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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틸린 사무총장 마리 알카티리 본문

동티모르

프레틸린 사무총장 마리 알카티리

beautician 2019. 2. 20. 10:00

마리 알카티리(Mari Alkatiri)

 

 

  마리 빈 아뮤데 알카티리(Mari bin Amude Alkatiri)19491126일 출생한 동티모르 정치인이다. 그는 프레틸린 당의 사무총장이자 현재 우쿠세(Oecusse) 특별행정구의 수장이기도 하다.

 


  우쿠세를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이 지역 이름은 여러가지 발음으로 소리나는데 예전엔 암베노(Ambeno) 또는 우쿠시-암베노(Oecussi-Ambeno)라고도 불렸고 동티모르의 영토인 적도 있었다. 티모르 섬 서쪽 해안지대에 고립된 영토인 이곳은 인도네시아 영토인 서티모르와는 국경선을 맞대고 있다. 수도는 빤뗴 마카사르(Pante Macassar)이며 포르투갈령 티모르 시절 오쿠시 타운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예전엔 지역명이 암베노(Ambeno)였고 수도 이름이 오쿠시였던 곳이다. (사진: 빨간 부분이 우쿠세)

 

  알카티리는 종족으로는 아랍계 하드라미족(Hadhrami Arab)이고 지금은 예멘의 일부가 된 하드라마웃(Hadhramaut) 왕가의 방계인 알-카티리(Alkathiri) 부족 출신이다. 그는 인구의 97%가 기독교인인 국가에서 매우 드문 무슬림 정치가 중 한 명이었다. 그가 두 번쨰로 총리를 맡던 당시의 주된 이슈는 환경보존, 문화보존,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 공공무상교육, 공공건강서비스 및 국가경제건설 등이었고 특히 매우 느린 공공서비스와 제조부문의 문제들이었다.

 

  알카티리의 조상들은 포르투갈령 동티모르에 살던 하드라미 상인들이었다. 그는 딜리에서 태어났고 10명의 형제자매들을 가졌다. 그는 1970년 포르투갈령 앙골라로 공부하러 떠났다가 귀국해 프레틸린에 발기인으로 참여해 외무상을 맡았다. 19751128일 프레틸린이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함에 따라 알카티리는 고위 외교사절단 임무를 맡아 해외로 나섰다. 하지만 마침 그해 127일 인도네시아가 신생국 동티모르를 침공하자 그와 동료들은 귀국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모잠비크의 마푸토(Maputo)에 프레틸린 외부사절단 본부를 설치했다.

 

  24년간에 걸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점령기간동안 알카티리는 앙골라 지리학 학교의 공인조사원으로 일하며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 망명생활을 했고 모잠비크 마푸토 소재의 에두아르도 몬들레인 대학교(Eduardo Mondlane University)에서 법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마푸토의 한 개인법률사무소에서 시니어 법률자문으로, 1995년부터 1998년까지는 모잠비크 공화국 의회의 국제법과 헌법에 대한 자문인으로 일했다.

 

  2002520일 유엔 과도정부가 새로 선출된 동티모르 국회와 정부에 주권을 넘겨주었다. 그는 2001 8월의 총선에서 많은 의석수를 얻은 프레틸린 당의 사무총장으로서 신생 독립국의 첫 총리로 선출되었다.

 


  20065월 동티모르 정부는 국가 치안병력의 대략 절반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 딜리에서 폭동과 약탈이 난무하는 준 내전상황을 맞았다. 암살단을 시켜 정치적 반대세력을 위협하거나 죽이도록 사주했다는 혐의가 알카티리에게 걸리면서 대대적인 반발을 불러와 대통령 자나나 구스마오는 알카티리의 사임을 촉구하면서 그가 물러나지 않으면 구스마오 자신이 물러나겠다는 초강수를 띄웠다. 프레틸린 수뇌부가 625일 회합을 통해 알카티리의 총리로서 입장을 협의하는 동안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구스마오 대신 알카티리가 사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이 알카티리를 총리로 유지시키도록 결정하자 외무상이자 임시 국방장관이던 호세 라모스-호르타가 그 결정을 듣고 즉각 사퇴를 발표했고 같은 날 동티모르 경찰총장 파울로 마르틴스(Paulo Martins)는 정적에 대한 살해기도혐의로 알카티리에 대한 체포를 명했다. (사진: 마리 알카티리)

 

  그는 당의 재신임을 받았지만 2006626일 총리직을 사퇴하면서 혼란상황에 종지부를 찍었다. “나는 이 정부의 총리직에서 물러날 준비가 되었으며 이로서 공화국의 대통령 자나나 구스마오 각하의 사임을 막을 것임을 천명합니다그는 사퇴발표에서 이렇게 말했다.

 

  알카티리에게 씌워진 암살단 운용혐의는 그후 유엔위원회에서 기각되었다. 유엔위원회는 오히려 정치파동기간 중 선동적 발언을 쏟아낸 구스마오를 비판했고 파울로 마르틴스 경찰총장에게 직무유기를 물어 퇴임을 촉구했다.

 

  20076월의 총선에서 알카티리는 프레틸린 당수 프란시스코 루 올로구테레스(Francisco "Lu Olo" Guterres) 다음으로 두 번째 의원후보로 이름을 올려 다시 국회에 입성했다. 200781일 그는 프레틸린 당의 총리후보로 출사표를 던지며, 막 대통령직을 마치고 내려와 신생정당 티모르 재건 전국회의(CNRT)의 당수로서 국회에 입성한 라이벌 구스마오의 이력을 비난했다. 프레틸린은 CNRT를 포함한 그 어떤 정당보다 많은 의석을 얻었지만 노련한 구스마오는 다른 당들과 연합종횡하면서 과반 의석을 구축했다.

 


  알카티리는 성명을 통해 국회에 입성한 모든 정당들로 이루어진 전국엽합정부 구성을 촉구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국가적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각 정당들이 정부구성을 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호세 라모스-호르타 대통령은 86일 구스마오를 수장으로 하는 CNRT가 주도하는 연정이 정부를 구성하도록 결정했다. 알카티리는 라모스-호르타의 결정이 위헌이라며 비난했고 알카티리가 그 결정에 맞서 당은 준법투쟁에 나설 것과 시민들의 불복종 시위를  유도했지만 분노한 프레틸린 지지자들은 라모스-호르타의 발표에 대한 반응으로 폭력시위를 벌였다. 프레틸린은 점차 준법투쟁을 하겠다는 위협을 거두었다.  (사진: 자나나 구스마오의 CNRT)

 

  그해 8월 평화유지군으로 활동 중이던 호주 군인들이 시위를 벌이면서 프레틸린 국기를 가져다가 짓밟는 사건이 있은 후 알카티리는 호주인들이 프레틸린의 반대편에 서서 위협을 가한다고 비난하며 호주군인들에게 중립을 지킬 능력이 없다면 집에 돌아가는 게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79월 알카티리는 다시 동티모르의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는 국제 라울 월렌버그 재단(the International Raoul Wallenberg Foundation)론칼리 위원회(Roncalli Committee) 명예회원이다. 그는 능수능란한 협상가이며 티모르해의 자원을 동티모르가 호주보다 더 큰 부분을 가져가도록 확보한 경제적 민족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포르투갈의 지속적 지원을 받았지만 호주의 존 하워드 정부와는 각을 세웠다. 그는 2016 2 14 포르투갈 헨리왕자 기사단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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