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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술탄 하멩꾸부워노 5세 – 끄라톤 살인사건 본문
술탄 하멩꾸부워노 5세 – 끄라톤 술탄 살인사건
스리 술탄 하멩꾸부워노 5세
하멩꾸부워노 5세의 생애는 사뭇 드라마틱합니다. 그는 막 세 살이 되던 해에 술탄의 왕좌에 앉았다가 증조부인 하멩꾸부워노 2세를 다시 불러들인 네덜란드 총독부에 위해 폐위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신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선대 술탄들과 달리 그는 끄라톤의 가족, 친인척들은 물론 일부 신민들에게 미움을 받기도 했고 급기야 사랑하는 후궁의 손에 살해당하게 되죠. 초상화를 보아서는 어딘가 아둔할 것만 같은 그는 실제로는 모든 지혜와 인내를 짜내 안팎으로부터의 압박을 견뎌냈던 인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네덜란드 총독부로부터 1839년엔 중령, 1847년엔 대령의 계급을 받은 바도 있었죠. 일국의 술탄이 식민지 종주국 군대의 장군도 아닌 영관급 장교 계급을 받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라도 자랑스러운 일이기까지 했을까요?
그의 본명은 구스티 라덴 마스 가톳 메놀(Gusti Raden Mas Gathot Menol)이었고 나중에 망꾸부미 왕자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술탄 하멩꾸부워노 4세의 여섯 번쨰 아들로서 그의 어머니는 구스티 깐젱 라투 끈쪼노(Gusti Kanjeng Ratu Kencono)였고 1820년 1월 24일 족자 술탄국의 끄라톤 궁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모의 사랑을 받았지만 아버지인 하멩꾸부워노 4세는 짧은 인생을 살다가 20세도 되지 못해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독살이 의심되는 죽음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부왕의 서거로 인해 하멩꾸부워노 5세는 아직도 유아일 때 왕좌에 올라야 했습니다. 부왕이 죽은지 2주도 채 되지 않던 1823년 12월 19일 구스티 라덴 마스 가톳 메놀은 술탄 하멩꾸부워노 5세의 칭호를 받으며 족자의 술탄으로서 대관식을 치렀습니다.
하지만 그는 1826년 8월 17일 왕위에서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노술탄 하멩꾸부워노 2세가 다음날 다시 족자의 술탄으로 대관식을 올렸던 것입니다. 노술탄은 이미 1792-1810년에 이미 한 차례 재위했었고고 1811-1812년 사이에 두번째 재위기간을 가졌던 바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의 세 번째 재위기간을 시작한 것입니다.
하멩꾸부워노 5세가 영아 시절 술탄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 시계를 거꾸로 돌려버린 무리한 왕위계승의 배후에도 네덜란드의 강력한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자바 전쟁을 통해 식민정부를 뒤흔들고 있던 디포네고로 왕자에 맞서 끄라톤의 귀족들은 물론 족자 술탄국의 신민들을 분열시켜 자신들의 입지와 세력을 지키려 하던 차였습니다. 디포네고로는 술탄 하멩꾸부워노 3세의 큰아들이었지만 왕위계승권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궁에서 나가 살았던 인물입니다.
하멩꾸부워노 5세를 폐위하고 하멩꾸부워노 2세를 술탄으로 밀어올린 사람은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임시총독직과 군최고사령관직을 겸직하고 있던 헨드리끄 머르꾸스 드콕(1779-1845)였습니다. 그가 디포네고로 왕자의 군대와 싸우던 자바전쟁에서 네덜란드군을 총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하멩꾸부워노 2세는 1812년 당시 동인도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에 의해 폐위되어
말루꾸를 거쳐 뻬낭섬(지금은 말레이시아 지역)에 유배되어
있던 차였습니다. 다시 동인도를 회복한 네덜란드가 하멩꾸부워노 2세를
다시 족자로 데려온 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하멩꾸부워노 5세는 아직 나이가 어려 자기 생각을 제대로 말할 수도 족자 신민들의 이목을 끌기도 어려웠으므로 네덜란드는 차제에
신민들로부터 사랑받던 하멩꾸부워노 2세를 족자로 데려와 그의 인기를 통해 당시 디포네고로에게 쏠려 있던
신민들의 마음을 끄라톤 궁전으로 돌리려 했습니다. 이런 교활한 작전은 나름대로 소기의 성과를 올렸고
각종 작전과 음모를 통해 네덜란드는 디포네고로의 저항을 1830년 마침내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세 번씩이나 술탄으로서 재위했던 하멩꾸부워노 2세가 1828년 1월 3일 세상을 떠나자 다시 하멩꾸부워노 5세가 즉위했는데 여기에도 네덜란드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들에겐 하멩꾸부워노 5세가 만만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멩꾸부워노 5세는 재위기간 내내 보신적으로 행동했지만 기본적으로 자바전쟁이 끝난 후 신민들이 큰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또다른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네덜란드와 정치적 밀약을 맺었는데 그 밀약은 1988년 하멩꾸부워도 9세가 폐기할 때까지 효력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그는 네덜란드의 비위를 맞추는 정치적 행위조차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치에 간여하지 않는 것이 네덜란드로부터 트집잡히지 않는 길이라 믿고 의도적으로 예술이나 문화 같이 정치와는 전혀 다른 분야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재위기간 중 와양 그림자극의 변사들 숫자가 5배나 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이외에도 그는 직접 몇몇 궁중무용을 고안했는데 그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스림삐 깐다(Serimpi Kandha), 스림삐 렝가와티(Serimpi Renggawati), 스림비 링깃 문겡(Serimpi
Ringgit Munggeng), 스림비 하디 울랑운 브락타(Serimpi Hadi Wulangun
Brangta) 등을 포함하는 스림삐 무용(Tari Serimpi)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하멩꾸부워노 5세의 그러한 처신에 만족해한
것은 아닙니다. 술탄의 그러한 모습을 혐오한 사람들 중엔 술탄의 형제인 구스티 라덴 마스 무스토요(Gusti Raden Mas Mustojo)도 있었습니다. 무스토요
왕자는 하멩꾸부워노 4세가 왕후 라투 끈쪼노에게서 낳은 12번째
아들로 하멩꾸부워노 5세의 친동생이기도 했습니다.
왕궁의 귀족들과 족자의 신민들 중엔 하멩꾸부워노 5세가 허수아비에 겁장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고 네덜란드에게 너무 고분고분하게 굴어 왕궁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린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래서 훨씬 딱부러지는 강단과 수완을 가진 라덴 마스 무스토요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가 부르나이 술탄국의 공주와 혼인하여 두 술탄국의 유대를 강화한 후엔 더욱 큰 대중적 인기를 모았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하멩꾸부워노 5세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더욱 터져가던 중에 끄라톤 궁전 안에서 벌어지던 암투가 술탄의 입장을 더욱 약화시켰습니다. 그 논란의 중심에 술탄의 부인 중 한명인 깐젱 마스 헤마와티(Kanjeng Mas Hemawati)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고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1855년 6월 5일 족자 끄라톤을 뒤흔든 경천동지할 사건에서 시작된 혼란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습니다. 술탄 하멩꾸부워노 5세가 궁전의 한 방에서 벌거벗은 시신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왕을 살해한 범인은 하멩꾸부워노 5세가 가장 사랑했다고 알려진 예의 다섯 번째 후궁 깐젱 마스 헤마와티로 밝혀졌습니다. 술탄은 등을 칼에 꿰뚫려 살해당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당시 끄라톤은 이 사건에 대한 모든 언급과 논의를 금지했는데 그래서 깐젱 마스 헤마와티가 술탄을 살해한 후 어디로갔는지,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깐젱 마스 헤마와티의 살해동기가 알려지지 않아 이 사건은 이슬람 마타람 왕국 계보에 미스터리로서 남아 있습니다. 당시 이 사건은 몇몇 내부자들에게만 알려졌으며 술탄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의 손에 살해당했다”며 입소문이 돌았습니다.
그가 살해된 원인은 아직까지도 별로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그는 시누훈 메놀(Sinihun Menol)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그가 죽은지 3개월만에 왕후 KGR 끈쪼노도 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역대 왕후들 이름에 '끈쪼노'가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끈쪼노는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지위를 나타내는 호칭인 듯 보입니다)
그런데 그가 살해당할 당시 두번째 부인인 깐젱 라투 스까르 끄다톤(Kanjeng Ratu Sekar Kedaton)은 임신 말기였고 그로부터 13일 후 해산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그는 부왕의 뒤을 이을 왕위계승자일 터였습니다. 아기 태자는 라덴 마스 깐젱 구스티 띠무르 무하마드(Raden Mas Kanjeng Gusti Timur Muhammad)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술탄 하멩꾸부워노 6세
그러나 이미 예견되었던 바와 같이 라덴 마스 무스토요가 족자의 다음 왕으로 대관식을 가지며 술탄 하멩꾸부워노 6세의 칭호를 얻습니다. 태자가 술탄으로서 나라를 이끌 준비가 될 때까지 잠시 왕위를 맡는다는 명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상황은 약속한 대로 깔끔하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1877년 7월 20일 하멩꾸부워노 6세가 승하했을 때 왕위를 이은 것은 띠무르 무하마드 태자가 아니라 술탄 자신의 아들 구스티 라덴 마스 무르트요(Gusti Raden Mas Murtejo)였습니다. 그는 스리 술탄 하멩꾸부워노 7세(1839-1931)로서 즉위합니다.
물론 하멩꾸부워노 5세의 왕후인 라투 스까르 끄다톤과 태자 구스티 띠무르 무하마드는 이에 항의하며 자신이 적통임을 주장하는 항의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두 사람은 국왕과 왕궁에 반항한 혐의로 곧 체포되고 맙니다. 그들에겐 무거운 처벌이 내려져 하멩꾸부워노 5세의 가문은 완전히 왕가의 계보에서 지워지고 하멩꾸부워노 7세의 가문만이 영원히 왕가를 잇도록 되었습니다. 라투 스까르 끄다톤과 구스티 띠무르 무하마드는 북부 술라웨시의 마나도로 유배되어 거기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끄다톤 왕후
스스로를 지키려
했던 술탄 하멩꾸부워노 5세의 생전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가계의 몰락을 가져온 셈입니다.
2018.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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