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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 독립의 희망 자나나 구스마오(Xanana Gusmao) 본문

동티모르

동티모르 독립의 희망 자나나 구스마오(Xanana Gusmao)

beautician 2019. 2. 22. 10:00

자나나 구스마오 (Xanana Gusmão)

 

 


  카이 랄라 자나나 구스마오(Kay Rala Xanana Gusmão)1944620일 태어난 동티모르 정치인으로 태어날 당시 붙여진 이름은 호세 알렉산더 구스마오(José Alexandre Gusmão)였다. 그의 별명인 자나나(Xanan)는 미국 로큰롤밴드 샤나나(Sha Na Na)에서 따왔는데 샤나나 역시 두왑/R&B그룹 더 실루엣스(the Sillhouettes)1957년 노래의 가사에서 따온 것이다. (사진: 자나나 구스마오)

 

  구스마오는 포르투갈령 티모르의 마나투토(Manatuto)에서 포르투갈-티모르 혼혈인 교사 부모에게 태어났다. 그는 딜리 외곽의 제주이트(Jesuit)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돈이 없어 15세에 떨어져 나온 후 비숙련공 일자리를 전전했지만 어렵사리 야학을 다니며 공부를 계속하다가 19살이 되던 해에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는 에밀리아 바티스타(Emilia Batista)를 처음 만나 2년 후인 1965년 결혼했고 유지니오(Eugenio)라는 아들과 제닐다(Zenilda)라는 딸을 얻었다. 1966년 비로소 공공부문 일자리를 얻게 된 구스마오는 드디어 스스로 학비를 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1968년 포르투갈 육군에 징집되면서 학업은 또 다시 중단되었다. 그는 19713년간의 군복무를 마쳤다. 제대 당시 그의 계급은 상병이었다. 막 군복무를 마치고 아들을 낳았을 때 그는 호세 라모스-호르타가 이끄는 민족주의자 조직에 몸을 담게 되었다. 그후 3년간 그는 식민주의 시스템을 겨냥한 평화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1974년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쿠데타를 계기로 포르투갈령 티모르에도 비식민화가 시작되었고 얼마 후 마리오 레모스 피레스 총독도 식민지의 독립을 허락할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1978년 독립을 목표로 그 안에 총선을 치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5년 내내 두 정치 라이벌 집단의 치열한 투쟁이 동티모르를 휘저었다. 구스마오는 이때 프레틸린 측에 깊숙히 간여하다가 1975년 중반 상대편인 UDT 파벌에게 체포되어 투옥되고 말았다.

 

  동티모르의 내부 혼란을 틈타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흡수하기 위해 사회정치적 혼란을 더욱 조장하면서 서티모르에 전진배치한 부대들을 움직여 포르투갈령 동티모르 영토를 자주 습격했다. 1975년 프레틸린이 동티모르 정국을 장악한 후에야 구스마오도 비로서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프레틸린의 언론담당관에 임명되었다. 19751128일 프레틸린이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는데 이를 영상으로 기록하는 것도 구스마오가 맡은 일이었다. 그로부터 9일 후 인도네시아의 동티므로 침공이 시작되었다. 당시 구스마오는 딜리의 친구를 방문하고 있었는데 산중턱에서 침공이 진행되는 모습을 보았고 그후 며칠 동안 흩어진 가족들을 필사적으로 찾아 나섰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 임시정부를 구성하자 구스마오는 저항운동에 깊숙히 가담하여 조직을 승리 가능한 저항조직으로 재편성했다. 초창기에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도보로 이동하는 발품을 아끼지 않고 지지자들과 지원병들을 확보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 프레틸린은 많은 문제에 휘말렸는데 그중엔 마욱 모룩(Mauk Moruk)을 비롯한 네 명의 팔린틸 고위장교들이 구스마오를 노리고 일으킨 1984년 쿠데타 시도도 있었다. (사진: 마욱 모룩)

 

팔린틸의 고위 지휘관이었던 마욱 모룩은 총사령관 구스마오와 늘 대립하다가 회심의 쿠데타가 실패하자 인도네시아군에 항복하여 네덜란드로 유배를 떠나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돌아왔다. 한참 훗날의 일이지만 그는 또 다시 마우베레 혁명위원회(Maubere Revolutionary Council -KRM)라는 이름의 반군을 조직해 여전히 구스마오가 주축이 된 동티모르 정권에 항거했고 2015년 경찰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시도하다가 군경 합동진압작전에서 사살된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동티모르의 사회혼란이 야기될까봐 우려했던 정도로 그는 죽을 때까지 적잖은 영향력을 유지했다.

 

구스마오는 이후 프레틸린을 나와 여러 중도연합을 지지하다가 마침내 프레틸린의 강력한 라이벌 정당을 구축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그는 주요 지도자들 중 한 명이었다. 1990년대에 그는 외교와 매체접촉에 깊이 간여했고 19911212일 산타크루즈에서 일어난 딜리 학살사건에 대한 세계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수많은 유력 언론들과 인터뷰를 하던 과정에서 구스마오는 세계적 인지도를 쌓았다.

 


 그가 유명해질 수록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를 잡기 위해 더욱 혈안이 되었고 결국 199212월 마침내 그를 체포하는 데에 성공한다. 19935월 구스마오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진행한 재판에서 유죄평결과 함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51년 인도네시아 형법 12호의 108(반란)106(국토의 참절)을 위반한 혐의였다. (사진: 인도네시아군에 체포된 구스마오) 구스마오는 재판 전에 자기 자신을 변호인으로 지정해 스스로 변론했다. 19938월 수하르토 대통령은 그의 형기를 20년으로 감해주었다. 1999년말까지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자카르타에 거주하면 서신을 통해 영어를 가르쳐 주던 호주 여인 커스티 소드(Kirsty Sword)의 도움을 받으며 감옥 안에서도 저항운동을 성공적으로 주도했다. 그가 풀려났을 때 유엔 대표단이나 넬슨 만델라 같은 세계적 명사들이 그를 방문했다. 그와 동시에 에밀리아와 35년간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투옥기간 중 많은 도움을 주었던 커스티 소드와 2000년 결혼해 알렉산더(Alexandre), 카이 올록(Kay Olok), 다니엘(Daniel) 등 아들 셋을 낳았다.

 


 1999830일 동티모르에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는데 결과는 독립찬성이 압도적이었다. 그런 결과가 발표됨과 동시에 인도네시아군은 테러행위를 통해 엄청난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자신들이 그 테러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부인했으나 이를 미연에 예방하지 못한 책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결과, 1970년대에 포르투갈이 이끌었던 유엔으로부터의 외교적 압박을 1990년대에는 미국과 호주가 앞장섰고 유엔제재가 발동되고 호주군이 이끄는 평화유지군 INTRERFET이 동티모르에 상륙하자 그제서야 구스마오도 마침내 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동티모르에 돌아와 화해와 재건 캠페인을 시작했다. (사진: 인도네시아에서의 옥살이를 마치고 아일레우로 돌아온 구스마오)

 

 

구스마오는 유엔이 2002520일까지 이끌었던 동티모르 과도정부의 중책을 맡기도 했다. 그 시기에 그는 지속적으로 동티모르의 통일과 평화를 촉구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세계는 그를 대체로 신생 공화국의 사실상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2001년 말에 열린 선거에서 구스마오는 프레틸린을 제외한 아홉 개 정당의 지지를 모아 상대방을 가뿐히 누르고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그 결과 그는 2002520일 동티모르가 공식적으로 독립했을 때 첫 대통령에 취임했다. 구스마오는 자신이 쓴 글 여럿을 모아 엮은 자서전에 승리를 위한 저항”(Resist Is to WIN)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는 자신과 동티모르에 대한 2006년 다큐멘터리 영웅의 길/해가 뜨는 곳’(A Hero's Journey/Where the Sun Rises)의 메인 나레이터를 맡기도 했다. 그레이스 팬(Grace Phan) 감독은 동티모르를 구축하고 자유를 부여한 한 남자의 개인적 변화를 가까이 들여다본 시선이라 말했다.

 


2006621일 구스마오는 마리 알카티리 총리에게 퇴진을 촉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사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알카티리는 당시 정적들을 위협하거나 죽이기 위해 암살단을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던 차였다. 결국 알카티리는 사임했지만 유엔은 그의 혐의를 각하하고 오히려 구스마오가 정치파동기간 중 선동발언을 했다고 비판했다. (사진: 브라질 대통령 딜마 루세프를 만난 구스마오)

 

구스마오는 2007년 대선출마를 거부했다. 대신 그는 아직 대통령 재임 중이던 20073월 티모르 재건 전국회의(CNRT)라는 신당을 만들어 그해 하반기로 예정된 총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총리직을 노렸다. 2007520일 호세 라모스-호르타가 차기 대통령으로 그의 뒤를 이어 취임했다. CNRT20076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의 CNRT24.10%를 득표해 프레틸린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18개 의석을 확보했고 그는 CNRT 후보명부에 1번으로 이름을 올려 국회에 입성했다. CNRT는 다른 정당들과 연정을 구성해 국회 다수석을 차지했다. 프레틸린과 연합정당은 누가 정부를 구성하느냐로 수 주간 논쟁을 벌인 끝에 라모스-호르타 대통령이 86일 발표를 통해 CNRT가 이끄는 연합정당의 손을 들어주었고 구스마오는 88일 총리로 선출되어 대통령궁에서 취임선서를 했다.

 

2008211일 호세 라모스-호르타 대통령에 대한 암살시도가 벌어져 라모스-호르타가 배를 피격당해 중태에 빠졌다. 구스마오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프레틸린 지도자 프란시스코 구테레스는 구스마오에게 집에서 머물라고 충고했으나 구스마오는 차를 타고 딜리로 향하다가 가스타오 살시나(Gastao Salsinha)가 이끄는 일단의 암살단에게 공격을 당해 교전을 벌였고 그 사이 발리바(Balibar)에 소재한 그의 자택도 신원미상의 군인들에게 포위당했다. 자택에는 커스티 소드와 자녀들이 남아 있었다. 잠시 후 포르투갈 공화수비대가 현장에 도착하여 가족들을 구조했고 그들이 곧 구스마오와 합류하여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면서 위험상황은 막을 내렸다. 상황은 쿠데타 시도의 가능성과 암살 또는 납치 시도였다고 해석되기도 했다.

 

그는 팔린틸을 이끌며 인도네시아군과 싸웠고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동티모르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20075월부터 2015216일까지 총리를 역임한 후 20152월부터는 기획 및 전략 투자부 장관을 맡고 있는 자나나 구스마오는 지금도 동티모르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는 1999년 사상의 자유를 위한 사하로프 상(Sakharov Prize for Freedom of Thought)을 수상했고 20007월에는 뉴질랜드-동티모르 관계증진 노력을 인정해 뉴질랜드의 명예동반자(a Honorary Companion of the New Zealand Order of Merit -CNZM)로 지정되었다. 2000년에는 동티모르 인민들의 독립에 헌신한 용기와 신념의 지도자로 인정하는 시드니 평화상(Sydney Peace Prize), 광주인권상, 2002년엔 유럽위원회의 노스-사우스 프라이즈(North-South Prize)도 수상했다. 구스마오는 세르지오 비에이라 드 멜로 재단(Sergio Vieira de Mello Foundation)의 유수회원이기도 하다. 199369일 포르투갈의 자유 대십자훈장을, 2003년엔 영국 성 마이클, 성 조지  대십자 최고 명예훈장(Honorary Knight Grand Cross of the Most Distinguished Order of Saint Michael and Saint George), 20071113일에는 포르투갈의 헨리왕자 그랜드칼라 훈장을 받았다. ()

 


팔린틸 캠프시절의 구스마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자나나 구스마오-커스티 소드 부부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