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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인생에 뭔가 쉽고 만만한 게 있을 리 없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크리스킴의 몰락

크리스킴의 몰락 (1)

beautician 2010. 1. 10. 22:06

 

 

2009 12 9일 자카르타에서 야반도주한 한국인 미용사 크리스 킴의 이야기는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우리 한국미용 역사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한국인들의 첫 인도네시아 진출은 태평양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미용실들의 진출은 한국기업들의 본격적인 인도네시아 투자가 시작되던 80년대 중반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그리나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도 한국 미용실들은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어서 교민들이 머리를 좀 하려면 많은 고충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요.

 

간단할 것 같은 남자 머리를 깎는 것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먼저 진출한 일본인 상가지역인 블록엠(Blok M)이나 그랜 위자야(Grand Wijaya) 같은 상가 콤플렉스에 이발소들이 입점해 있었지만 미용실들이나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이 즐겨 하는 짧은 장교머리를 깎을 수 있는 기술자들이 태부족이었어요. 머리에 바리깡(일본어이므로 영어로는 헤어클리퍼 – Hair Clipper 라 불러야 하지만 잘 와닿지 않아서리…)을 직접 대는 것이 당시 인도네시아 미용사들에게는 금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한국 남성들의 머리는 너무 빨리 자랐고 그래서 한번 이발을 한 후 한 달을 견디면 거의 로빈슨 크루소 비슷한 모습이 되곤 했습니다.

 

구렛나루 부분은 아주 바짝 짧게 밀어 주시고 윗머리는 좀 길어도 되는데 옆에 각이 지지 않도록 잘 다듬어서….”

 

이런 요구를 인도네시아어로는 물론 영어로 하는 것도 교민들에게는 머리에 쥐가 나도록 언어구사능력을 쥐어 짜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인도네시아 한국 이발소의 효시가 된 국제이용원의 출현은 교민 남성들에게는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지요. 인니 생활 10년 이상의 교민 남성이라면 이발의 고수 이동수 원장님에게 머리를 맡겨 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고 무궁화 본점 옆에 위치한 국제이용원은 오늘도 성업 중이지요. 지금은 카라와치 삐낭시아(Pinangsia) 루꼬의 박해성 원장의 서울이용원이 들어서 있고 끌라빠가딩의 은하수 이용원 등 대여섯개의 한국 이발소들이 들어서 있지만 여전히 규모나 서비스 측면에서 국제이용원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발 속도 역시 한국에서는 이발사 한 명이 한시간에 10명이라도 머리를 깎을 수 있겠지만 자카르타의 현지 미용사들은 한 명 당 최소 40분 이상 걸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다고 훨씬 더 나은 머리 모양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한국 이발소가 많이 없던 시절부터 교민 남성들도 쭈뼛쭈뼛하며 한국 미용실을 드나들었습니다.

 

남자들이 그럴진대 여자들은 오죽 했겠어요? 연예인처럼 자신만의 멋을 내려는 20, 30대 초반의 한줌도 안되는 숫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남성들 머리 모양은 많아야 10가지 정도나 될 듯 말 듯 하지만 여성들의 머리모양은 두께 5cm 짜리 미용잡지 수십권 분량으로, 그야말로 수천, 수만가지의 스타일을 구가할 수 있는 것이고 한국이라면 고객의 요구 한 마디에 미용사의 감각이 보태져 원하는 대로, 때로는 원하는 이상의 스타일을 낼 수 있겠지만 지금도 현지 미용사들이 감당할 수 있는 헤어 스타일들은 크게 한정되어 있고 개별 미용실이나 미용사 개개인에 따른 편차가 무척 심한 것도 사실입니다.

 

머리 끝은 컬이 안으로 말려 들어가도록 해주시고…, 앞 머리는 눈썹에 찰랑거리도록…, 그런데 약간 언밸런스하게…, 그리고 숱이 너무 많아 보이지 않게 귀 밑으로는 쉐기커팅으로…..”

 

여자들도 이런 얘기를 인도네시아어로 하려면 특별히 언어 레슨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좀 비싸더라도 한국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물론 교민들이 한국 미용실을 선호하는 이유는 단지 언어소통이 수월하다는 이유만은 아니지요.

 

한국에서는 중저가 브랜드로 분류되는 웰라(Wella), 로레알(L’Oreal)이 현지에서는 최고 브랜드로 취급되고 매트릭스(Matrix), 바이오라지(Biolage) 등도 로레알이 현지영업을 맡으면서 뜨기 시작했지만 한국 여성손님들 눈에 차지 않기는 마찬가지이고 한국인 모발에도 잘 맞지 않습니다. 다른 약재를 찾아 보려 해도 마카리조(Makarizo)같은 현지 제품을 제외하고는 거의 100% 중국산 수입품들이고 품질이나 재료가 검증되지도 않은 제품들입니다. 한국 미용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디지털 세팅기나 이온펌 같은 직펌기들도 최고급 미용실들이 아니면 찾아 보기 힘들고 최고급 미용실이라고 해서 특별히 서비스가 뛰어 나거나 최신유행의 멋들어진 머리를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닌데 한국 최고급 미용실보다 더 비싼 돈을 치러야 하지요. 그런 것들이 교민들로 하여금 한국미용실을 찾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 둘 늘어나게 된 한국계 미용실들은 기대보다 많은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손님은 모발손상이 많아서 이 약재를 사용하는 것보다는 이 생약성분 약재를 사용하는 게 더 좋을 것 같고…, 이 색깔로 염색을 하려면 아무래도 탈색을 먼저 한 후…, 그렇지 않으면 최대 얻을 수 있는 색상은 이 정도일 것 같은데…, 요즘 최신 트랜드는 머리를 양쪽으로 이렇게 말아서…,”

 

미용사가 이런 얘기를 현지인 손님에게 영어나 인도네시아어로 하려 한다면 그 역시 머리에 쥐가 날 일입니다. 그 정도 언어가 된다면 미용사로 있기보다는 통역사나 여행사 안내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겠지요. 평생을 미용기술을 배우고 익히는데 노력해 온 한국 미용사들이 현지에서 인도네시아인들에게 한국 사람들이 느끼는 정도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그런 언어 장벽 때문에 애당초 불가능해지고 한국인 취향에 맞춘 미용실 구조나 인테리어들도 현지인들에게는 조금 생경하고 부담스럽게까지 느껴지지요. 그래서 인구 22천만명에 전국적으로 30만개 이상의 미용실들이 산재해 있는 물 좋은 인도네시아에서 월등한 미용기술을 가진 한국 미용실과 한국 미용사들이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것은 거의 기대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래서 한국 미용실들은 한 줌도 안되는 교민사회를 대상으로 영업을 하고 미용실 절대 숫자가 결코 많다고 할 수 없음에도 결과적으로 한국 미용실 간에 과당경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현지의 한국미용실들이 한국에서 받던 돈보다 못한 돈을 받고 머리를 해주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한국미용실들은 자카르타 남부의 스노파티(Senopati)거리를 중심으로 몰려 있어 그 경쟁은 더욱 심해집니다.

 

전통적으로는 스노파티 거리의 뷰티샵(Beauty #), 브라위자야 (Brawijaya) 지역에 있던 스칼렛(Scarlet), 라디오 달람 (Radio Dalam) 한일마트 뒤에 있던 세명가꿈터 등이 교민시장을 놓고 삼파전을 벌이는 양상이었지요. 여기에 동해복집에서 권명희 복국으로 바뀐 건물 3층에 지금은 없어진 갤러리 J, 위자야 거리로 이사해 스파를 연 JR 살롱, 스노파티 거리 안쪽에 위치한 우먼센스(Women Sense) 등이 가세했고 다르마왕사 스퀘어(Dharmawangsa Square) 3층 미스터 권의 헤어 펌(Hair Perm)도 오래 한 자리를 지키면서 손님들을 모으고 있어요. 이들 일곱 개의 미용실들 중 스칼렛과 갤러리 제이를 제외하고는 이제 나름대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셈입니다.

 

이들 사이에서는 수년 전 한인 미용협회 비슷한 친목모임이 시작되려 했으나 순조롭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이 나눠 갖고 있는 시장이 너무 작다는 점과 그들의 단골인 교민들의 해당 미용실에 대한 충성심이 미덥지 못했기 때문이었지요. 미용실들은 겉으로는 협력을 외치면서도 뒤로는 가격경쟁을 시작했고 한국 가격과 비교하여 현실적으로 커팅에 15만 루피아(한화 1 5~17천원) 정도를 받아야 하는 가격이 5만 루피아(한화 5~6천원)까지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모임은 흐지부지되어 버리고 미용실들은 보다 적극적인 경쟁에 나서게 됩니다. 협력관계가 아니라 대체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 버린 것이죠. 그 경쟁이 현지 시장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매우 건전한 것이었겠지만 여전히 교민시장에만 제한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국의 신발산업이 무너지면서 부산지역 신발공장들이 대거 땅거랑(Tangerang)지역으로 이전해 오고 삼성, LG 등 대기업들이 찌까랑(Cikarang), 찌비뚱(Cibitung) 지역에 대규모 공장을 세우면서 한인사회는 자카르타를 벗어나 외곽으로 팽창되었고 이에 따라 땅거랑 인근 카라와치(Karawaci)의 삐낭시아(Pingangsia) 루꼬단지는 마치 코리아타운처럼 변모해 앞서 언급한 서울이발관 외에도 헤어스케치, 아름다운 등의 한인 미용실이 자리를 잡았고 찌까랑에도 스칼렛의 분점이 문을 열었다가 지금은 켈리 미용실 등 2~3개의 한인 미용실이 경쟁을 하고 있는 양상입니다.  자카르타 북부의 끌라빠가딩 지역에도 한 두 개의 미용실이 생겨나 쯤빠까마스(Cempaka Mas) 아파트의 샤넬 미용실(Channel Salon)이 수년 사이 자리를 잡았고 가딩인다 루꼬의 소피아 미용실도 지금은 유 앤 미(You & Me)로 이름을 바꾸고 영업 중이지요. 여러 번 미용실을 시도했던 한인 미용사 박진씨도 최근 그랜드 오프닝을 한 몰 오브 인도네시아(Mall of Indonesia = MOI) 외곽 루꼬에 헤어 앤 비욘드(Hair & Beyond)라는 이름으로 미용실을 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한국인 주인으로 바뀌었더군요.

 

2000년대에 들어서기까지 현지 한인 미용실들의 특징은 미용사가 주인인 미용실이 거의 전무했다는 점입니다. 우먼센스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미용실은 유수한 사업가를 남편으로 둔 부인이 자신은 미용사가 아니면서 부업을 한다는 측면에서 한국에서 미용사들을 불러와 시작한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래서 미용실 관리 대부분 한국에서 온 미용사에게 의지하는 형태였으나 전문적인 미용실 경영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한국인 미용사의 당시 위상이란 월급받는 고용인에 불과했고 나중에 경험이 붙고 자신감이 생기면 인근에 경쟁 미용실을 낼 것을 우려해 여권을 주인이 담보나 인질처럼 쥐고 있다가 계약기간이 끝나거나 이런저런 수틀리는 일이 생기면 불시에 출국조치를 시켜 버리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래서 현지의 한인 미용실들은 한국처럼 헤어미용으로 특화되지 못하고 대부분 피부관리, 찜질방을 겸하는 것이 보편적인 형태가 되었습니다. 오직 미스터 권 헤어펌 정도만이 전문 헤어미용을 고수하고 있어요.

 

현지와의 합작을 통해 현지시장으로 진출하려는 노력도 2000년대에 들어 시도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몽인시디(Monginsidi) 거리에 들어선 유모드(U-Mode)가 최초가 아닌가 합니다. 처음엔 한국인 미용사들을 불러 왔지만 지금은 현지 미용사들만을 데리고 교민들은 물론 주로 현지인 고객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고 있지요. 중국인 주인들이 한국인 미용사를 고용하여 미용실의 서비스와 품격을 높이려는 경우도 있었는데 성공적인 사례로는 따만앙그렉몰(Mall Taman Anggrek) 그라운드 층의 합(HABB) 정도 입니다. 한실장을 중심으로 한국인 미용사들이 팀을 이루고 있어 일견 한국 미용실처럼 보이지만 소유주는 화교 중국인이지요.  몽인시디 거리 한강식당이 있는 건물 1층에 있는 퀸덤(Queendom) 역시 중국인 소유의 미용실로 한때 스칼렛 미용실 체인을 시도했던 하여사님과 합작을 했으나 지금은 독자적으로 한국인 미용사를 채용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리온 정(Lyon Jung)이라는 미용사는 한국에서는 연예계 계통에서 일을 했던 모양이고 2009년에는 같은 계통의 후배를 불러와 나름대로 현지에 자기 라인을 형성하기 시작했어요.

 

90년대 말부터 인도네시아에 불기 시작한 한류열풍이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이런 한인 미용사와 화교 미용실주인과의 합작이 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2000년대 중반에 싱가폴에 본점을 둔 일본계 순지 마쯔오(Shunji Matsuo) 미용실이 현지의 가야 스파(Gaya Spa)라는 유력한 스파 체인첨과 합작 계약을 맺어 시내 요처에 3군데 지점을 동시에 개장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당시 막 그랜드 오프닝을 한 뽄독인다몰 II(Mall Pondok Indah II) 3층에 있었고 그곳에 이성국이라는 걸출한 젊은 한국인 미용사가 와서 활약을 했지요. 전 세계에서 미용사들을 채용해 각 미용실에 배치하던 순지 마쯔오는 뽄독인다몰 지점에 이성국씨를 포함해 말레이시아인, 싱가폴인 미용사들을 각각 한 명씩 두고 적지 않은 매출을 올렸지만 역시 보수적인 인도네시아 측 파트너와 사업방향이 맞지 않아 합작 1년만에 철수해 버리고 이성국씨도 돌아가 버립니다.

 

건축붐이 대대적으로 일었던 2000년대 내내 자카르타에만 십 수개의 대형 몰들이 지어졌는데 그중 하나인 그랜드 인도네시아(Grand Indonesia) 5층에 화교 소유의 크리스탈 라인(Crystal Line)이라는 미용실에는 당시 갤러리 제이를 거쳐 HABB에 갔다가 귀국한 후 다시 돌아온 로미 리(Romy Lee)라는 한국인 미용사가 크리스 리(Chris Lee)로 이름을 바꾸어 잠시 일했지만 어떤 이유로 갑자기 귀국하면서 몇 개월 후 미스터 조라는 한국인이 오게 되었어요. 원래 다른 한국 미용실에서 일하기로 하여 원장님과 함께 입국했던 미스터 조는 더 좋은 조건을 찾아 원장님을 배신한 셈이 되었지만 최근까지 약 1년간 크리스탈 라인과 리 살롱(Lee Salon)이라는 화교업체에서 일하다가 화교 주인과의 불화로 결국 한국에 돌아가 버립니다.

 

이렇게 한국인 미용사가 현지 미용실에 들어가 일하는 경우 때로는 한국 미용실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나은 보수와 조건을 받을 수도 있지만 언어와 문화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 결말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현지 한국 미용실들의 숫자가 조금씩 늘어나고 연조가 점점 깊어지면서 자카르타를 스쳐 갔거나 눌러 앉은 미용사들의 숫자 역시 많이 늘어 났습니다. 당시 한국 미용사들의 현지 진출은 주로 뷰티샵과 스칼렛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조 깊은 뷰티샵은 여러 명의 미용사들이 순차적으로 계약기간 동안 일을 했고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다시 인도네시아로 와 다른 미용실에 취직하거나 자기 미용실을 내려는 시도를 했어요. 반면 스칼렛은 브라위자야 지역의 본점을 중심으로 슬리피(Slipi) 아파트와 찌까랑 지역에 지점을 내면서 미용사들을 들여 왔지만 현재 남아 있는 미용사는 스노파티에 있는 S.H. 스칼렛 미용실에서 근무하는 사람 정도이고 그 전에 왔던 미용사들은 물론 그 전의 벌려 놓았던 미용실들도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뷰티샵은 미용실 운영을 통해 이익을 추구했던 반면 스칼렛은 설립한 미용실을 팔아 넘기면서 권리금 수익을 추구했던 것인데 현지 시장기반, 즉 교민시장의 규모가 그런 미용실 거래방식을 충분히 받혀 주지 못했던 것이죠. 스칼렛 미용실들은 인수자체가 되지 않거나 인수한 사람들이 손해를 보기 일쑤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용사가 직접 개업한 첫 전문 미용실은 스칼렛에서 나왔습니다.

스칼렛 미용실에 취업한 미스터 한이라는 미용사가 시내 최중심가에 있던 니코 호텔 2층 별관에 HAN’s Salon 이라는 미용실을 개업한 것이죠. 그것이 2005년 쯤의 일이었습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미용기기 수입판매를 막 시작하고 있던 2003년도에 스칼렛 미용실 브라위자야 본점에서였습니다. 미스터 한은 당시 스칼렛의 수석미용사인 셈이었고 본점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의 첫 인상이 매우 특이했습니다. 젊은 미용사들은 누구나 패션을 주도하려는 듯 모험적인 복장과 머리모양, 염색을 하곤 하지만 30대 후반 특히 40대에 들어선 미용사들은 마스터급에 들어서면서 조금은 보수적인 듯한 단정한 모습을 하는 반면 나이가 적지 않았던 미스터 한은 카키색으로 염색한 짧은 머리에 개량한복을 입고 때로는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달변은 놀라울 정도였지요.

 

그는 스칼렛 미용실 주인의 친척이고 미용실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고 나중에 스칼렛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길을 걸었던 것을 보면 그가 했던 얘기가 모두 사실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어요. 일본에서도 1년여를 지내며 미용기술을 익혔다는 그는 니코 호텔에 미용실을 냈을 때엔 주로 일본인들을 주고객으로 했는데 홍보 팜플렛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헤어스타일을 담당했다는 경력도 일본어로 적혀 있었지만 역시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요. 그러나 그가 인터폴 수사관 신분증을 만들어 가지고 다녔고 그의 사륜구동 찦차에 경광등과 확성기까지 달고 다녔다는 점에서 놀라운 뻥과 함께 대단한 배짱도 함께 가졌던 사람임은 틀림없었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자본을 들고 오지 않은 그가 시내 중심가에 번듯한 미용실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강력한 후원자나 동업자가 있었다는 반증이었고 그와 처음 얘기를 해 보는 사람은 누구나 혹 하고 넘어갈 정도로 그의 달변은 사람들의 귀를 매료시켰습니다. 그는 실제로 살론프로(Salon Pro)같은 현지 헤어미용 잡지에 자기 헤어작품들을 출품키도 하는 등 나름대로 현지에서 자신의 이름값을 높이기 위한 노력도 했었고 그의 미용실은 한때 끌라빠가딩 지역에 있었던 북한식당 칠보산의 평양아가씨 여섯명의 머리를 해주는 북한대사관 지정 미용실 같이 사용되기도 했었지요. 자신의 미용실을 시내 한복판에 가진 미용사로서 그는 현지 한인 미용사들의 맏형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미스터 한이 당시 막 신축되고 있던 그랜드 인도네시아 몰에 2호점을 낸다며 기염을 토하던2008년 갑자기 미용실 문을 닫고 잠적해 버린 일은 많은 사람들의 의구심을 자아냈지요. 당시 일본인 부인을 얻었던 그는 한인사회보다는 일본인 사회에 더욱 근접해 있었으므로 그가 잠적한 배경을 잘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단지 몇몇 사람들이 그에게 사기를 당했다며 성토한 일이 있었지요. 실제로 미스터 한은 사해 소금을 소재로 샴푸를 만들어 특허를 냈다며 내게도 자랑했고 그 판매권을 흥정하기도 했는데 그 제품은 곧 유명업체의 브랜드로 시장에 나왔고 미용사 개인이 사해 소금을 수입해 현지 공장에서 샴푸를 생산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그 샴푸사업은 그의 인터폴 수사관 신분증과 비슷한 냄새를 풍겼고 어쩌면 그것이 그가 잠적한 이유 중 하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몇 개월 후 미스터 한은 반둥에 나타났어요. 반둥 중심가인 다고(jl. Dago) 인근 리아우 정션(Riau Junction)이라는 몰 2층에 HAN’S SALON을 낸 그는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지 족자 그룹(Jogya Group)이라는 반둥의 대형 유통업체를 후원자로 하여 수만트리 (Jl. Sumatri)거리에도 KAWAII by HAN’s 라는 이름의 2호점을 내고 레이라는 이름의 일본인 미용사도 데리고 옵니다.  그는 다시 자카르타에 나타나 끊어졌던 업계 업체들과 교류를 시작했고 한국 미용실들을 다니며 반둥에 근무할 미용사들을 모집하기도 했어요.

 

그가 당시 막 신축된 파리스 반 자바(Paris Van Java)라는 반둥의 한 고급 몰에 3호점을 세운다는 얘기가 들리면서 우리도 제품공급 관련 미팅을 위해 그 미용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스터 한은 한 한국인 미용사와 현지인들을 자기 스탭들이라고 소개하며 우리를 만나면서 확장되어 가는 그의 미용체인의 성공을 자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반년도 지나지 않아 우리가 반둥에 다이렉트 마케팅을 시작하던 2009 2월 당시 반둥의 상황은 전혀 돌변해 있었습니다.

 

우선 그 신축 몰의 3호점은 HAN’s 라는 간판을 떼고 ICON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어요. 첫 방문했던 당시 미스터 한이 자기 스텝이라며 소개해 주었던 화교 여자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미스터 한을 성토하기 시작했고요. 그녀가 실제 그 미용실 주인이었고 한국인 남편의 소개로 연결된 미스터 한을 만나 그의 미용실 명의로 체인점 계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조건이라는 것이 미용실 인테리어와 제반 세팅을 미스터 한에게 일임하며 해당 프랜차이즈 비용을 지불하는 대신 미스터 한이 자신의 미용팀을 투입해 미용실을 가동하고 매월 1만불인가 2만불 정도의 매출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좀 과다하다 싶은 인테리어비용과 프랜차이즈 계약금을 지불한 후 그랜드 오프닝을 했는데 개업 후 이틀 만에 미스터 한은 어떤 계약 미이행의 이유를 대고 미용팀을 모두 철수시켰다는 것이었어요.

 

미스터 한에게 모든 것을 전적으로 일임했던 미용실 주인으로서는 황당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고 미용사나 미용재료의 수배를 당장 할 수 없었던 그녀는 미용실의 문을 열고서도 손님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분쟁이 벌어졌지만 미스터 한은 후원사인 족자 그룹을 등에 업고 고압적인 태도를 취할 뿐이었고 벌어진 상황에 대한 처리나 변상, 기지급한 대금의 반환 등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미용실 주인이 분통을 터뜨리는 이유였지요.

 

그러다가 리아우 정션 몰의 HAN’s 본점을 찾아 가게 된 것이 그로부터 2개월 정도 후였는데 거기서 미스터 한을 만나게 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상황은 더욱 복마전으로 치달아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어떤 일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미스터 한은 족자 그룹과도 한바탕 분쟁을 겪었던 모양이었습니다. HAN’s 본점도 이미 그 간판을 내리고 La Luna 라는 다른 간판을 걸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 자리에서 만나게 된 일본인 미용사 레이는 말을 아끼면서도 대략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어요. 미스터 한은 족자 그룹 회장부인의 후원을 받아 미용실을 차리면서 주택이나 차량 등 많은 지원을 받으면서 매출이나 이익에 대한 여러 가지 약속을 했지만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았고 그 기간이 길어지면서 결국 감정의 골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 미스터 한은 몇 개월 후에 돌아온다며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떠나면서 레이에게 HAN’s 미용실의 뒷 일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시 그날 우연히 그곳에서 만나게 된 미용실 주인이자 족자그룹 회장부인은 또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미스터 한은 일본 유수의 미용학교에 교장으로 발탁되어 일본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얘기했다는 것입니다. 미용학교에서 강사를 스카우트 한다면 모를까 교장으로 스카우트 되어 간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지 내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번에도 그의 인터폴 수사관 신분증과 비슷한 냄새가 강하게 풍겼지요.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그 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여서 가능하면 미스터 한과 파리스 반 자바 몰의 아이콘미용실과 어떻게든 중재를 해 보려던 나로서는 결국 아무런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몇 개월 후에 돌아온다던 미스터 한의 소식은 그 후 더 이상 듣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가 자카르타를 떠나던 당시의 상황도 대충 그런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따름이지요.

 

HAN’s 본점이었던 리아우 정션의 미용실은 나중에 현지 로컬 미용체인인 아나타 살롱(Anata Salon) 에 넘어갔고 파리스 반 자바의 아이콘 미용실은 출범과 함께 타격을 입은 채 문은 열고 있지만 지금도 거의 손님이 없는 상태에요. 엉겁결에 미용실을 떠맡게 된 일본인 미용사 레이만이 수만트리 거리의 카와이이 살롱을 꾸역꾸역 지키고 있는 중이고요.

 

어쩌면 인도네시아의 한인 미용체인 선구자로서 큰 족적을 남길 수도 있었던 미스터 한은 그렇게 7~8년간의 인도네시아 생활을 마감하고 떠나가야만 했습니다. 그의 미용실력을 감히 내가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는 분명 뛰어난 마케터였음에도 그의 재능과 아이디어를 뒷받침해 줄 만한 추진력과 관리능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어쩌면 80년대에 대거 인도네시아에 진출했던 한국 봉제업체들의 역사를 미용계에서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초창기 한국 봉제업체들은 대기업의 현지법인들이었고 화이트칼라의 법인장들이 기업에서 갈고 닦은 경영능력으로 생산인력들을 거느리고 옷을 만들었지요. 그러다가 여러 번 업계에 지각변화가 일어나면서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경험을 쌓은 생산 현장 출신들이 공장을 세워 초반엔 값싼 인력과 밀려드는 오더에 힘입어 승승장구하지만 경영관리 훈련을 전혀 받지 못했던 그들 생산출신 사장들은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주먹구구식 관리를 해 오다가 경제위기가 터질 때마다 도산하고 야반도주하는 모습을 재현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최초 진출 이래 20년 이상 훌쩍 넘은 지금 비로서 생산출신 사장들이 경영하는 회사들도 필요한 인재들과 시스템을 도입해 강인한 생존력을 습득하게 된 것입니다.

 

경영능력이 없는 미용사가 미용실을 차리면 운이 아주 좋지 않은 한 말아먹기 십상이지요. 설령 한 개 미용실을 성공한다 하더라도 무리하게 지점 개설에 전력하다 보면 자신의 관리능력을 초과해 버리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고요. 미스터 한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한국인 미용사들의 도전은 오늘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그들 중 누군가가 성공하기 시작하면서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한국계 미용실 체인들이 들어서는 날도 곧 도래하리라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분석이 필요하고 그와 같은 정도로 철저한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판단과 분석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미스터 한이 아직도 니코 호텔에서 HAN’s 미용실을 하고 있던 시절에 그와 비슷한 시도를 시작하려던 한 한국인 미용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크리스 킴 (Kris Kim) 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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