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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근대사] 술탄 하멩꾸부워노 4세 - 소년 술탄 본문
술탄 하멩꾸부워노 4세
술탄 하멩꾸부워노 4세의 본명은 구스티 라덴 마스 입누 쟈롯(Gusti Raden Mas Ibnu Jarot)입니다. 하멩꾸부워노 3세의 여덟 번째 아들로 구스티 깐젱 라투(GKR) 하긍(Gusti Kanjeng Ratu (GKR) Hageng) 사이에서 1804년 4월 3일 태어났습니다.
그는 10살이 되던 1814년 술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나이 어린 술탄을 위해 섭정으로 선택된 자는 노토꾸수모 왕자(Pangeran Notokusumo)로, 하멩꾸부워노 2세의 일생을 둘러보면서 영국군이 하멩꾸부워노 2세를 축출한 후 빠꾸알람 1세라는 칭호를 주고 까디빠텐 빠꾸알라만(Kadipaten Pakualaman) 자치구의 영주로 봉한 사람임을 우린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술탄이 16세가 되어 성년의 나이에 들어서는 1820년까지 섭정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술탄 하멩꾸부워노 4세와 그의 형 디포네고로 왕자의 사이는 마치 라마야나 전설에 나오는 크레슈나(Kresna)와 아르쥬나(Arjuna) 같은 관계였다고 전해집니다. 1915년 3월 22일 동생이 할례를 받을 때 겁먹은 동생의 두 눈을 디포네고로 왕자는 두 손으로 가려주기도 했습니다. 그후 께동께보 경전(Kitab Kedung Kebo)과 족자 이야기(Babad Ngayogyakarta) 에서는 디포네고로 왕자가 술탄의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뜨갈레조에 머물면서도 자주 끄라톤을 찾아와 파타 알무크 경전(kitab Fatah Al-Mulk)과 아랍, 시리아의 왕들 이야기를 예로 들며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는 것입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술탄에게 많은 책을 읽어 주었는데 그중엔 Serat Ambiya, Tajus Salatin, Hikayat Makutha Raja, Serat Menak, Babad Keraton, Arjuna Sasrabahu, Serat Bratayudha, Rama Badra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어린 술탄의 교육을 위해 라뚜 이부(어머니 여왕 – 라뚜 하긍) 역시 수로나딴 부대장 끼아이 아흐맛 응우스만(Kyai Ahmad Ngusman)과 세포이 부대 장교 아바스 중위를 지명해 술탄에서 알꾸란과 말레이어 필기법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라뚜 하긍이 서구 열강에 매우 열광하고 있었다는 심증을 갖게 하는 부분입니다.
하멩꾸부워노 4세의 재위기간 동안 유럽의 나폴레옹 전쟁이 마침내 끝나면서 자바섬의 식민정권이 1816년 영국에서 다시 네덜란드로 넘어가는 상황이 연출되었고 이때 섭정 빠꾸알람 1세보다도 어머니 여왕과 다누레조 4세가 매일의 정사를 관장하는 형국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재상 다누레조 4세는 끄라톤 왕궁에서 강대한 권력을 얻어 전횡을 휘두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디포네고로 왕자와 끄라톤의 끈끈한 관계는 재상 다누레죠 4세로 인해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재상은 영리기업에 국토를 임대하려 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술탄국 백성들의 고통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커피 같은 기호작물을 인도네시아에서 대규모 플랜테이션 방식으로 재배하는 유럽 사업가들은 아직 없던 시절입니다. 다누레조 4세는 형제들을 힘있는 자리에 앉혔는데 디포네고로 왕자와 다누레죠 재상 사이의 불화를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몰고 간 것은 하멩꾸부워노 4세가 섭정없이 친정을 시작한 1820년 7월 20일 있었던 그레벡 샤왈(Garebeg Sawal) 행사에서 있었던 사건때문이었습니다. 이둘 피트리(Idul Fitri)를 기념하는 이슬람력 샤왈월(10월) 1일에 벌어지는 기념행사에서 디포네고로 왕자는 레조위낭운(Rejowinangun)의 땅을 제멋대로 임대해준 재상과 뜨거운 설전을 벌였던 것입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재상은 디포네고로 왕자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고 앞서 공부한 바와 같이 다누레죠 4세 재상은 뜨갈레죠에 있던 왕가 외가의 묘역을 파헤치고 길을 내겠다면서 디포네고로 왕자를 도발했다가 결과적으로 자바 전쟁 촉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 됩니다.
1820년 1월 20일 빠꾸알람 1세가 공식적으로 섭정에서 물러났지만 하멩꾸부워노 4세의 독립적 치세는 불과 2년뿐이었습니다. 1823년 12월 6일 급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19세였습니다. 외궁 별장을 다녀오던 길이었습니다. 그의 시호 ‘시누훈 자롯, 세바 버시야르(Sinuhun Jarot, Seda Besiyar)’에도 그런 죽음의 배경이 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는 이모기리 빠지마탄의 아스타나 버시야란(Astana Besiyaran)에 묻혔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여행 중 독살당한 것이라는 온갖 추측과 소문을 불러 왔습니다. 3년 후 자바 전쟁을 주도하게 되는 디포네고로 왕자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그렇게 비명횡사한 사랑하던 동생에 대한 넘쳐 흐르는 정과 한, 그리고 복수의 일념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하멩꾸부워노 4세는 생전 9명의 부인과 결혼해 18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중 3분의 1 정도가 어릴 때 사망했고 그가 GKR 끈쪼노로부터 얻은 태자 구스티 라덴 마스 가롯 메놀(Gusti Raden Mas Gatot Menol)이 아직 세 살이 채 되지 못한 나이로 하멩꾸부워노 5세가 되어 술탄의 왕좌에 올랐습니다.
하멩꾸부워노 4세가 친정체제에 들어간 2년 동안에도 라투 이부와 재상 다누레죠가 대소사의 결정을 주관하였으므로 술탄의 업적은 그다지 조명되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끼아이 마닉 렛노(Kyai Manik Retno)와 끼아이 죨로도로(Kyai Jolodoro)라는 당시 마차 두 대가 지금도 족자 박물관에 남아있는데 이는 당시 술탄의 행차를 위해 사용되던 마차들이라 합니다.
짧은 인생을 살고 간 하멩꾸부워노 4세의 이야기는 이 이상 알려져 있는 것이 없으니 아쉬운 일입니다. 일국의 왕에 대해 쓸 수 있는 이야기가 불과 몇 페이지도 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2018.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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