의 표적물들이 접근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건 딜리 공격에 나선 인도네시아군의 항공기와 선박들이었다.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이 시작된 것이다. 레모스 피레스와 그의 측근들은 곧바로 전함에 승선해 아카루오를 떠나 호주 다윈으로 피신했다.
인도네시아군의 본격적인 동티모르 침공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세로자 작전(Operasi Seroja – 연꽃 작전)은 인도네시아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군사작전이었다. 딜리의 해군을 폭격한 후 해협을 가로지른 인도네시아군의 함정들이 해안에 육상부대를 풀어놓았다. 동시에 641명의 공수부대가 딜리로 투하되어 팔린틸 부대들과 여섯 시간동안 시가전을 벌였다. 작가 죠셉 네빈스(Joseph Nevins)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해군함정들이 육상부대의 전진을 돕는 한편 군수송기들은 팔린틸 부대 상공에 공수부대를 투하하여 결과적으로 팔린틸이 퇴각하지 않으면 궤멸당할 수밖에 없도록 전세를 몰아갔다. 불과 반나절만에 인도네시아군은 도시를 함락시켰고 인도네시아 측은 35명, 팔린틸 측은 400명의 사망자를 내는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보였다.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 (1975~1979년)
인도네시아의 2차 공격이 12월 10일 동티모르의 두 번째 대도시 바우카우(Baucau)를 강타했고 성탄절엔 10,000명에서 15,000명에 이르는 인도네시아군 본진이 리퀴사(Lquisa)와 마우바라(Maubara)에 상륙했다. 1976년 4월까지 동티모르에 상륙한 인도네시아군 전력은 35,000명에 이르렀고 또 다른 10,000명이 서티모르에서 진주 명령을 대기했다. 병력의 상당수가 인도네시아 본토에서 온 정예부대였다. 그해 말 10,000명의 병력이 딜리에 주둔했고 20,000명이 동티모르 전역을 포위하듯 전개했다. 병력규모에서 수세에 몰린 팔린틸 부대들은 산악지역으로 들어가 게릴라 전투활동을 계속했다.
인도네시아군이 동티모르 전역에 진주한 상황에서 상당수의 동티모르인들은 살던 도시와 마을들을 버리고 해안과 산악지역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예전 포르투갈 식민지 정규군 2,500명으로 조직되었던 팔린틸 부대는 포르투갈의 무기로 잘 무장되어 있었으므로 인도네시아군의 침공을 비교적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그래서 침공 초기 인도네시아군은 딜리, 바우카우, 아일레우, 사메 같은 큰 도시들을 중심으로 지방 주요 요충지들만을 통제권 안에 두었고 지방과 산악지역은 여전히 팔린틸이 우세했다.
1976년 내내 인도네시아군의 전략은 주력부대가 해안으로부터 내륙으로 전개해 들어가, 훨씬 안쪽에 낙하해 들어간 공수부대 병력과 양동작전을 벌인 끝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전략은 잘 먹히지 않았고 팔린틸의 저항은 예상보다 강력했다. 예를 들어 해안으로부터 불과 3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도시 수아이(Suai)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3천 명의 병력이 4개월 동안 공략해야 했다. 이러한 전황을 드러내기 싫었던 인도네시아군은 여전히 외신기자는 물론 서티모르인조차 동티모르애 출입하는 것을 막았고 수하르토 자신도 1976년 8월 “프레틸린이 여기 저기 몇 군데에서 어느 정도 전력을 유지하고 있다”며 고전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1977년 4월 인도네시아군은 6개월 이상 전진이 막히면서 정체국면에 접어들었고 침공 이야기가 언론에 다시 등장하면서 국제여론의 수세에 몰렸다.
1) 인도네시아의 잔학행위
침공이 시작된 후부터 인도네시아군은 동티모르의 민간인들까지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인도네시아군의 점령이 시작될 무렵, 프레틸린은 다음과 같은 라디오 방송을 내보냈다. “인도네시아군은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여자와 어린이들도 거리에서 총을 맞고 있습니다. 우린 모두 죽게 될 것입니다….국제사회의 도움을 구합니다. 제발 이 침공을 멈춰 주세요.” 한 티모르인 도망자도 나중에 그때 벌어진 강간과 여자, 어린이, 중국인 가게 주인들에 대한 냉혹한 살인행위를 증언했다. 당시 딜리의 주교 마르친뉴 다 코스타 로페즈(Martinho da Costa Lopes)는 이렇게 증언했다. “상륙한 군인들은 누구든 닥치는 대로 살육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로엔 온통 시체들이 나뒹굴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군인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모습뿐이었습니다. (사진: 마르친뉴 다 코스타 로페즈 주교)
호주 프리랜서 기자 로저 이스트(Roger East)를 포함한 50여명의 남녀노소를 벼랑가에 줄지어 세워놓고 총질을 해 시신들을 벼랑 밑 바다로 떨어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학살은 딜리의 구석구석에서 벌어졌고 구경꾼으로 불려 나온 이들은 처형 장면을 똑똑히 보고 죽은 이들의 숫자를 크게 헤아리라고 주문받기도 했다. 침공 첫 이틀동안 딜리에서만 최소 2천 명의 동티모르인들이 살해당했다. 프레틸린 지지자들뿐 아니라 막무가내로 끌려 나와 처형당한 중국인 이민자들만 첫날 500명을 헤아렸다. (사진: 로저 이스트 기자)
로저 이스트(Roger East)는 호주 AAP-로이터 통신의 기자로 발리보에서 다섯 명의 기자들이 죽은 사건을 조사할 목적으로 동티모르를 여행하고 있었다. 그는 1975년 12월 7일 딜리에서 인도네시아군에게 체포되어 그 다음날인 12월 8일 총살당했고 그의 시신은 바다에 버려졌다. 이 사건으로 그는 발리보의 5인 중 잊혀진 여섯 번째 희생자라고 불리게 된다. 이스트의 검시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99년 국가범죄당국(National Crime Authority)의 전 회장이자 호주 정부 법무관 톰 셔먼(Tom Sherman)이 요청한 발리보 5인과 로저 이스트의 죽음에 대한 정부 청문회에서 다섯 명의 살해 증거는 찾아내지 못했으나 그들의 시신을 화장함으로써 전투 중 유탄에 맞아 죽었다고 둘러댄 ‘기념비적 대실수’의 증거들을 파괴하려는 했다며 인도네시아를 비난했다. 그러나 로저 이스트의 경우 발리보 사건과는 확연히 달랐다.
“로저 이스트를 살해한 장소는 도심에 가까웠으므로 목격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의 죽음에 대한 증거는 매우 명백했다. 두 명의 증인이 증언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증인 두 명이 더 나타나 살인에 대한 강력한 상황증거가 확보되었다. 로저 이스트에 대해 난 그가 1975년 12월 8일 늦은 오전 딜리의 부두 지역에서 신원 미상의 인도네시아 군인들에 의해 간이 처형되었을 개연성이 크다고 결론 내렸다.” 톰 셔먼의 말이다.
인도네시아군은 프레틸린이 지배하는 동티모르의 산간지역으로 진군해 가면서도 집단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고위 인도네시아 장교들의 길안내를 맡았던 한 티모르인은 나중에 주 포르투갈령 티모르 호주 영사였던 제인스 던(James Dunn)에게, 전투 첫 달 동안 인도네시아군이 길에서 마주치는 거의 모든 티모르인들을 사살했다”고 말했다. 1976년 2월 프레틸린의 남은 무장세력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딜리 남쪽에 위치한 아일레우(Aileu)라는 마을을 점령한 인도네시아군은 마을 사람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했는데 누구든 세 살 넘은 이들은 예외없이 총알세계를 받았다. 너무 어려 목숨을 살린 아이들은 트럭에 태워져 딜리로 이송되었다. 아일레우를 인도네시아군이 처음 점령했을 때 마을 인구는 5천 명이었으나 1976년 9월 인도네시아 구호활동가들이 이 마을을 방문했을 때에는 겨우 1천 명 정도만 살아남아 있었다. 1976년 6월 프레틸린군의 반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인도네시아군은 서티모르 경계 가까이의 라마크난(Lamaknan) 지역에 세워진 5~6천 명 규모의 대규모 티모르인 난민캠프를 공격해 철저히 보복했다. 몇 시간 동안 총을 갈겨 댄 인도네시아군은 캠프에 진입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2,000여 명을 학살했다.
1977년 3월 전 호주영사 제임스 던은 1975년 12월부터 인도네시아 군이 5만에서 10만 명 사이의 동티모르 민간인들을 살해한 구체적인 혐의에 대한 보고서를 출간했다. 이 보고서는 6만여 명의 티모르인들이 이전 6개월 간의 내전에서 사망했으며 인도네시아의 침공 첫 2개월 동안 최소한 약 55,000명의 사망자가 추가로 발생했다는 유디티 지도자 로페즈 다 크루즈(Lopez da Cruz)의 1976년 2월 13일 자 발표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구호사업 사절단은 대체로 이 통계에 동의한다. 1976년 말 카톨릭 교회 역시 사망자 수치를 6만 명에서 10만 명 사이로 추정했다. 이 숫자는 인도네시아 정부인사로부터 확인된 것이기도 하다. 1977년 4월 3일 시드니 모닝 헤럴드(Sydney Morning Herald)지와의 인터뷰에서 인도네시아 외무상 아담 말릭은 사망자 수치를 ‘5만 명 또는 8만 명’이라고 언급했다.(사진: 제임스 던 당시 호주영사)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 합병을 ‘반식민주의적 통일’이라고 주장했다. 1977년 인도네시아 외무성에서 발행한 ‘동티모르의 비식민지화’(Decolonization in East Timor)라는 소책자에서 ‘민족자결의 숭고한 권리’를 강조했고 아포데티를 동티모르 인민 대다수의 진정한 대변자라고 표현했다. 또한 이 소책자는 당시 프레틸린의 높은 인기가 그들의 위협적 정책, 협박과 테러의 결과라고도 했다. 후임 인도네시아 외무상 알리 알라타스는 2006년 발행한 그의 회고록 ‘신발 속의 자갈: 동티모르를 위한 외교노력’(The Pebble in the Shoe: The Dipolomatic Struggle for East Timor)에서 같은 입장을 반복했다.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 침공 후 티모르 섬이 애당초 동과 서로 나누어진 것 자체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라는 제국주의 열강이 휘두른 “식민주의 압제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서 합병된 것이 단순히 1940년대부터 시작된 인도네시아 열도의 통일과정의 한 단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사진: 로페즈 다 크루즈)
2) 유엔 반응과 국제법
침공 다음 날 유엔총회의 한 위원회가 이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인디아, 일본, 말레이시아를 포함한 인도네시아의 동맹국들은 이 유혈사태에 대해 포르투갈과 동티모르 정당들을 비난하는 결의문을 초안했다. 그러나 이 결의문은 거부되었고 그 대신 알제리, 쿠바, 세네갈, 구야나(Guyana) 등 다른 나라들의 초안이 채택되었다. 이 초안은 그해 12월 12일 유엔총회 결의문 3485(XXX)번으로 채택되어 인도네시아군의 즉각 철군을 촉구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만장일치로 384번 결의문(1975)를 채택한 지 열흘 후 유엔 총회가 이에 화답하며 인도네시아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한 것이다. 일년 후에도 안전보장이사회는 같은 취지의 결의문 389번을 채택했고 유엔총회는 1976년부터 1982년까지 매년 이 결의문을 재차 통과시키면서 동티모르의 자결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중국이나 미국같은 대국들이 더 이상의 조치에 대해 반대입장을 표했으므로 이 결의문의 실행을 강력히 요구한 국가들은 코스타리카, 기니아-비사우(Guinea-Bissau), 아이슬랜드 같은 작은 나라들뿐이었다. 1982년 결의문은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해결을 위해 모든 가능한 방법들을 타진하라는 측면에서 유엔 사무총장이 본 문제와 직접적 관계가 있는 당사자들을 접촉해 직접 협의를 시작하라는 촉구도 담고 있었다.
사법 전문가 로저 S 클라크(Roger S. Clark)는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과 점령은 두 가지 핵심적인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자결권과 침략금지 조항이다. 1975년 9월 7일의 합병승인청원은 물론 1976년 5월의 국민의회의 결의문까지, 그 어떤 것도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진행되는, 기 인지되어 동의한 민주적 절차와 성인의 보통선거권”은 물론 유엔총회 결의문 1541(XV)번이 요구한 자결권의 표준 가이드라인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말했고 청원서들에서 또다른 부적절한 부분들도 지적되었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서 군사력을 동원한 것은 유엔헌장 제1조 위반이라고도 지적했다. “모든 회원국들은 그들의 국제관계에 있어 타국의 영토 주권이나 정치적 독립에 반하는 위협이나 무력의 사용을 삼가야 한다”는 조항을 위반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 침공 당시 사실상 “국가”가 아니었으므로 유엔헌장에 의해 보호받을 자격이 없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 똑같은 주장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당시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대해 주장한 바 있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물론 당시 인도네시아는 당시 네덜란드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법률가인 수산 마크스(Susan Marks)는 만약 동티모르가 포르투갈 식민지로 간주된다면 유엔헌장 1조의 조건 적용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이 있다 하더라도 식민열강과 그 식민지 사이의 무장 충돌이란 맥락에서, 한 주권국가가 또 다른 주권국가의 식민지에 가하는 폭력에 대해 유엔헌장의 해당 조항이 당연히 적용되어야 함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계속)
'동티모르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라라스 학살사건 (동티모르) (0) | 2019.02.19 |
---|---|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 -(5) (0) | 2019.02.18 |
동티모르 독립투사 호세 라모스-호르타(José Ramos-Horta) (0) | 2019.02.14 |
동티모르 저항군-팔린틸(FALINTIL) (0) | 2019.02.12 |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 -(3) (0) | 2019.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