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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크리스킴의 몰락

크리스킴의 몰락 (2)

beautician 2010. 1. 12. 21:58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직원 관리를 직원들 목조르는 것과 동일하게 여기는 기업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한국인 직원들을 관리하면서 비자와 근로허가 등을 받아준다는 이유로 제반 허가서 원본은 물론 여권까지 회사 금고에 보관하다가 수틀리면 하루 아침에 해고해 버리고 현지에서 다른 직장이나 활로를 찾을 기회도 주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도로 여권을 해당 신청서와 함께 이민국에 넘겨 출국명령인 EPO를 내버리곤 했지요.

 

EPO는 원래 14일 내에 출국할 것을 명령하는 인도네시아 이민국의 명령서인 셈인데 신청자의 요청에 따라 그 날짜를 조정할 수 있어 14일 이내, 즉 하루 이틀 사이에 출국하는 것으로도 조정할 수 있었어요. 만약 이틀짜리 EPO를 받아 오면 해당 여권소지자는 이틀 내에 모든 정리를 끝내고 출국 비행기를 타야만 했고 그 시한을 넘기면 불법체류자가 되는 것이었죠. 해당 여권소지자는 해고처리의 부당성을 따지거나 현지 관련기관에 도움을 청할 사이도 없이 황급히 출국수속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래서 당시에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해고당하고 빡빡한 EPO 시한 때문에 급히 인도네시아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한국에 돌아간 후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해당 회사에 대한 성토의 글을 올리던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비자 스폰서가 해당자의 여권을 보관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지금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것이죠. 직원들이 쉽게 독립해 경쟁사를 설립할 수 있는 경우에는 해고 또는 퇴직 당한 직원들에게 그런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이런 일이 더욱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는데 특히 교민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례대입학원들에서 가장 흔히 일어났던 것으로 기억하고 미용실도 그런 직종 중 하나였습니다.

 

비교적 교민사회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군소직종 중 하나인 미용사들의 권익을 위해 내가 뭔가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도 그런 상황이 배경이 되었습니다. 세명가꿈터에 있던 한 미용사가 나와 만난 지 불과 2주 만에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고서 더욱 그런 마음을 굳혔지요. 나와 만나던 때만 해도 그는 자카르타 분위기를 익히면서 뭔가 잘 해 보고자 하는 포부에 가득 차 있었는데 말입니다.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일이 틀어져 청운에 찼던 해외취업이 대실패로 끝났고 만회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허둥지둥 귀국한 것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그리고 그 미용사가 충분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다면 현지 미용실 중에서 그가 일할 만한 자리를 알아 봐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마침 현지 미용업계의 최중심부까지 파고 든 내 회사는 그런 조치가 대체로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미용사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한국의 미용사협회 같은 미용사들의 모임을 만들어 보려는 시도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고용인 입장인 미용사들이 따로 공식적인 모임을 만드는 것은 고용주 입장에서 좋아 보이지 않을 것이 뻔했어요. 그래서 한인미용교류협회라는 명칭으로 한국 미용실 및 미용관련 업체들을 묶어 보려는 시도도 해 보았습니다. 미용실 외에 네일아트, 가발, 피부관리실 등을 모두 모으면 대략 40~50개 업체는 될 듯 했습니다. 거기에 현지 미용업계의 유력한 인물들, 예를 들어 미용계 거장 루디 하디수와르노(Rudy Hadisuwarno)씨나 마르타 틸라르, 무스티카 라투 같은 유수한 현지 미용회사, 또는 살론프로 같은 미용잡지회사를 고문으로 엮는 것까지 물밑작업을 진행했지요. 그러나 결국 이 일이 성사되지 않은 이유는 정작 협회 또는 이 모임의 중심이 되어주기를 바랬던 한국 미용실들이 사실상 서로 적대적 경쟁관계에 있었고 예전에도 비슷한 모임을 만들다가 무한 가격출혈경쟁을 벌이면서 무산되었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서로 껄끄러워 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이 협력하여 협회를 이끌어 가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2007년 어느 날 이번에도 세명가꿈터에서 또 다른 미용사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세명가꿈터는 몇 명의 미용사들이 스쳐 지나갔는데 이번 미용사는 미용실 부분의 이름을 시즈 헤어라고 고치고 수입분배 방식으로 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크리스 킴이라고 밝혔습니다.

 

사족이지만 이 대목에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한국인 미용사들은 대부분 누구나 다 그런 영문 이름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해외에서 일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영문 이름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평생을 한국에서 한국인 손님들을 대상으로 일했던 미용사들이 굳이 크리스 킴, 알렉스 허, 리온 정, 켈리, 사라 장 같은 이름을 내세우는 이유는 단지 유행이 그래서일까요? 아니면 그래야만 좀 더 트랜디하고 세련되어 보이기 때문일까요? 과거 홍콩 출장을 갔을 당시 지극히 동양적 얼굴을 한 사람들이 저스틴, 찰스, 윌리엄 등의 영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 느꼈던 생경함, 인도네시아에 와서도 지극히 아구스, 무하마드 스러운 얼굴의 현지인들이 마이클, 마틴, 제임스 같은 지극히 서구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놀라움은 그것이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어느 정도 상쇄됐지요. 하지만 지극히 철수 영희 스러운 얼굴의 한국인 미용사들이 영어 한 마디 쓸 필요 없는 한국에서부터 헐리웃 영화에 나오는 이름들을 쓰고 있다는 점은 조금 더 생경했습니다.

 

크리스 킴의 경우에도 그랬습니다.

더욱이 대개는 부드럽고 많은 경우 여성적이기까지 한 일반적인 미용사들과는 달리 크리스 킴은 좀 거친 인상이었고 대체로 공격적인 눈매를 가지고 있었어요.

 

 

10.26 사태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동명이인....

 

 

그를 한번 만나 보라고 종용했던 사람은 앞서 인도네시아 드림 편에 등장했던 최사장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자기 인맥을 과시하려 항상 노력했던 최사장은 단 한번 만났던 사람들도 다른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는 자기 말 한 마디에 간이라도 내어줄 사람으로 둔갑시키곤 했는데 중부 깔리만탄 주도인 발릭빠빤에서 한 번 얼굴을 스쳤던 현지 군사령관 물독 장군이라는 분을 마치 자신의 현지사업을 전적으로 후원해주는 스폰서인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선전하기도 했었지요. 그는 일개 미용사에게마저 자신이 현지 미용업계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 크리스 킴의 첫 반응은 어딘가 자기 방어적이었어요. 뭔가 도울 일이 있을까 해서 찾아 보았던 나를 그는 마치 물건을 팔러 온 잡상인처럼 여기는 듯 했습니다. 사실 그런 상황은 한국 미용실들을 다니면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었어요.

 

한국 같으면 수백개의 미용재료상들이 무한경쟁을 펼치면서 미용실들을 방문해 물건을 팔고 그러기 위해 직원을 수배해 주고 자기가 팔지 않는 물건들도 수배해 주는 등 제반 서비스를 공급한다고 들었어요.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미용시장은 공급자 위주의 시장이었으므로 재료상들은 가게에 앉아서 찾아 오는 손님들에게만 물건을 팔았고 그래서 빠사르 바루(Pasar Baru) 지역 하르코(Harco) 상가의 미용도매시장은 물건을 사러 온 미용사들과 미용실 주인들로 매일 북새통을 이루었지요. 한국 상황에만 익숙해 있던 한국인 미용사들은 그런 상황을 알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현지 미용실에서 나름대로 대접을 받던 나도 한국 미용실에만 가면 물건 팔러 간 게 아닌데도 잡상인 취급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어요.

 

나 역시 한국미용실에 뭔가를 팔아 보겠다는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인도네시아 시장을 대상으로 도소매 사업을 벌이고 있던 나로서는 특정 브랜드를 선호하는 한국 미용실들을 위해 그 입맛에 맞추어 미용재료를 소량씩 수입해 오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고 한국 미용실들은 또 나름대로 미용사들이 알고 있던 한국 내 중간상으로부터 직접 물건을 구매해 아는 공장의 수입자재 컨테이너에 몰래 넣어 들여오는 등 자체 수입경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인도네시아 전국을 통틀어 20개도 되지 않는 현지 한국 미용실들에 뭔가를 공급한다는 것은 사업규모 자체가 되지 못했고 어떤 수익모델을 기대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처음 만났던 크리스 킴은 같은 장소에서 만났던 전번 미용사와 마찬가지로 좀 갑갑한 상황이었어요. 그는 원래 스노파티의 뷰티샵 미용사로 처음 인도네시아에 왔지만 뷰티샵에서는 얼마 일하지 못했습니다. 미용사마다 저마다 각각 다른 특색이 있어 특정 미용실과 잘 맞는 미용사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미용사도 꼭 있기 마련이었으므로 결과적으로 크리스 킴은 뷰티샵과 잘 맞지 않는 미용사였던 셈이지만 교민 아줌마들 사이에서는 그가 미용사로서 별로 실력이 없고 불친철하고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다는 얘기가 돌고 있었어요. 더욱이 실제로 그는 손님들의 머리를 요청보다 더 짧게 잘라 버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머리칼의 길이가 여성미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죽을 죄를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 뷰티샵에는 예전에 한 번 근무했던 미스터 윤이라는 친구가 다시 불려와 일하기 시작했고 낙동강 오리알이 될 뻔한 크리스 킴이 세명가꿈터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어쩌면 불행 중 다행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조명이 어두운 세명가꿈터 안의 쪽방 하나에서 크리스 킴은 그때 신혼살림을 차리고 있었으므로 많이 안되 보였지요. 그는 뷰티샵에서 근무할 당시 자카르타에 골프 전지훈련을 왔던 지금의 부인을 만났는데 40 고개를 막 넘으려는 짧달막하고 늙수그레한 미용사와 20대 후반에 막 들어서던 늘씬한 골프프로 지망생 아가씨의 만남과 결혼까지 이르게 되는 교제의 과정은 불가사의하기까지 했습니다. 한국에 돌아갔다가 어렵사리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치다시피 자카르타로 돌아온 아가씨는 크리스 킴과 신접살림을 시작했는데 그렇게 어찌어찌 흘러 든 곳이 바로 세명가꿈터의 쪽방이었던 것이죠.

 

더욱이, 비록 이름은 시즈 헤어로 바꾸었지만 이미 여러 명의 미용사들이 지나가면서 한번도 제대로 성공적인 운영이 되지 않았던 세명가꿈터의 미용실은 크리스 킴이 맡고 있을 당시 거의 매일 파리를 날리던 중이었어요. 그는 참 곤란한 입장에 처해 있었고 쪽방에서 예쁘게 운동복을 차려 입고 골프백을 챙겨 연습장에 나가는 새신부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습니다.

 

내 미용실을 낼 겁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미용사로서 이름을 내고 싶어요. 도와 주실 수 있으신가요?”

 

크리스 킴이 그런 부탁을 해온 것은 몇 번의 만남이 반복된 후였습니다. 내가 뭔가 팔러 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게 된 후의 일입니다.

 

그는 한 때 인천에서 자기 미용실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 말로는 미용실 몇 개를 거느렸다고 했지만 뻥마왕 미스터 한과의 일도 있고 해서 미용사들의 얘기들 중 검증되지 않는 부분들은 대부분 뻥일 것이라고 치부하기로 한 상태였어요. 그러나 최소한 그가 미용실을 직접 운영해 보았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운영하던 미용실이 경영위기를 맞아 문을 닫게 되었을 때 마침 자카르타의 뷰티샵과 연결되어 면접을 본 후 곧 날아와 일하게 되었다고 하죠.

 

한국에서 미용실이 망했고 뷰티샵에서의 근무기간도 짧아 모아둔 돈도 별로 없었을 그가 세명을 나와 따로 미용실을 낸다고 했을 때 그 재원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다못해 한국에라도 남겨 둔 돈이 있었다면 새신부를 데리고 세명의 쪽방까지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말만한 처녀가 골프채를 들고 해외 전지훈련을 다니게 할 정도의 처가라면 사위에게 작은 미용실 하나 차려주는 지원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요. 그는 1년 임대료가 1만불이 훌쩍 넘는 몽인시디 거리, 지금의 한민족 식당이 있는 루꼬단지의 루꼬 한동을 2년 임대를 하고 대대적인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것은 남편의 기를 살려주려는 새신부가 간절히 친정집에 간청한 것이 결실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미용업계에 대해 알려 주고 사람들 소개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내가 누굴 유명하게 해 줄 만한 입장에 있는 건 아닌데….”

그래도 배사장님이 여기 사람들 많이 아시니까…,”

그럼 기회가 닿으면 연예인들이나…, 이런 저런 행사에 미용 협찬 나서는 거 가능하겠어요?”

물론이죠. 꼭 좀 연결해 주세요.”

 

연예인 매니지먼트 회사처럼 한 미용사를 스타로 키우는 일은 우리 회사가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현지 업계에 정착해 차근차근 미용사로서의 개인 브랜드를 성장시켜 가는 데에 약간의 조력은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의 미용실 개업일정에 맞추어 현지 미용잡지 살롱프로 편집장에게 요청을 넣어 인터뷰 기사를 싣도록 조정해 주었습니다. 현지 미용업계의 주요 인물들도 세미나 같은 행사를 통해 소개해 주었고 당장 미용실 개업을 위해 미용실 기자재를 현지에서 조달할 업체들도 알려 주었지요.

 

외국인 미용사가 현지에서 명성을 떨치고자 한다면 선택할 수 있는 가용한 방법들은 사실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미용실을 하나 개업해서 돈을 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요. 미용실을 통해 이름을 내려면 대규모의 호화미용실을 개업해 상류층 부인들과 연예인들을 손님으로 끌어 와 인지도를 높이고 기회가 닿는 데로 지점을 하나 둘 늘리면서 궁극적으로는 프렌차이즈가 가능한 미용실 브랜드를 굳히는 것이 그 한 가지 방법입니다. 대자본을 가진 화교들이라면 스타 미용사 없이도 마이 살롱(My Salon), 리키 살롱(Ricky Salon), 크리스토퍼 살롱(Christopher Salon) 처럼 자금력으로 지점과 프랜차이즈 점을 늘려 나가는 것이 가능하지만 미용사 개인이 한정된 개인 자본으로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만들고 미용학원의 설립까지 계획하고 있다면 그 스스로가 먼저 스타 미용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스타 미용사가 되기 위해서는 스타들의 머리를 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고 그 사실이 세계만방에 소문이 나야 하고요.

 

오늘 날 인도네시아에서 나름대로 지명도를 갖게 된 미용계의 거장들도 모두 그런 수순을 밟았지요. 모두들 수많은 대회에 열심히 출전했고 기회가 된다면 스폰서를 받거나 자비를 들여 런던, 파리, 뉴욕으로 날아다니며 토니 앤 가이, 비달사순 같은 톱 브랜드의 미용학교에서 단기, 또는 장기과정을 수료하면서 기술을 배우려 애썼고 젊은 시절 돈도 별로 되지 않는 영화판, TV 방송국을 쫒아 다니며 자막에 자기 이름을 한 번이라도 더 띄워 보려고 노력했던 것이죠.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언젠가부터 이런 저런 행사에 초청되기 시작하고 미스 인도네시아 선발대회에도 자신의 아트팀이 초청되고 그 결과 더 많은 스폰서들이 붙고 그들 미용학원에 학생들이 앞다퉈 수강신청을 하면서 현지 미용계의 거목으로 성장해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루디 하디수와르노는 급기야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 현지 미용계의 정상 위치에 올랐고 그의 동생 구나완 하디수와르노는 형과 함께 매트릭스 브랜드의 홍보대사가 된 것이고 찬드라 굽타(Chandra Gupta)는 초특급 가수 크리스다 얀티(Krisda Yanti)의 붙임머리를 너무나 멋지게 해주어 샴푸 광고에 출연시키면서 한 사람 머리 하는데 한화 200만원씩을 받으면서 미용계의 차세대 선두주자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고 피터 F 새랑(Peter F. Saerang)은 마가렛 대처 전 영국수상과 줄리아 로버츠의 방문기간 동안 그들 머리손질을 담당해 이름을 떨친 후 오늘도 현지 최고의 미용실 체인 브랜드 중 하나로 당당히 서있는 것이고 루바체(Luvaze)미용실의 지미(Jimmy)는 톱 모델이자 가수, 탤런트인 여동생 아그네스 모니카(Agnes Monica)를 내세워 자신의 미용실과 8개에 달하는 지점들을 상류층 부인들과 연예인 손님들로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40대에 들어선 크리스 킴은 그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인도네시아에서는 무명신인이나 다름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미국에 갓 진출하던 당시의 원더걸스 같은 입장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원더걸스는 미모와 젋음, 그리고 JYP라는 걸출한 매니지먼트 회사의 적극적 지원을 받고 있었던 것에 반해 크리스 킴이 내세울 것이라고는 동남아에 강하게 불고 있던 한류열풍의 진원지인 한국에서 미용을 했던 사람이라는 정도밖에 없었으므로 시내에 미용실 하나를 낸다는 것만으로 현지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은 애당초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더욱이 그는 인도네시아에서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무명이었습니다.

 

성공을 정말 간절히 원한다면 현지의 거장들이 경주했던 그간 노력의 몇 배를 집중적으로 투자해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베이스캠프가 될 미용실을 성공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것은 물론, 업계의 유력인사들을 통해 거장들을 소개받아 교류하고 협력하면서 미용잡지나 미용대회에 수시로 출품하면서 인지도를 높여 우선적으로 거장들의 세미나나 유력 브랜드 행사에 한 부분을 맡게 되는 것이 가장 신빙성 높은 선택 가능한 지름길이었습니다. 그나마 그것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했지요.

 

크리스 킴은 내 설명에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습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단시간에 뭔가 괄목할 만한 결과를 내려는 일반적인 인니 초짜 한국인들의 마음가짐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런 크리스 킴의 생각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러나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일도 아니었으므로 그의 의지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래야만 시간도 줄여 앞당길 수 있는 것이었고요. 그렇지 않다면 그냥 현지에 낸 미용실에서 버는 수입으로 먹고 사는 것 이상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현지에서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우선 그가 개업하는 미용실은 한국교민들보다는 현지인 고객들을 주대상으로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현지 미용실 분위기를 느껴 보도록 하려고 몇 군데 유력한 현지 미용실들을 견학시킨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냈습니다. 그가 현지 미용실들을 오히려 얕잡아 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의 미용실이 한국 미용실과 다른 것을 꼭 인도네시아가 열등하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여서는 곤란한 일입니다. 뭔가 좀 빠진 것 같고 없어도 될 게 있는 것 같고 좀 촌스러운 듯, 뭔가 부자연스러운 듯 우리 눈에 그렇게 비쳐도 그것이 현지의 문화와 정서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바닥에 깔고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대체로 장인정신이 부족한 인테리어 업체들이 체계적인 교육이란 받아 본 적도 없고 눈꼽만한 기본 상식도 없는 노가다들을 동원해 진행한 미용실 인테리어의 마감이 어딘가 좀 부실해 보이고 이런 저런 하자가 보인다고 해서 그 미용실의 퀄리티를 싸잡아 폄하해서도 안될 일이고 현지 미용사가 머리 자르는 순서와 가위 쥐는 방식이 자신이 한국에서 배운 방식과 좀 다르다고 해서 기본도 안된 놈들이라고 함부로 단정지어서도 안되는 일인데, 크리스 킴은 그 몇 번의 견학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미용은 한국에 비해 십수년 뒤져 있다…, 기술로는 인도네시아의 거장들도 자길 따라올 수 없다라는 생각을 굳히고 맙니다. 그리곤 이미 모든 것을 다 알아 버린 듯 더 이상의 견학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2년 후 다가올 크리스 킴의 실패는 이미 거기서 결정나 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그는 내 조언을 무시하고 몽인시디 거리의 자기 미용실을 지극히 한국적인 미용실로 꾸몄습니다. 한국 교민들을 대상으로 해서요. 미용사가 주인이 되어 운영하는 미용실이 자카르타에 또 하나 탄생하는 순간이었는데 그는 첫 단추를 그렇게 끼우고 말았습니다.

 

 

 

 

 

크리스 킴 미용실이 한창 인테리어 단장을 하고 있던 당시 현지에서 3개의 연예인 매니지먼트 회사와 2개의 IT 회사를 운영하던 한국계 홀딩회사 현지법인장이던 한 ROTC 후배가 그 중 한 연예인 매니지먼트 회사의 론칭 행사를 탐린(Thamrin) 거리의 일본 대사관 뒤 EX 몰에서 가졌습니다. 오랫동안 자리잡았던 사리나 백화점에서 EX 몰로 이사온 하드록 까페(Hardrock Café)를 통째로 빌린 행사였는데 그는 ROTC 선후배들도 잊지 않고 초청해 주었죠. 그의 회사가 보유한 모든 모델들, 탤런트들이 총동원되어 일반에 소개하는 자리였고 그곳에는 미용잡지들은 물론 대부분의 현지 언론매체들이 몰려 취재를 했습니다.

 

크리스 킴은 연예인 미용협찬을 희망하고 있었으므로 현지인 연예인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었고 법인장인 후배와 내가 아는 몇몇 매체 기자들을 소개해 줄 수 있는 자리였으므로 후배의 양해를 얻어 크리스 킴 부부도 그 자리에 초청했습니다.

 

공식적인 행사이니까 옷차림에도 신경을 좀 쓰세요. 취재진들도 많이 온다니 사진 찍을 일이 있을 지도 모르고…., 정장이 아니더라도 트랜디하게 입으시고…”

걱정 마세요. 꼭 시간 맞춰 가겠습니다.”

 

그렇게 약속했던 크리스 킴 부부는 모델들의 첫 캣웍이 시작될 때 하드록 까페에 도착했는데 문을 들어서던 그들의 모습에 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부가 모두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그냥 반바지가 아니었습니다. 밀리터리 룩의 얼룩무늬 반바지였지요.

나륻대로 핫팬츠 스타일에 소대나시 티로 나름대로 맵시를 낸 젊은 부인과는 달리 크리스 킴의 반바지는 무릎을 덮을 듯 말 듯 한 어중간한 길이에 펑퍼짐하기 그지 없었고 그 위에 입은 티는 원래 디자인이 그런 건지 아니면 늘어나서 그런지 명치까지 드러나도록 목이 깊이 파여 있었습니다. 더욱이 바짝 달라붙는 그 티는 불룩 튀어나온 그의 배를 강조했습니다.

 

배사장님, 시내 나왔다가 옷 갈아입으러 돌아갈 시간이 없어서 그냥 왔어요. , 괜찮겠죠?”

 

이미 우리 테이블 앞까지 와서 그런 얘기를 하는데 괜찮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다들 정장을 빼입고 테이블을 둘러 앉은 ROTC 선후배들이 나와 크리스 킴 부부를 돌아 보았고 난 화끈거리는 얼굴을 내색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써야만 했습니다. 모임이 모임이니만큼 우리 ROTC 동문들뿐 아니라 다른 초청인사들도 정장이나 바틱 일색이었고 현장 견학차원에서 데려왔던 우리 여직원도 맨 얼굴로 들여 보낼 수 없어 일찌감치 EX 몰과 붙어 있는 플라자 인도네시아 몰(Plaza Indonesia)의 루디 하디수와르노 미용실에서 거금 60여만 루피아를 들여 머리와 화장을 손 보았는데 말입니다. 난민촌에서 막 도착한 것 같은 크리스 킴 부부를 ROTC 들 테이블 사이에 앉히면서 난 사람들 눈치를 봐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등장을 보던 주최사 사장인 후배가 시종 띄고 있던 웃음 뒤로 어떤 생각을 중얼거렸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당시 굳이 문제삼지는 않았지만 사실 이 날의 사건은 그가 인도네시아의 미용산업이나 다른 사람의 입장을 너무나 얕잡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단초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 자신을 초청한 내 의도나 그가 그런 복장을 하고 들어서게 될 때 내 입장이나 주최사 사장후배의 입장, 그리고 그 모임의 격이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지나치게 경솔했던 것이고 그렇게 곤란할 것 같으면 부르지 않으면 될 거 아니었냐는 입장이었어요. 당연히 그는 그 후에도 아무런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어도 꾹꾹 참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내 입장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인 미용사들을 한번 도와 보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이 꼭 인격적으로 훌륭한 인간들이라서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죠. 이런 저런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어서 된 사람이 있다면 못된 놈도 꼭 있는 법이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 모두가 청운의 꿈을 품고 인도네시아에 왔을 것이므로 현지 업계에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으로서 가능한 도움을 줘 보겠다는 것이었지 인간 됨됨이에 점수를 매겨 점수별 협력의 한계를 정해 놓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그가 2007년 하반기에 미용실 인테리어를 모두 마치고 크리스 킴 헤어비젼 (Kris Kim Hair Vision) 이라는 간판을 단 후에도 살롱프로 잡지의 인터뷰를 비롯해 그와 그의 미용실을 띄우기 위한 가능한 협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미용실 문을 열고 나자 그는 당장 매일의 양식을 위해 미용실을 돌리는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업자나 숙달된 미용사 직원들도 없는 상태였고 한국 교민들을 대상으로 한 미용실에 찾아오는 손님들은 한국인 미용사에게 머리를 하겠다는 것이 근본적인 목적이었으므로 설령 현지인 미용사를 채용했다 하더라도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미용실 하나 외에는 자금도 조직도 없는 미용사 개인으로서 그것이 한계였습니다. 시간을 빼서 외부 협찬을 나간다면 당장 먹고 살 돈을 벌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당장 자금력과 조직력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상황에서 크리스 킴이 선택해야 하는 방향은 미용실 운영을 속히 안정시키고 그 미용실의 성공과 확장을 통해 위상을 높여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 킴은 매우 조급해 했습니다.

단기간에 승부를 봐야 한다는 인니 초짜의 성격이 또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미용실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무리수를 두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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