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와 소설 사이, 그 어디쯤

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일반 칼럼

두부튀김의 미학

beautician 2018. 5. 7. 10:00

금지된 왕국


재 너머 저 들은 갈 수 없는 나라

봄도 꽃도 꿈마저 없는

얼어붙은 땅

 

모두들 바라보며 눈물만 흘릴 뿐

어찌할 수 없어 돌아서야 하는

금지된 왕국

 

강 건너 저 숲은 갈 수 없는 나라

신화마저 떠나버린 차디찬 닫혀진 낙원

 

사랑 없는 마음과 표정 없는 얼굴

붉은 깃발만인 펄럭거리는

침묵의 나라

 

지금은 서로 향한 차가운 눈빛

매서운 눈초리

그러나 언젠가 찾아올 어느 날

신이 인간에게 화해를 가르치는 날

우리는 뜨거운 마음으로 그 땅을 밟으리

 

하지만 저곳은 금지된 왕국

아직은 갈 수 없는

침묵의 나라

 

 

군 시절 전방에서 근무할 때 이런 걸 썼습니다.

눈치챘겠지만 이건 시가 아니라 노래 가사입니다. 이젠 퇴색해버린 추억 속에서 난 한때 직접 쓴 곡으로 대학가 무대에 나서기도 했고 부대 BOQ에서는 밤새워 기타줄을 튕기며 악보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끝내 그 길로 가지 않은 것은 나 정도의 실력과 의지로는 그 계통에서 절대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난 중위 계급장을 달고서 '안보통제부'란 그럴듯한 이름을 가진 부대에 있었습니다. 임진각에서 자유의 다리를 건너면 나오는 전쟁 박물관인 멸공관과 당시 막 신축된 도라전망대, 북한이 판 제3땅굴을 아우르며 시설을 관리하고 안보관광객들을 안내하는 일을 했습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대성동 마을이 있었는데 보안과 안전에 취약한 최전선 접경 지대에 민간인 부락을 유지하는 것은 분명 어떤 정치적 목적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도라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북측 지역 기정동 마을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높은 철탑 위에 거대한 인공기가 펄럭이던 그곳은 민간인들이 거의 관측되지 않았으므로 유령도시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 마을 사이를 지나는 군사분계선은 그 누구도 절대 넘어서는 안되는 금단의 경계였고 그 '을 지키기 위해 'GP '라 불리는 중무장 시설들이 비무장지대 양쪽에 수없이 흩뿌려져 있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그곳에서 서로를 노려보던 남북이 선의를 가지고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때 내가 거기서 차가운 눈빛과 매서운 눈초리를 느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군복을 벗고 사회로 돌아왔을 때 대한민국은 88 서울올림픽을 코 앞에 두고 흥청거리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990년에 독일이 통일되고 1991년에는 소련이 붕괴했죠. 직장에서 첫 해외출장으로 홍콩을 거쳐 중국 샨토우에 들어가야 했을 때 위압적인 제복의 중국 이민국 직원들이, 내가 군 시절 제3땅굴 관광객들 앞에서 목에 힘주어 공산당을 성토했던 사실을 알게 되면 입국을 거부하지나 않을까 내심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설령 중국 공산당이 내 군경력을 알았다 하더라도 딱히 문제 삼았을 리 없습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한국의 분단은 여전할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좀 더 흘러 내가 인도네시아에 나온 후 본국 정권이 바뀌고 남북정상회담이 두 번씩이나 열렸지만 그 사건들이 작은 무역업을 하던 내게 뭔가 실질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북부 자카르타의 끌라빠가딩에서는 북한 식당 칠보산이 평양 출신 아름다운 여종업원들과 매일 밤 한 차례 열리던 화려한 공연으로 한국 교민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며 성업했고 제3세계 외교관 자녀들이 다니던 현지 국제학교 간디스쿨에서 내 아들이 북한 대사관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지만 모두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습니다. 자카르타에서 알게 된 북한사람들은 늘 어느 순간 소리소문도 없이 인도네시아를 떠났고 어차피 다시 만날 기약도 없었으므로 굳이 연락처를 나누거나 이름을 외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부질없는 일이었으니까요. 멀리 해외에 나와,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남과 북의 사람들은 분단된 조국의 상황과 한치도 다를 바 없이 서로 철저히 다른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최근 몇 년간 북핵문제와 국제제재로 남북관계가 더욱 경색되던 차에 전격적으로 단행된 개성공단 폐쇄는 해외에서 그나마 그렇게 근근이 유지되고 있던 남북관계마저 완전히 단절시키고 말았습니다. 통일은 대박이라던 정권은, 나름대로 이유야 있겠지만, 힘센 노랑머리 양아버지의 손을 잡고서 다른 부모 밑에서 자란 친형제를 함께 압박하는 모양새로 비치기 쉬운 일련의 조치들을 단행했고 그 유탄은 인터넷 공간에서도 빈번하게 날아다녔습니다. 유력한 한인 웹사이트나 밴드마다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나 몇몇 반공정신 투철한 교민어른들을 등 떠밀며 해묵은 색깔론을 휘둘러, 자기 생각을 말하려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했던 것입니다. 반대편 사람들을 간단히 빨갱이로 몰아버리던 구시대의 행태가 현대 인도네시아 교민사회에서 여전히 맹위를 떨쳤고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종북 또는 간첩이라며 매도당해야 했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끌라빠가딩에 다시 문을 연 북한식당 평양랭면2016년 어느 날 야반도주 하듯 문을 닫고 사라진 사건도 있었습니다. 북한 핵실험에 따른 국제제재에 인도네시아도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우리 대사관과 관변단체들이 반복적인 공지를 통해 교민들의 북한식당 출입자제를 당부했으므로 손님이 크게 준 식당은 더 이상 적자를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누군가에겐 맛도 없이 비싸기만 한 식당이었고 또 누군가는 거기서 먹고 낸 냉면 한 그릇 값이 나중에 원자탄이 되어 돌아올 거라며 입에 거품을 물었지만 어쨌든 난 당시 북한식당의 퇴출을 착잡한 마음으로 지켜 보았습니다. 당시 우린, 내가 찍은 한 표가 비수가 되어 돌아와 내 등을 찌르는 세상에 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대략 그때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 어딘가에 떨궈 놓고 와 이젠 잃어버렸을 거라 생각했던 오래된 악보노트를 창고 속 짐가방에서 발견한 것이 말입니다. 그 옛날 대학시절과 군시절에 그려 놓았던 악보들 중에서 나름 역작이라 생각했던 예의 금지된 왕국을 다시 보면서, 30년 전에 쓴 가사 속의 상황이, 갓 잡아 올려 펄펄 뛰는 생선처럼, 오늘날의 현실에서 아직도 절절이 유효하다는 사실에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폭주기관차처럼 파국을 향해 치닫던 남북관계가 2018427일 대전환점을 맞으리라곤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맞잡은 남북 정상들의 악수는 뜨거웠고 자카르타의 교민들 대부분도 하루 종일 진행된 회담에 눈과 귀를 기울였습니다.

 

마치 축제와도 같았던 그 회담이 열린 판문점은 내가 근무했던 부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언젠가 영화로도 나왔던 JSA 공동경비구역은 판문점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3땅굴과 판문점은 담당부대가 달랐지만 한 세트의 안보관광지로 묶여 우리 쪽 견학을 마친 팀들을 JSA에서 연락장교가 나와 인솔해 가곤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늘 팽팽한 긴장감이 넘쳐 흘렀고, 불과 그 몇 개월 전 북한병사 귀순사건으로 총격도 있었던 곳인데 남북의 최고 지도자들이 손을 맞잡고 영부인들, 고위 수행원들과 함께 만찬과 환담을 나누는 정상회담의 장소가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한국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로부터 며칠 후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남북정상회담을 축하하며 대통령궁에 초청한 남북한 대사들이 악수를 나누며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남북의 해빙무드가 인도네시아에도 도달한 것입니다. 그동안의 남북관계가 북극해의 두꺼운 얼음을 쇄빙선으로 애써 깨나가려는 것이었다면 2018년의 상황은 마침내 한반도에 봄이 도래해 꽁꽁 얼었던 한강과 대동강이 한꺼번에 풀리는 것같은 모습입니다. 이번 일로 혹자는 북한과 그곳 지도자에게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부모님의 북녘 고향방문의 날이 임박했음을 느꼈겠죠. 하지만 남북한의 반목과 적대관계에 기생해 살아왔던 개인과 단체들, 그래서 세월호 엄마들마저 종북으로 몰며 온갖 감언이설로 남북화해에 찬물을 끼얹으려 했던 세력들은 코앞에 다가온 한 시대의 종말을 감지하며 절망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프라인에서 그들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상대방에게 빨갱이라 손가락질 하던 시절이 마침내 저물어 가는 것이죠.

 

세계를 수백 번 멸망시키고도 남을 세상의 수많은 핵미사일 발사 스위치들 중 평양의 국무위원장실 책상에 놓여있던 스위치 달랑 한 개를 치워버린다고 해서 당장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누구도 탈북할 필요가 없을 만큼 북한에서 자유와 인권이 지켜지고 반 세기가 훌쩍 넘도록 섬처럼 살아왔던 남한이 대륙과 세계에 육상으로 연결되는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벌써부터 평양으로의 수학여행, 반도종단열차를 타고 북경과 모스크바와 서유럽을 향하는 낭만적인 대륙여행을 꿈꾸고 기업들은 북한과의 각종 경협과 사업지 선점을 꿈꾸며 치열하게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비무장지대를 개발하느냐 보존하느냐, 주한미군이 철수하느냐 마느냐, 북핵폐기를 어떻게 검증하느냐 하는 문제들도 거론되고 있죠. 하지만 그런 걸 돈 받고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우리 소시민들이나 해외교민들까지 나서 몸바쳐 연구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분명 따로 있습니다.

 

훗날 필연적으로 다가올 남북의 통일을 향해 그 첫 걸음을 떼면서 이제부터 한반도와 세계에서는 거창하고도 위대한 일들이 줄줄이 벌어지게 될 텐데 우선 사람들 마음속에서 아주 작은, 그러나 근본적인 모종의 질적 변화가 일어나야만 그 모든 것들이 왜곡없이 진정한 의미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비로소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자기 줄려고 두부튀김 다섯 개 사왔다. 나 통 크지?”

, 그래? 완전 김정은 닮았네.”

 

이렇게 말해도 빨갱이 소리를 듣지 않는 세상.

 

이런 작은 시작을 꿈꿉니다.

그래서 저 앞의 노래가사 따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을 날이 마침내 올 것을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