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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독립투사 호세 라모스-호르타(José Ramos-Horta) 본문

동티모르

동티모르 독립투사 호세 라모스-호르타(José Ramos-Horta)

beautician 2019. 2. 14. 10:00


호세 라모스-호르타(José Ramos-Horta)

 

 



  호세 마누엘 라모스
-호르타 (José Manuel Ramos-Horta
[ʒuˈzɛ ˈʁɐ̃muz ˈɔɾtɐ] 주제 러무즈 오르터)19491226일 출생의 동티모르 정치인으로 2007520일부터 2012520일까지 동티모르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2002년부터 2006년 사이 외무상을, 2006년부터 2007년 사이엔 잠시 총리직을 맡기도 했다. 1996년 노벨평화상 공동수상자이기도 한 그는 프레틸린의 발기인이자 당원으로서 1975~1999년의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기간 동안 망명정부의 대변인으로 일했다. 그는 1988년 프레틸린을 탈당했다. (사진: 호세 라모스-호르타)


2002년 동티모르가 독립하면서 외무상에 임명된 그는 2005625일 정치파동 중에 사임했지만 626일 정적이었던 마리 알카티리(Mari Alkatiri) 총리가 사임하면서 라모스-호르타가 자나나 구스마오(Xanana Gusmao) 대통령에 의해 총리대행으로 지명되었다가 2주 후인 2006710일 동티모르의 총리로 공식 정식 취임했고 이듬해인 2007년에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당시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의 유력한 후임 후보였지만 동티모르 대통령에 나서면서 한국의 반기문이 유엔사무총장에 오르게 된 뒷 이야기도 있다. 그는 대통령 임기 중이던 2008211일 벌어진 반군의 암살기도사건에서 총에 맞아 중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2012년 대통령 임기를 마친 후 201312일 기니-비소 소재 유엔 통합평회구축 사무국(UNIOGBIS) 국장 겸 유엔 특별대표로 임명되는 등 여전히 국제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의 롤러코스터와 같은 인생을 잠시 들여다 보자.

 

라모스-호르타는 종족으로 따지자면 메스티코(Mestico)족으로 1949년 동티모르 수도 딜리에서 티모르인 어머니와 살라자르(Salazar) 정권에 의해 당시 포르투갈령 티모르였던 동티모르로 유배당해 온 포르투갈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이바다(Soibada)라는 작은 마을의 미션수출에서 카톨릭 교육을 받았는데 이 마을은 훗날 인도네시아의 침공이 시작된 후 프레틸린의 사령부가 차려지게 되는 곳이다.

 

라모스-호르타는 1983년 헤이그 국제법 아카데미(Hague Academy of International Law)에서 공공국제법을 공부했고 오하이오 옐로우 스피링스의 앤티오크 칼리지(Antioch College)에서 1984년 평화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스트라스버그의 국제 인권대학(International Instutute of Human Rights)에서도 1983년 인권법을 공부한 후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에서 미국해외정책 학과에서 석사과정을 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전혀 다른 지역에서 굴지의 대학을 다닌 그는 어쩌면 많은 능력들 중에 순간이동 능력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심지어 1987년에는 옥스포드 대학 세인트 앤터니 칼리지의 멤버로서 포르투갈어, 영어, 불어, 스페인어, 동티모르어 등 5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그는 훗날 동티모르 국무장관 겸 내부장관이 되는 아나 페소아 핀토(Ana Pessoa Pinto)와 이혼하게 되는데 모잠비크 유배 당시 아들 로로 호르타(Loro Horta)를 얻었다.



그는 포르투갈령 동티모르 정치상황 전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결국 1970-1971년의 2년간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 유배를 받기도 했다. 그건 어쩌면 그의 집안 내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포르투갈인 할아버지도 아조레스 섬, 케비프 버르데(Cape Berde), 포르투갈령 기니아를 거쳐 포르투갈령 티모르까지 유배당한 전력이 있었다.

 

그는 동티모르 민족주의 지도자들 중 온건파에 속했고 인도네시아 침공 이전 동티모르의 독립분위기가 무르익던 1975년 독립지지정당들에 의해 주창된 동티모르 민주공화국 외무상에 지명되기도 했다. 그때 그는 불과 25살이었다. 그는 인도네시아군이 동티모르를 침공하기 사흘 전 유엔에 티모르 상황에 대한 청원을 위해 출국했다. (사진: 1976년 만 27세의 호세 라모스-호르타, 확실히 동양인처럼 보이진 않는다)

 

뉴욕에 도착한 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앞에서 연설하며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점령하면 약102,000명의 동티모르인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므로 이를 막아 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이후 10년간 유엔에서 프레틸린의 붙박이 대표를 지냈다. 그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의 수중엔 불과 25불 밖에 없었으므로 금전적으로 몹시 쪼들렸지만 그의 정치적 견해와 결심을 지지하는 미국인들의 자선의 손길을 받아 어느 정도 연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의 당이 처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1993년 동티모르 주민들이 라프토상(Rafto Prize)를 수상하게 되었는데 라모스-호르타는 망명 중인 외무상 자격으로 시상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국제사회가 동티모르나 라모스-호르타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19945월 필리핀 대통령 피델 라모스가 자카르타의 압력에 굴복해 마닐라에서 열리기로 했던 동티모르에 관한 국제 컨퍼런스를 금지하려 하면서 라모스-호르타를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태국도 그해 후반 그를 외교적 기피인물에 포함시켰다.


199612월 라모스-호르타는 지메네느 벨로 주교(Bishop Ximenes Belo)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노벨위원회는 두 수상자가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에 맞서 오랫동안 애써 저항한 사실을 높이 평가했고 이 상을 통해 민족자결권에 기반해 동티모르 문제가 외교적 돌파구를 찾을 수 있길희망한다는 수상자 선정의 변을 내놓았다. 위원회는 라모스-호르타가 1975년 이래 동티모르의 입장을 가장 앞장서 국제사회에 호소한 대변인이라고 평가했다. (사진: 벨로 주교)

 

라모스-호르타는 독립을 위한 제도적 토대 마련을 위한 협상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200051UNTAET의 중요한 합동 워크샵에서 티모르 사절단을 이끌며 새로운 전략을 사용해 동티모르 독립의 제도적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 결과 집행전권을 가진 합동 행정부에 동티모르 재건 전국의회(CNRT-National Congres for Timorese Reconstruction)의 지도자들이 참여한다는 유리한 결정을 유엔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었다. .20005월의 컨퍼런스에서 보다 구체적인 내용들이 조율되었다. 동티모르 주재 유엔 사무총장 특별대리인 세르지오 비에이라 드 멜로(Sérgio Vieira de Mello) 2000622일 리스본에서 열릴 후원 컨퍼런스와 2000627일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했다. 2000712NCC는 동티모르인들과 네 명의 UNTAET 대표들로 구성하는 과도내각 수립에 대한 규정을 수용했다. 이렇게 조율된 합동 정부는 독립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성공적으로 닦았다. 2002927일 동티모르는 유엔에 가입했고 라모스-호르타는 동티모르의 첫 외무상이 되었다.

 

200663, 국방장관이 사임하자 라모스-호르타는 국방장관직을 임시로 겸임했다. 하지만 몇 주 후인 2006625나는 현재의 정부는 물론 알카티리(Alkatiri)가 개인된 어떤 정권에도 연관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그는 두 개의 장관직 모두에서 물러났다. 알카티리 총리는 자나나 구스마오 대통령을 대신하는 그의 직책에서 사임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는데 625일 프레틸린당 지도자들이 알카티리의 총리직 유지를 결정하자 라모스-호르타가 즉시 사표를 던지며 불만을 강하게 표시한 것이다. 호주 외무상 알렉산더 다우너는 라모스-호르타의 사임에 개인적 실망을 표했다. 하지만 626일 결국 알카티리가 사퇴를 선언하자 라모스-호르타는 사임을 번복하고 돌아와 알카티리 후임이 정해질 때까지 임시총리직을 겸했고 200678일 구스마오 대통령에 의해 정식 총리로 지명되었다. 그는 710일 선서를 하고 총리가 되었다.

 

총리선임 전 라모스-호르타는 코피 아난의 뒤를 잇는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는 동티모르 총리가 되기 위해 유엔 사무총장가 되는 것을 포기했지만 나중에 언제든 유엔 직책에 나서볼 것임을 시사하기도 했다. “내가 정말 그 직책에 관심이 있다면 2012년까지 5년을 기다릴 수 있다. 난 아마 거기 관심을 가질 것 같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2007222일 알자지라 방송과는 인터뷰에서 라모스-호르타는 20074월 대선에 대통령 후보로 나서겠다고 천명했고 2007225일 그는 공식적으로 입후보했다. 그해 재선에 나서지 않은 구스마오는 그를 지지했다. 세계 남반구 개발 매거진(Global South Development Magazine)과의 인터뷰에서 라모스-호르타는 마하트마 간디가 그의 개인적 영웅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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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1차 투표가 열린 49일 라모스-호르타는 21.81%의 득표로 2위를 차지했다. 1위는 프레틸린의 후보 프랜시스코 구테레스(Francisco Guterres)였다. 그해 5월 그들은 2차 투표에서 격돌했는데 511일 선거결과를 발표하는 선관위 대변인 마리아 안젤리나는 라모스-호르타가 69%를 득표했다고 발표했다. (사진: 프란시스코 구테레스)

 

그는 2007520일 딜리의 국회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가졌다. 그보다 하루 전 그는 총리직을 사임했는데 에스타니슬라우 다실바(Estanislau da Silva)가 후임총리도 선임되었다.


2008211일 호세 라모스-호르타에 대한 암살이 시도되었다. 총격을 당한 것이다. 뒤이어 벌어진 총격전에서 라모스-호르타의 경호원들이 부상을 당했고 반군 지도자 알프레도 레이나도(Alfredo Reinado)를 포함한 반군 두 명이 사살되었다. 인도네시아 강점기 당시 프레틸린의 팔린틸 부대가 은거하던 산 속에 이제 독립 동티모르에 무력투쟁을 벌이는 반군이 들어앉아 있었던 것이다. 라모스-호르타는 딜리에 있는 뉴질랜드 병영에서 응급조치를 받고 곧 호주 로얄 다윈 병원(Royal Darwin Hospital)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의료진은 그가 2-3회 총격을 당했고 가장 위험한 것은 우측 폐를 관통한 총상이라고 판단했다. 중상이었지만 다행히 상태는 안정적이었다. 아직 다윈에서 회복 중이던 라모스-호르타가 312일 방송을 통해 근황을 전했다. 그 메시지에서 라모스-호르타는 지지자들과 호주 당국에 감사를 표하며 사람들이 그를 잘 보살펴 주고 있다고 밝혔다. 대변인은 그의 상태가 호전되고 있어 운동삼아 매우 조금씩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사진: 라모스 호르타 대통령 암살기도 기사)

 

라모스-호르타는 몇 주 더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호주 당국의 조언을 뿌리치고 319일 퇴원을 강행했다. 그는 총격을 당했을 때에도 정신을 멀쩡해 그날의 모든 구체적 상황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고 훗날 밝히기도 했다. 417일 그는 다윈을 떠나 딜리로 돌아왔다. 그는 공항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산 속의 반군들에게 항복을 촉구했다.

 

 

 5년 후 2012년 대선에서 재선에 도전한 그는 3171차 투표에서 19.43%를 득표해 3위에 그쳤다. 프란시스코 구테라는 27.28% 따우 마딴 루악은 24.17%로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했다. 라모스-호르타는 깨끗이 패배를 인정했다. 그는 519일 대통령 임기를 마쳤고 따우르 마딴 루악이 후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사진: 따우르 마딴 루악)

 

2012년 기니아-비사우(Guinea-Bissau)에서 벌어진 쿠데타에 대해 그는 중재를 나서겠다고 자원한 바 있는데 파란만장한 대통령 임기를 마친 후 2013131일 유엔 특별사절단을 이끌고 기니아-비사우를 방문했다. 그는 어려운 시절 희망의 말들”(Words of Hope in Troubled Times)이라는 책도 발간했다.

 

라모스-호르타는 피스잠 컨퍼런스(Peacejam Conference) 연단에 자주 올랐다. 그는 평화와 인권을 위한 웹사이트인 TheCommunity.com의 자문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2001년 그 웹사이트에서 28명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들 중 아홉 개 상 11명 수상자의 성명을 모아 게재했고 수상자 동료들 중 주축이 되어 또 다른 평화운동들을 주도했다.

 

그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점렴을 지지했고 미국을 비난하던 이라크 독재자에게 위선적이라고 지적했다. 1990년대에 그는 이라크 내의 쿠르드족의 명분을 지지했다.

 


오바마 미대통령 부부와 함께

 

20095월 라모스-호르타는 미얀마 집권세력 준타(junta)에 대한 국제형사제판소의 조사를 촉구했다. 그러나 20108월 그는 미얀마에 대한 그의 견해를 누그러뜨리고 미얀마 외무상 냔 윈(Nyan Win)을 영접하면서 미얀마와의 관계개선과 강력한 무역연대를 촉구했다.

 

라모스-호르타는 국제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흔히 발생하는 교착상태 탈피를 위한 국제동시정책(International Simultaneous Policy – SIMPOL)에 가장 먼저 서명한 사람이었다. 20098월 그는 필리핀 전대통령 아키노(Aquino)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는 그 장례식에 참석한 유일한 외국 정상이었다. 2010630일 그는 베니그노 S. 아키노 3(Benigno S. Aquino III)의 필리핀 제 15대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했다. 이때에도 그는 취임식에 참석한 유일한 외국 정상이었을 뿐 아니라 해외에서 도착한 귀빈들 중 첫 번째 손님이었다. 이 두 번의 방문은 동티모르와 필리핀의 외교관계를 더없이 돈독히 해주었고 동티모르의 아세안(ASEAN) 가입에 대한 필리핀의 지지도에도 분명 영향을 주었다.

 

라모스-호르타는 중재와, 민주적 제도들, 개방형 시장, 인권과 법치 등 형태에 있어 선량한 통치를 촉구를 통해 원격 민주적 지도제체를 지원하고 분쟁예방과 종식을 위해 일하는 단체인 세계 지도자 재단(Global Leadership Foundation)의 회원이다. 이 단체는 전 지도자들의 경험을 당대의 국가 지도자들에게 제공하여 그들이 이를 문의하고 분별하고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한다. 이 단체는 전 국가 지도자, 당대의 특정한 통치이슈에 있어 국가 정상들 가까이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정부 및 국제 조직 관료들로 구성된 비영리 조직이다.

 

20178월 라모스-호르타를 포함한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은 2011-2012 사우디 아라비아 시위에 참여한 젊은이 14명에 대한 처형을 중지해 달라고 사우디 아라바이아에 촉구하기도 했다.

 


 

그는 화려한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물론 가장 획기적인 것은 동티모르의 로마 카톨릭 사제 카를로스 벨로와 함께 공동 수상한 1996년 노벨 평화상이다. 그외의 포훈으로서 포르투갈 자유기사단 대십자훈장 (Grand-Cross of the Order of Liberty, 199869), 포르투갈의 헨리왕자 기사단의 그랜드칼라 훈장(Grand Collar of the Order of Prince Henry, 20071113), 동티모르에 독립을 가져온 뛰어난 지도력으로 호주와 동티모르 양국의 유대를 강화한 놀라운 업적을 기려 호주의 호주 기사단 영예로운 동지 훈장 (Honorary Companion of the Order of Australia, 20131125) 등이 있다.

그는 캄보디아 대학에서 정치과학 명예박사학위 (2010)도 받았다.

 

그는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고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기도 했다. 톰 쥬브리키(Tom Zubrychi) 감독이 2000년에 제작한 다큐멘터리 <외교관>(The Diplomat)1998년부터 그가 동티모르에 돌아가는 2000년까지의 기간을 담았다. 2009년 작 <발리보>(Balibo)에서는 오스카 아이작(Oscar Isaac)이 라모스-호르타는 연기했다. 이 영화는 인도네시아의 본격적 동티모르 침공이 벌어지기 직전 발리보 5인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2019년는 한국 삼일운동 및 임정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인 동시에 동티모르의 인도네시아 철군 20주년을 맞는다. 해방 후 20년이니 우리의 1965년이라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 침공과 강점을 특별히 사과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동티모르의 인도네시아는 한국의 일본을 많이 닮았다. 그래서 동티모르를 보면서 우리의 역사와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




1975년의 라모스-호르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